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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수도원의 역사

 

박병진(양정제일교회 담임목사)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150여년을 향해 달려가는 가운데 있다.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외적으로 큰 부흥과 성장을 경험하며 달려왔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가 성장과 부흥을 경험할 때의 한국적 상황은 잘 살아보자는 열정과 새로운 역사 창조라는 슬로건 아래 외형적인 확대 성장을 도모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에서 외쳤던 메시지도 복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며, 기복 신앙이 극성을 이루었다. 가난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대의 상황과 어우러진 기복신앙에 대한 메시지는 더욱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전파되어 천만 기독교인 시대를 열게 되었다.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고, 기술의 발달로 각종 SNS를 비롯한 쌍방향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달려온 지난 과거 속에서 잘못된 부정과 부패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더불어 기복신앙을 통한 폭발적인 성장 안에 감추어졌던 교회의 각종 치부들과 성숙하지 못한 모습들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목회자들을 비롯한 성도들의 탈선과 부패, 정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인한 각종 비리들과 모순들이 마침내는 개독교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교회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조소와 비아냥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오늘의 시대는 이 땅에 뿌려진 원초적인 복음의 씨로 말미암아 성장에 따른 여러 부작용을 극복하며 신앙적 순수성을 회복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한국의 문화와 사회 속에서 원초적인 복음의 씨가 뿌리를 내리며 정착하는 일이 시급하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도덕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래서 각종 비리와 모순, 부패와 거짓된 것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현대 사회 속에 매몰된 신앙의 근본을 회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여기에서 돌이키지 못하면 한국 교회는 외면당하고, 소멸되는 위기 앞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칼 수소 프랑크의 기독교 수도원의 역사는 일독의 가치를 충분히 우리에게 제공한다. 기독교 수도원의 시작부터 시작해서 동방 수도원, 서방 수도원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연대기적으로 기독교 수도원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가운데서 저자는 한결같이 교회사의 각 시대는 항상 새로운 경향을 가지고 수도원의 벽을 넘어 들어왔고, 그 시대에 맞는 수도원이기를 요구했고, 그런 모습을 창출해 내었다고 한다. 이것은 시대에 따른 갱신이 불가피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이는 동시에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소멸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수도회나 수도원이 새롭게 생겨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경우가 있는 것과 같이 이들이 지쳐 병들고 사라져 가는 경우도 역시 있었다고 말한다.

시대 시대마다 생성되고 소멸되어진 수도원의 역사를 통해서 시대의 요구 앞에 수도원이 어떻게 반응함으로 흥망성쇠가 이루어지며, 소멸의 위기에서 어떻게 갱신의 길로 나아가는가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본서를 읽어나갈 때 흥미롭게 읽게 된다.

 

1장 기독교 금욕에서 기독교 수도원으로

 

기독교 수도원의 시작은 기독교 금욕에 숨겨져 있다. 신약 성경은 금욕을 강요하지 않지만, 금욕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수님은 고행, 독신, 극단적 가난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서는 금욕적 삶의 모범을 보였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후기 유대주의 묵시 사상과 헬라의 정신사적인 흐름은 금욕적 성향을 강화시켰고 이런 바탕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철학적인 삶을 살며, 기독교의 금욕이 다른 종교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금욕을 강조했다. 3세기의 조직화된 교회에서는 관상, 금욕, 고행이 소홀했다. 금욕자들은 자신의 신앙과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과 세상의 일부라고 여긴 교회와 단절하고 광야로 갔다. 또 견유학파의 영향과 경제, 사회, 정치적 이유로 광야로 나갔다.

