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 (Part 2.)

 

 


   하나님 나라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기적이다. 그것은 더렵혀지고 오염된 손으로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그때 그것을 받았던 자의 마음에 있는 한 알의 씨로서 살아 성장한다. 우리의 언어로 우리는 그것이 역동적인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것은 밀가루 반죽이 발효되어가기 까지 쉬지 않는다. 이 조각난 세상에서 그것은 잡초 한 가운데서 자라야한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잡초들을 묵과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마음들을 가득 채우기를 원한다. 산상수훈은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 약속(promise)의 국면보다는 명령(command)의 국면에 더 많이 남아있다. 산상수훈은 새것을 진술하며 표현하고 우리의 마음이 무조건적으로 그 새것을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그 배경을 거의 보여주지 않으며 실제로 이런 일들이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날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 비유들에서 우리는 하나의 변화를 주목할 뿐인데, 그것은 거기에는 명령에 관한 강조가 강한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what is to happen)라는 적극적인 진술에서 이야기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역시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크게 대조되어 지는 것으로서의 사건들에서 인상을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무와 같이 성장하며 그것은 60배, 100배의 열매를 생산해내며, 그것은 인간에게 가치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가져와 지며, 그것은 성장하지만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상하게도 자명하며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구세주 자신은 이러한 것들을 “숨겨진 것들”이라고 부르는데 제자들은 단지 한번 힐끗 볼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신비는 그 비유들 자체에 그렇게 많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들은 크리스탈(crystal)처럼 투명하기 때문이다 : 더욱이, 이 모든 표면상으로 매우 명백한 것들이 대부분 우리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현실적인 실제와의 극악한 대립이라는 것에 놓여있다. 실제적인 삶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본다면 그러한 것들은 명백하지는 않다. 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는 종종 들판에 있는(뿌려진) 하나의 씨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중에 있는 쳐다보는 하나의 황금장식처럼 보인다. 종종 그것은 전혀 열매를 적어도 볼 수 있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전혀 스스로 그리고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그것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알지 못한다. 달리 말한다면 그 비유들의 신비는 우리의 분리되고 파괴되어진 삶에 무한한 문제들이 되어버린 모든 현상이(all the phenomena), 적어도 하늘나라에서는 있는 명백한 진리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나의 완전히 다른 빛이 그 문제에 던져지는데 즉 지금 내가 방해하거나 반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만일 내가 그러한 성장을 방해하지 않고 그것에 장애물을 놓지 않는다면 하늘나라는 저절로 성장해간다.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서처럼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내적 필요성 때문에 그 자체를 많은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내는 확장에 관한 자연스러운 충동(urge)이 놓여있다. 솔직히 거리낌 없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더불어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그 문제를 토론하셨다. 당신을 믿었던 소수의 무리에게 당신께서는 이러한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1,32)

 

   이러한 마지막 말씀들은 그분의 청중들에게 명백하게 오해되었다. 그들은 그 말씀들을 정치적이고 외적인 의미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들은 반대했다. 예수께서는 그때 당신의 가르침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셨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케되리라” (요한복음 8:34-36)

 

   예수께서는, 성경의 이러한 말씀들에서, 가장 큰 가치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말씀들을 죄가 종의 신분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충분한 무게를 둔다. 분명한 숙명론(fatalism)이 죄 속에 있다. 그것은 새롭고 보다 많은 죄들을 생산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우리가 소중히 하는 모든 사고들은 말하자면 미래에 있어서 우리 삶의 과정을 과거의 동일 한 허물과 실수에서 등 돌리려는 통로(channel)를 잘라내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이러한 허물들로부터 탈출시킬 수 없다. 죄는 비정하고 잔인한 폭군(tyrant)이며, 모든 도피를 불가능케 만든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만일 무정하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입증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것이다. 즉 우리의 성격 속에 폭군적인 힘인 죄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매일 짓는 죄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그러한 힘들에서 우리 자신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씨름하지는 않고 다만 필사적으로 그것들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다.

