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재세례파 운동의 주요 인물들
이렇게 시작된 재세례파는 중세교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보아 그 의미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역사의 비연속성(discontinuity)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개혁의 목표는 초대교회, 특히 313년 이전의 기독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는 초대교회에로의 복귀(Restitution)였던 것이다. 
   재세례파 운동의 초기 지도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쯔, 게오르게 불라우록, 휘브마이어 등이었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18-1526)
스위스 형제단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그가 재세례교도로 사역한 기간은 겨우 1년 8개월 정도였지만 그의 기여와 역할은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그레벨은 그로닝겐(Grüningen)의 행정담당관으로 있다가 후에 쯔리히 시의회 의원이 되었던 야콥 그레벨의 아들로 1498년에 태어났다. 그는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에서 6년간 기초 교육을 받고, 1514년 바젤 대학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글라리안(Glarean)이라고 알려진 인문주의자인 하인리히 로리티(Heinrich Loriti)에게 교육을 받고 그 후 4년간은 비엔나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또 파리대학(1518년 9월말 - 1520년 6월)과 바젤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쯔빙글리를 만남으로써 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방황하던 인문주의자가 복음의 열정에 심취하게 되었고, 쯔빙글리 지도하에서 헬라 고전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레벨은 1522년 7월 이전에 천주교로부터 개종하였고, 이 회심을 통하여 그에게 내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레벨은 개혁의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연약한 한 젊은 인문주의자는 이 회심을 통하여 열정적인 성경학도가 되었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523년부터 교회개혁에 있어서 쯔빙글리와 견해를 달리 하였고, 1524년에는 불화가 생겼음이 분명하다. 쯔빙글리는 성상이나 미사의 폐기를 시의회와 절충하려 했으나 그레벨은 관헌들이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국가관, 교회관 등에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났다. 그레벨과 그의 동료들은 중생한 신자들로 구성되는 참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유아세례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레벨을 중심으로 소위 ‘스위스 형제단’이라고 알려진 모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레벨은 1525년 1월 유아 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면 이를 반대하고 믿는 자의 세례를 주장하여 재세례를 행했다. 그는 만쯔와 블라우록과 더불어 재세례파 개혁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반면 쯔빙글리는 그레벨의 주장을 반박하고 유아세례와 계약신학을 옹호하는 4편의 글을 썼다. 그 대표적인 소책자가 「세례, 재세례와 유아세례에 관하여」(Concerning Baptism, Rebaptism, and Infant Baptism)와 「재세례파의 간교함에 대한 논박」(A Refutation of the Tricks of the Katabaptizers)이다. 그레벨은 쯔빙글리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그 후 수없이 많은 투옥과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재세례를 베풀었고 성례를 집행하였다. 1525년 4월부터 6월 사이에는 투옥을 피하여 은거하던 그레벨은 그로닝겐으로 옮겨가서 사역하던 중 10월 8일 체포되었고, 3주일 후에 체포된 펠릭스 만쯔와 더불어 1525년 11월 18일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구속된 지 5개월 후에 감옥에서 쓴 원고를 출판토록 요청한 것이 화근이 되어 1526년 3월 5,6일 제 2차 재판을 받고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로부터 14일 후 어떤 사람의 호의로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탈옥했으나 건강이 좋지 못한 그는 1526년 여름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로 사망하였다. 그는 여러 편의 편지들과 설교들, 그리고 또 한편의 소품(pamphlet)을 남겨두었다.

펠릭스 만쯔(Felix Manz, 1498-1527)
만쯔는 그레벨과 더불어 초기 재세례파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서 신교도에 의해 순교당한 최초의 재세례교도였다. 쯔빙글리는 만약 그레벨이 재세례교도들의 코리피어스(헬라의 합창극에서 주창자를 의미한다)라고 한다면 만쯔는 아폴로(Apolo)이고, 블라우록은 헤라클레스(Hercules)라고 하였다.1)
   1498년경 취리히에서 출생한 만쯔는 에라스무스, 레오 쥬드(Leo Zud) 그리고 하인리히 불링거(H. Bullinger)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사제의 사생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특권 계층의 자녀들에게 부여된 교육적인 혜택을 받았고 그 결과 그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에 능통하였다. 1522년경에는 쯔빙글 리가 주도하는 신약 연구 모임에 참여하였고 로마교로부터 개종하였다. 1524년 10월 논쟁 이후 쯔빙글리의 개혁 프로그램에 불만을 갖게 된 그는 그레벨과 블라우록과 함께 재세례파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웅변에 있어서는 그레벨을 능가하였는데 그로닝겐, 추리히, 쫄리콘(Zollicon) 등지에서 유아세례를 비난하고 재세례를 베풀다가 투옥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질서와 관습에 반대하고 재세례교 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1527년 1월 5일 토요일 익사 당하였다. 그리고 그의 재산은 시의회에 의해 몰수되었다.
   만쯔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간증문과 18편의 찬송시를 남겨 놓았다. 또 익사 당하기 2년 전 추리히 법정에 제출한 문서인 「항의와 변호」(Protestation und Schutzschrift)가 남아 있다. 이 글은 재세례교도들의 주장을 변호한 글이었다.