 

2장 동방 수도원의 초기 형태

 

이집트 수도원에서 안토니의 삶은 금욕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적 접촉을 끊은 고립된 생활이 아니라, 느슨한 은둔형태였다. 은둔 지역의 정신적 구심점은 명망과 정신적 영적 권위를 인정받는 경험이 풍부한 수도사였다. 노 수도사의 가르치는 말이 규칙의 역할을 했다. 은둔자들을 묶어주는 끈은 예배와 최소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조달이다. 이런 구심점이 공동체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은둔자들이 모여 사는 수도원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파코미우스다. 이집트에서 공동체적 수도원이 성장 발전했지만 은둔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5세기에 외적의 침입으로 이집트 수도원이 몰락한다. 수많은 망명 수도사들은 이집트 수도원의 생활 형태를 팔레스틴과 시리아, 소아시아로 전한다. 바질리우스는 도시에 세워진 수도원에서 구제와 교육을 강조, 수도원을 참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설교했다. 그가 만든 수도원은 동방 수도원의 전형이, 그가 만든 삶의 양식은 동방교회 수도원의 특징이 되었다.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수도원은 주교 관구에 편입되고, 주교들에게 수도원의 건립 심사와 감시, 감독의 권한을 주면서 도시 수도원들은 교회나 사회 정치와 연관을 갖게 되었다.

 

3장 서방 수도원의 시작

 

서방 교회에서 가정 금욕이나 경건 활동이 수도원적 체제로 정형화된 것은 4세기 후반이다. 방랑 금욕가들은 동방 금욕가들의 생활 형태를 배워왔다. 이들은 한 곳에 머물며 금욕적 생활을 하는 체제를 만든다. 히에로니무스에 의한 전원 수도원을 따라 간 자들과는 반대로, 그를 좇지 못한 자들이 도시 안에서 은둔과 고독을 찾았다. 그 결과 도시 안의 대저택이 수도원으로 바뀌며 도시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베르첼리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성직자 공동체를 형성하고 수도사처럼 살며 성직을 수행했다. 이것은 교회사 처음의 성직자 수도원이다.

이탈리아 수도원의 특징은 로마의 부유한 귀족계급이 수도원을 세우는데 주도했으며, 수도사가 되는 것은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수도사가 되었다. 주교들의 역할로 수도원과 교회가 밀접해졌고, 교회 조직의 일부가 되었다. 은둔사상은 동방 수도원에 비해서 현저히 약했다. “서구의 수도원 규칙은 초기 단계에서는 양적으로 무수히 문서화되었지만, 대부분은 일회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누르시아의 베네딕트가 자신의 수도원인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위해 작성한 베네딕트 규칙은 유일하게 유럽 전역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4장 베네딕트 규칙이 서방 수도원을 점령하다

 

7세기에는 수많은 규범이 있었고, 원장들은 수도원을 위해 내려온 규칙들에서 필요한 부분들로 편집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규칙이 만들어졌기에 혼합 규칙시대라 한다. 야만족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했을 때,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사들 중 일부가 베네딕트 규칙집을 가지고 로마로 피신했다. 이후 유럽에서 베네딕트 규칙이 수도원 규칙으로 퍼지고, 7세기 후반 이후 종교회의들은 베네딕트 규칙을 공식적 수도원 규칙으로 받아들이고, 대표성을 부여했다.

8세기경부터 선교가 중요한 주제가 되면서 선교 수도사들이 일반 대중 속으로 들어가 선교를 했다. 수도원이 마을의 중심이 되고, 문화 활동이 수도원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교육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칼 대제가 다스린 카롤링거 제국 때에는 수도원이 국가 조직의 일부가 되었다. 수도원에 정치, 경제적 이권이 개입되고, 정치권력을 지탱하는 축으로 전락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개혁은 10세기 초 클루니 수도원이 갱신운동을 시작하면서다. 개혁 운동에는 실패하지만 개혁의 당위성을 알리는 영향을 미쳤고, 시토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나 수도원 개혁이 성공하는 토대를 놓았다. 지금까지는 참된 수도원 생활양식이 논쟁의 핵심이었으나 11세기를 넘어가며 단일화된 수도원 생활양식에 개혁운동의 관심이 모아졌다.