 

   실제로 자유하기 위해서 - 그것은 열광적인 한 순간에 이러한 속박들을 묵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구출되어 지고 그것들로부터 해방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 사람은 아들(the Son)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 아들(the Son)은 실제로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분은 실제로 우리자신의 죄들이 조이는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낼 수 있다. 이 능력을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분이 진리를 실천하시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작은 구절은 세계적인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진리이다! 내가 나 자신과 나의 삶에 관한 모든 환상들을 내려놓을 때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위에와 그분께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내게 말씀하신 것 위에 나 자신을 둘 때 그것은 진리이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의 삶의 실체를 충분히 깨닫게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의 실체를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모든 공상적인 지지기반들과 핑계거리들을 포기해야 하며, 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진리의 품속으로 던져져야만 한다. 그 큰 내적 구원, 내 자신을 사랑함과 이기주의, 나의 이성적 욕망들로 부터의 구원, 그리고 매일의 압박으로부터의 구원은 오직 진리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실로, 진리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저절로, 자발적인 구원을 가져온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동일한 것에 대해 언급하신 예수의 또 다른 말씀을 발견한다. 5장에서 우리는 수 년동안 혈기마른(paralyzed) 한 사람을 만난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다가가셔서 치료할 모든 희망이 그의 두 눈에서 사라져 버렸음과 이 사람이 자신의 육체적인 삶에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을 갖지 않음을 보신 후에 그에게 이 말씀으로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와 같은 대화에서의 이러한 말씀은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이 아주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혈기마름을 인간이 겪는 내적인 혈기마름의 한 표식으로 보신다. 이 말씀은 구원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이 실제로 구원되어지기를 열망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때로 어떤 병자는 자신이 치료과정을 방해하고 늦추는 위치에 자신을 방치해 둘 수도 있다.

 

