14. 혼수 상태 (The state of befuddlement)

 

 

 

   이 문제를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거짓구원(pseudo-deliverance) 즉 우리가 살아갈 때 구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모든 커다란 운동들을 신중하게 배제해야 한다. 긴장과 불안의 나날 속에서 인간은 인간이 종종 종속되어 온 것들, 즉 이기심, 정욕, 물욕(love of money)등등과 같은 그러한 것들에서 오랫동안 해방되기를 원하는데 그 나날들에서 마음은 단지 큰 감정으로만 넘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쟁터를 나가는, 그리고 그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을 아는 병사들은 그런 상황에서 많은 도덕적인 긴장들로 부터 자유로워진다. 그 고용주는 더 이상 고용주가 아니다. 고용주는 고용인과 나란히 행진한다. 그들은 함께 행진하며 노래 부른다. 모든 매듭(ties)은 느슨해져 버렸다. 더 이상 야망과 이기심(selfishness)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삶에 있어서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이 죽음 앞에서 상대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근심과 걱정들로 골치를 앓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것들은 죽음의 위험 앞에서 날아가 버렸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감정의 순간에 새로운 생각들이 탄생된다. 우정, 진실하고 참된 우정, 죽음 앞에서의 우정은 지금 모든 피난처가 파괴되어 버렸고 인간이 어느 한 순간 그를 파멸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사실에 직면해 있는 지금, 번성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한 길고도 격렬한 전쟁이 프랑스의 베르뎅(verdun)요새 앞에서 터졌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그 전투에서 그들의 생명을 잃었다. 가장 끔찍한 그 전투에서 싸웠던 그리고 그의 오른 팔을 잃어버렸다. 한 병사로부터 나는 한 때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 “나는 결코 베르뎅에서 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말은 우리를 잠시 동안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현대 전쟁의 의미와 의의를 알고 여전히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악한 욕망, 모든 나약한 성질, 그의 삶에서 모든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갑자기 말소되어 버렸을 때 그리고 그가 그의 존재의 기질마다 힘 있는 감정에 선동될 때. 사람이 깜짝 놀란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삶에 대한 모든 참호(entrenchments, 은신처)와 자기변호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스스로 완전히 새로운 삶의 공간에는 들어 올려진 것을 느낀다. 그곳은 사소한 변명과 잘못된 환상이 더 이상 자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빛의 속도처럼 재빠른 어떤 한 순간 일지라고 그가 죽음과 맞닥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구원의 외형(semblance)즉 일순간의 지속적인 구원에 불과할지 모른다.

인간이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그때 그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수 천 개의 작은 실들이 갑자기 그에게로 돌아선다. 사람은 병상에서 그와 동일한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열이 피를 통해 질주하고, 사람의 심장이 적당한 생각들로 가득 찰 때, 그 때, 우리는 종종 감각들과 관계하여 생겨나는 놀라운 미소를 경험한다. 헛되고 하찮은 것들에 관한 온갖 종류의 걱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얼마나 짜증스러워하고 시달렸던가! 그런데 우리가 어제 그렇게 관심을 쏟았던 그 모든 미치고 가치 없는 것들이 얼마나 지극히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가! 이런 균형 잡힌 관찰을 할 때, 얼마나 갑자기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 되어버리는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사소하고 별 볼일 없이 되며, 우리를 깊이 감동시켰던 것들이 무익하고 쓸데없이 된다. 날마다 우리를 괴롭히고 화나게 만들던 죄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우리의 병든 상태(sickness)에서 구원받은 가장 위험한 꿈인 즉 우리가 지금 그렇게 꿈꾸고 있는 환상은 우리의 매일 되는 죄악된 삶의 속박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환상이다.

   이 꿈 역시, 하나의 종국에 도달한다. 병들었던 사람은 누구나 건강이 회복될 때 자신의 마음이 지금까지 투옥되어 왔던 그와 같은 욕망들의 그물에 곧 다시 에워싸이게 된다는 것을 안다. 비슷한 구원들은 여러 번 그리고 다른 양식으로 가능하다. 큰 모임 혹은 회의에서 대중 질문 중 어떤 것이 우리의 영혼에 숨어들어 올 때, 그러한 구원의 느낌은 어느 순간에 명확해 질 수도 있다. 열렬한 연설 혹은 논쟁 혹은 탄원, 자발적이고 마음을 채우는 노래, 가치 있는 이유로 인한 감동적인 열광 -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삶을 묶고 속박하는 금기들을 없애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치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그러한 속박들을 비웃는 것처럼 잠시 동안 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자. 비록 그것이 어느 정도 희망적인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러한 구원은 그 가장 깊은 의미에 있어서 환상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끝도 아니다. 우리가 매일 고된 삶(on the everyday drudgery of life)에 던져질 때 우리는 다시 동일한 쇠사슬과 쇠고랑에 속박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전에 우리를 경계와 굴레에 묶어두었던 그 모든 실수와 헛점과 허물들을 냉소하는 꼴들을 본다.

 

   인간은 때때로 그가 자신의 피부바깥으로 기어나올 수 있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그러한 신비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나 이전에 그를 괴롭히고 화나게 만들었던 것들은 다시 그를 성가시게 하기 위해 되돌아온다. 우리는 우리가 한 번의 대담한 강타(blow)와 한 번의 강한 당김(jerk)으로 이러한 단점들을 날려버릴 수 있다고 꿈꿀 수 있지만, 그것들은 강하고 질기다. 그것들은 우리와 더불어 남아있고, 그리고 그것들은 가장 알 수 없는 순간에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환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구원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갑작스럽고 즉흥적인 감정들에서 구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는 것은 단단하고 진지하며 생기 있는 삶의 법칙과 실제에의 구원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질문이 놓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신음해왔던 모든 이러한 단점과 허물들의 멍에로 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기꺼이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사실인가? 그분께서는 구원과 구속의 역사가 우리 안에 보여질 수 있도록 실제로 우리를 다른 존재들로 만드실 수 있는가?

 

   우리는 실제로 그 분에게 기적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는 전투와 전쟁에 지쳐서 옛 삶의 습관과 버릇에(to the rust and grooves of the old life)우리 스스로들을 체념하는가? 나는 우리가 이러한 질문들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내적인 회복(rehabilitation)을 위해 아우성친다. 우리 시대의 초조와 긴장 속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말 할 수 있어야만 하고,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것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선포 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그분께서 제공하신 그 구원을 믿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