 

511,12세기의 새로운 수도원 단체들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베네딕트 규칙은 서구 수도원 전체의 구속력있는 규범이 되었다. 수도원의 시작은 은둔사상이었고 은둔의 삶은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삶을 규정해주는 기본 토대였다. 대형화된 수도원들에서 광야로 돌아감의 모습은 은둔 지역에서 고독과 청빈이 수도사 삶의 갱신의 표징으로 나타났다. 닐루스 로사노는 개혁 활동을 통해 은둔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 수도원 갱신 과정이 시작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광야 금욕의 열정은 시토 수도원 건립으로 시작된다. 몰레슴의 로버트는 베네딕트 규범을 문자 그대로따르고자 1098년에 시토 수도원을 세웠고 클레르보의 버나드에 의해 세계로 확장되었다. 그는 시토 수도원 건립 초기에 가졌던 이상인, 청교도적인 혹독한 엄격함을 회칙에 넣고, 신비적 경건을 통해 균형을 잡도록 했다. 신비적 경건은 예수와 마리아를 뜨겁게 경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욕적-수도사적 사회 분위기는 은둔 운동과 방랑 설교와 전통적인 수도원의 결합인 쁘레몽뜨레 수도원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관상적 금욕의 입장과 금욕적 목회 입장을 가졌다.

11세기 그레고리 개혁은 교회권 전체를 압도했다. 새로운 수도회들은 교회 개혁에 대한 결과였고, 개혁 운동에 가장 앞장섰다. 새 모임 성직자는 제도적으로 조직화 되어 있던 성직자 수도원으로 가지 않고 독립적 성직자 수도원에 들어갔다. 성직자 수도회는 수도원과의 논쟁을 통해서 11세기 말에 성직자 수도회가 수도원의 자리를 차지했다.

 

6장 탁발 수도회

 

1215년의 라테란 회의에서 종교 공동체는 베네딕트 규범이나 어거스틴 규칙 외의 다른 규칙을 못가지게 결정함으로 새로 생기는 공동체는 베네딕트와 어거스틴 수도회 양식을 따르게 함으로 새로운 시도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이노센트 3세는 기존 수도원의 이상인 공동의 삶과 이를 위한 사도적 삶, 복음적 삶을 새로운 생활양식에 접목시키려했다. 여기서 태동한 것이 중세의 탁발수도회였다. 구츠만의 도미니크가 세운 설교 형제단은 어거스틴 규칙을 채택하며 교황의 승인을 얻었고, 이단들을 교화시키려고 했던 설교가 교황의 위탁으로 전체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가난에 가치를 부여했고, 가난했던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 또 다른 탁발 수도회는 아씨시의 프란시스가 세운 소형제단이다. 그들은 복음대로 사는 것 즉, 말씀과 행위를 통한 가난의 실천, 형제들끼리의 공동생활, 참회의 설교가 특징이다.

도미니크회, 프란시스회, 깔멜회, 어거스틴 은둔수도회가 당시를 이끈 주도적 세력이었다.

13세기 수도원은 부차적 목적에 관심을 기울여 가난한 자들과 일반 병자들에게 깊이 개입하였고, 이미 존재하던 구빈원들을 지도-지원하거나, 새로운 구빈원을 설립하고, 다리를 놓거나 모슬렘의 포로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구하는 등 시대-사회 문제를 과제로 삼았다.