   이것은 내적인 사람의 경우에 아주 명확한 사실이다. 일하는데는 실제적이고 강한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허물과 죄들의 압박아래서 탄식하고 불평할 수 있으나 내적으로 그는 그것들을 마음에 품고 단단히 그것들에게 붙잡혀 있다. 구원은 오직 그것을 얻으려는 강하고 진지한 열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진 교부 성 어거스틴의 역사에 설명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의 생애의 어느 시기에서 그는 소위 그가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 - “잠자는 자들이여 깨어나라 그리고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곧 하겠습니다.” - 그 생각이 내적으로 살아남아 있었던 어거스틴은 후에 그가 한동안 잠자기를 더 좋아했다고 고백했다. “오 하나님. 나를 회심케 하소서,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생애의 후반기에 그는 그러한 열의 없는 우유부단한 상태에서는 누구도 기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런 다음 그는 말했다. “간다는 것”은 “기꺼이 강하고 완전한 의지(willingness)를 따라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fortiter on integre velle), 반쯤 부상당한(helf wounded) 의지를 이리저리로 흔들어대는 것이 아니다.”(고백록 Ⅷ 5와8)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곳, 즉 눅 11:9-13의 아주 짧은 비유에서 구세주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기도를 취급하시면서, 땅위의 아버지가 달걀을 요구하는 어린아이에게 전갈을 주는 것만큼 그렇게 잔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신다. 우리가 너무 자주 복음서들에서 발견하는 그런 중요한 사고를 도약시키시면서 구세주는 계속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달리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모든 종류의 내적인 싸움과 어려움들에 대해 계속해서 걱정할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즉 충분하고도 한없는 믿음과 신뢰로 그분께 나아가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지시하심 그리고 내주하심을 그분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분 안에 우리의 쓸 것을 위한 커다란 능력의 측량할 수 없는 원천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자신의 능력의 충만함을 나누어 주시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믿는다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내적인 필요와 우리의 혼란의 원인을, 즉 우리가 결코 하나님께서 실제로 준비하시고 기꺼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는 것을 완전히 확실하게 믿지 못한다는 것을 예리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이점에서 나는 당신들이 기억하는 한 말씀을 산상수훈으로부터 가져올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우리가 관찰해본 산상수훈은 명령의 색조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산상수훈은 약속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들 중 하나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의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의”라는 그 단어는 많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 중 하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삶의 진실한 새로워짐(renewal)이다. 그러나 “의”라는 그 단어 속에서 이러한 삶의 부흥은 아주 특별한 관점으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새로워짐 그 자체(an sich, in itself)에는 관심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고통스러운 죄들을 제거할 수 있는가 혹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죄성(character sins)필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삶의 피로(weariness)로 부터 구출될 수 있는가에 관심이 없다. “의”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문제를 바라본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하나, 즉 우리의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라는 것(our affinity and kinship to God)에 관심이 있고, 하나님과의 적절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심에 관심이 있다. 의는 하나님에 의해 고안된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을 사물들의 중심에 두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그분을 향한 우리의 자세에서 부터 출발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채움을 박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정확히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주의와 악한 욕망들의 무게 아래로 머리가 숙여짐을 느끼면서, 또한 우리는 구원을 열망한다. 우리는 실제로 도덕적인 갱생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추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실제적인 혼동의 희생자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께 요청하기위한 바른 동기가 아니다. 나는 예수께서 그와 같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돕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동기에는 매우 강한 이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옳고 진실한 동기는 오직 하나뿐인데 즉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바른 관계 속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배고프고 목말라야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진심으로 외치는 울부짖음과 만족되지 않고는 해소되어질 수 없는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가져와서 우리의 내적인 필요들을 압박하도록 했다. 우리는 그것들이 그분의 말씀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말 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 기독교인과 우리는 막다른 골목(deadlock)에 직면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의 운명(doom)을 주문으로 얽어매고 있는 이러한 혼동의 권세로 부터 해방되는 완전한 구원의 길이 있는가?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우리는 이론들을 꾸며 낼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내적으로 궁지(impasse)에 몰렸다는 것을 확신할 따름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설교들을 듣고 즐기며 그것들에 감탄했지만 집에 가서는 우리가 항상 그래왔던 동일한 이기주의자들로 남아 있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삐그덕거림도 흔들림도 분열도 없었다. 우리는 변화를 아는 일에 실패했다. 우리는 우리가 장님이라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증오하는 만큼 증오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부정직한 만큼 부정직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마치 우리의 두 눈 앞에서 더럽혀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파괴적인 폭풍이 우리 주위의 세계에 다가왔기 때문에 우리는 깨었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을 하려고 왔다.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다른 형태에서 그리고 우리가 일찌기 알았던 것보다 훨씬 큰 강도로,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신 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실제로 우리를 매일 죄짓게 하는 악한 마귀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예수께서는 대답해 주신다. “그래”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만일 당신들이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인 다면, 만일 당신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무한한 사랑에 대한 당신들의 질문의 진실여부를 날카롭게 시험한다면, 그리고 그 진리와 그 사랑을 꼭 잡고 있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만일 당신들이 당신 자신들에 대한 환상을 소중히 하기를 멈춘다면, 그리고 온갖 종류의 넌센스로 당신 자신들을 달래고 진정시키는 일을 그만둔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만일 당신들이 실제로 구원을 원하고 동시에 당신들의 소망이 순간적인 불꽃이나 충격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참된 매일의 의지라면 “그래, 그것은 가능하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만일 당신들이 당신들의 하늘의 아버지(heavenly Father)께서 열린 팔로 성경의 무한한 능력을 당신에게 양도하기를 (release)원하신다는 것을 확고부동하게(firmly and surely) 믿는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들이 죄라고 부르는 그러한 까다롭고 고민스러운 것으로부터 구원받는데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다시 살기를 간절히 열망한다면, “그래, 가능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너와 함께 너의 뒤에 서있다. 그러므로 나는 너가 의기양양하게 승리할 때까지 모든 방법으로 너를 돕기 위하여 준비한다. 그때 나는 너를 실제로 자유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때 너는 나를 완전히 의지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도 믿지 않은 동화적인 구원(a fairy tale deliverence)이 아니라 참되고 실제적이며 충분한 구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