 

7장 중세 후기의 수도원

 

14-15세기에 불었던 국가주의는 대형 수도원들이 가진 국제성을 공격하여 수도원들이 국가의 경계 안에 머물게 했다.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는 수도원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프랑스에서는 백년 전쟁이 수도원을 황폐화시켰다. 대형 수도원들이 성직록으로 간주되어 수도회와는 관계없는 자들에게 넘겨짐으로 정신적 관심사보다는 개인적 관심에 따라 수도원 재산을 사용하여 수도원을 빈한하게 했고 쇠락하게 했다. 이때 갱신을 위한 움직임이 모든 대형 수도원에서 일어난 계율 준수 운동이다. 개혁 운동은 수도사와 수녀의 독신 격리, 무소유에 강조점을 두었다. 15세기의 탁발 수도회 수도사들은 비판과 멸시, 풍자의 대상이었다. 지나치게 부유한 수도원, 정규 사제의 목회 활동을 방해할 정도로 탁발 수도사들이 지나치게 바쁜 모습에 위클리프가 반기를 들자 동조자들이 생겨났다.

 

8장 종교개혁과 역종교개혁에서의 수도원

 

종교 개혁가들이 수도원에 반대한 것은 수도원 제도 개혁이 아니라 수도사 신분을 없애려 했다. 수많은 수도사와 수도원들이 사라진 원인은 교황권에 저항하던 지방 영주들의 정책 때문이었다. 이때 생겨난 수도회 공동체는 목회나 사회봉사에 적극적이었다. 대표적으로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설립한 예수 공동체(예수회)이다. 예수회의 목적은 십자가의 군기 하에 하나님을 위해 싸우며, 주님 한 분에게만, 그리고 지상에서 그의 대리자인 교황에게 봉사하는 것이었다. 예수회는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간 지역에서 사람들을 재 가톨릭화 하는데 힘썼다.

이 시대에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난 수도원의 특징은 수도원 제도 자체에 대한 급진적 전투 구호들, 수도사의 삶의 모습에 대한 폭력적인 억압, 스스로 하거나 또는 자신들이 잘못함으로 인한 수도원의 해체, 그리고 물질적 도덕적으로 그저 그런 수준으로 떨어져있는 수도원들과 함께 용감하게 개혁의 새로운 싹을 틔워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수도원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 때에 수도회는 면책 특권, 즉 주교의 감독을 받지 않고 교황에게 직접 책임을 지는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회 수도사들은 주교들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되어 있었다.

9장 혁명과 왕정복고 시대의 수도원

 

17,18세기에 프랑스에서는 얀센주의 논쟁으로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이 돌출했다. 예수회 수도사들이 교황제를 방어하는데 가장 열심이었다. 1759년에 이미 예수회는 포르투갈과 그의 식민지에서 추방당했다. 프랑스, 나폴리, 스페인, 파르마는 1760년대에 자국 내에서 예수회를 금지했다. 정치적, 교회 내적 압력 때문에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1773년 결국 예수회를 해산했다. 예수회의 해체는 수도원의 해체가 일반화되는 과정의 시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9세기 전반에 새로운 수도회와 수도 단체들이 생기며 사회 활동의 가능성을 찾고 있을 때, 옛날의 고전적 수도원들 역시 새로운 활력을 찾아갔다. 수도원을 폐쇄하고 수도사들을 추방하던 유럽 국가들의 적대적인 흐름과 수도원을 새로 건립하는데 어려움이 있던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세기는 가톨릭 수도회들이 성장했던 시기였다. 당시 수도사들이 미국으로 가서 노력의 결과로 북아메리카 교회 안에도 수도원과 수도회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10장 근세와 현대의 수도원 제도

 

1950년대를 넘으며 수도원과 수도회는 특별한 문제없이 가톨릭 교회의 한 기관으로 이해되었고, 교황청은 수도회의 최고 기관의 역할을 했다.

프로테스탄트 수도원은 프랑스의 떼제에 로제가 세운 떼제 수도원이 있다. 떼제 공동체는 관상적 수도 공동체로서 하루 일과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기도, 예배, 관상이다. 떼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수도원적 삶의 형태가 재발견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19세기의 베네딕트 수도사들과 시토 수도사들은 피 선교 국가들에서 토착적인 수도원을 활성화시키는 노력을 함으로써 조력자의 입장에서 하는 단순한 형태의 선교를 시도했다.

 

11장 동방 정교회의 수도원 개략

 

파코미우스는 동방 수도원이 수도원적 삶의 모습으로 갖추게 했다. 바질리우스는 수도원의 위대한 조력자이자 조직가요 규칙 제정가이다. 그가 쓴 수도 규칙은 수도적 삶의 지침이 되었다. 칼케톤 회의에서 수도원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했다. 수도원을 주교의 감독하에 둔다는 것과 몇 가지 생활과 관계된 것을 정했다. 황제 유스티니안 1세는 칙령을 통해서 수도원에 관한 내용을 법제화했다.

동방 수도원은 하나의 단일화된 조직을 가진 수도회나 수도회 연합은 없었다. 동방 수도원에서는 성상 숭배를 옹호하던 수도사들은 처벌을 받았고 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황제가 수도원에 특권을 주고, 증여가 이루어짐으로 상당한 양의 재산과 부가 축적되었다. 점차 수도원 정신을 잃고, 사회에서는 수도원을 매력적인 경제 대상으로 봄으로, 수도원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수도원의 성직록을 받음으로 수많은 그리스 수도원들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비잔틴 제국의 보호와 돌봄 속에 제국의 권력이 확장되며 수도원 역시 확장되었다. 그토록 번성했던 러시아 수도원은 1917년에 발발한 혁명으로 화려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 공산주의 정권에서의 수도원은 엄격한 국가의 통제와 강제적 조치를 따라야 했다.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수도원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본서는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기독교 수도원의 역사를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도원과 교회와의 관계, 시대적인 배경이나 상황, 수도원 운동의 중심 인물에 대한 조명, 교황의 정책 등 궁금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수도원의 역사를 담담히 기술할 뿐이다. 때로는 수도원이나 수도원을 설립한 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나 평가가 궁금할 수 도 있지만 철저히 저자는 역사적 사실에만 충실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서에 정리한 수도원만 하더라도 아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도원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해 준 저자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각 시대마다 주류로 부상했던 수도원 운동에 대한 성과와 실패를 간략하게 다룬다. 곧 시대의 요청에 따라 수도원이 어떻게 반응 했는지와 수도원 운동이 왜 실패했는지를 알려준다. 이 부분을 통해서 한국 교회를 조명해 보고, 교훈을 삼을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책의 대부분이 서방 수도원에 집중하였다는 점이다. 서방 수도원에 대해서는 잘 정리하였지만 동방 수도원에 대한 역사는 상대적으로 너무 빈약하다. 1장의 기독교 금욕에서 기독교 수도원으로, 2장의 동방 수도원의 초기 형태, 그리고 11장의 동방 정교회의 수도원 개략에서 동방 수도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1,2장은 서방 수도원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때, 동방 수도원에 대한 내용은 11장에 한정된 아쉬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집트 수도원에서 출발한 동방 수도원이 어떤 발전과 소멸을 겪으면서 여기에 이르렀는지를 안다면 서방 수도원과 더불어 균형잡힌 수도원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수도원 운동의 역사를 통해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될 부분에 대한 도움을 얻는다. 물론 기독교 수도원 운동에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의 영성적 목표와 이를 이루기 위한 실천 방법을 한국 교회는 재조명해야 한다.

 

수도원 운동의 최고선은 세상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써 성취되는 하나님에 대한 명상과 사랑 안에서의 영적 완전이다. 그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영혼으로 하여금 습관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함으로 영원한 것에 부유하도록 평생 훈련해 나가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의 윤리적 덕목은 신앙과 세속이라는 이원적 사고의 틀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 바로 가난과 금욕 그리고 순종과 봉사이다. 오늘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각 개인이 수도원 운동의 정신을 본받아 구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며, 가난과 금욕, 순종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데 헌신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수도원 갱신 운동처럼, 끝없이 자기 개혁, 교회 개혁을 단행하고, 본질로 회귀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시대의 요구 사항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세상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때, 한국 교회는 소망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