게오르게 블라우록(George Blaurock, 1491-1529)
블라우록은 그레벨이 병사하고 만쯔가 순교 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약 2년 반 동안 재세례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이 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1491년 보나두츠(Bonaduz)에서 태어나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로마 가톨릭교의 사제로서 1516년에서 1518년간에는 추르(Chur) 교구에서 트린스(Trins)의 대리신부(Vicar)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1524년 취리히에 돌아올 때 그는 이미 결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쯔빙글리와 많은 토론을 가졌고 교회개혁에 대한 열정을 보여 주었지만 쯔빙글리의 개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쯔빙글리에게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쯔빙글리보다 더 철저한 개혁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스위스 형제단을 찾아갔고 그 일원이 되어 1525년 1월 그레벨에게 재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 형제단에서 “제2의 바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만큼 대단한 활동가였다.2) 1525년 2월 7일 블라우록은 만쯔와 재세례를 받은 24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어 취리히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감금되기도 했고, 만쯔가 1527년 1월 사형을 당하기까지 함께 일하였다. 만쯔가 사형 당하는 날 블라우록은 태장을 맞고 취리히에서 추방되어 베른(Bern)으로 갔고, 여기서도 추방되어 다시 비엘(Biel), 그리손스(Grisons), 아펜첼(Appenzel)등에서 사역하다가 체포되어 4월 21일에 또 다시 추방되었다.
   그는 다시 티롤(Tyrol)로 가서 목회하는 동안 많은 지지자를 얻기도 했으나 1529년 8월 14일 인스브루크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때로부터 3주일 후인 9월 6일 화형을 당했다. 죄목은 교황이 내려주신 사제직을 버리고 새로운 세례를 설교하고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의식을 거부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옥중서신의 형식으로 된 한 편의 설교와 두 편의 찬송가사 그리고 간략한 권고문을 남기고 있다. 
   펠릭스 만쯔가 참수 당하고 게오르게 블라우록이 추방되고 콘라드 그레벨이 병사핮 스위스 형제단은 지도자를 상실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이 시작된지 불과 2년이 못되어 지도자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 셈이다. 이렇게 되자 재세례파 운동은 쯔리히에서 인접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재세례 교도들은 남부 독일, 모라비아, 폴란드, 독일 북부, 그리고 화란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이들은 계속하여 탄압과 순교를 당하였으므로 이들은 “순교의 순례자들”(Martyr's Pilgrims)로 불리기도 했다.


발타사르 휘브마이어(Balthasar Hübmaier, 1480?-1528)
휘브마이어는 훈련된 신학자로서 재세례파 운동의 뛰어난 이론가요 지도자였다. 1480년경 남부독일 아우구스버그에 가까운 프라이베크(Friedberg)에서 출생한 그는 프라이브르크 대학에서 수학하여 성경학 학사(Baccalaureus Biblicus) 학위를 받았고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엑크(John Eck)의 제자가 되었다. 엑크가 프라이브르크를 떠나 잉골슈탓트 대학으로 가자 그도 그곳으로 따라 갔고, 1512년 9월 29일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미 신부이기도 했던 휘브마이어는 대학교회인 비르긴(Virgin)교회의 설교자요 교목으로 임명되었고 3년 후인 1515년에는 대학의 부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1516년 1월 25일 일골슈탓트대학을 떠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발트슈트(Waldshut) 등에서 교구 신부로 봉사하였다. 그러던 중 1522년부터 바울서신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바젤을 비롯하여 스위스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개혁운동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복음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의 개종에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작품으로 받은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는 쯔빙글리의 개혁에 만족하지 못했고 특히 유아세례는 수용할 수 없는 국가교회적 제도로 보았다.
   1523년 5월 그는 쯔리히에서 쯔빙글리와 유아세례 문제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때만 해도 쯔빙글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523년 10월에는 취리히에서의 성상과 미사 문제에 관한 토론에 참가하였고 성경적 월리로 돌아가려는 교회개혁 원리를 자신의 신앙으로 확립하였다. 10월 논쟁 후 발트슈트로 돌아온 그는 개혁을 위한 토론을 위해 1524년 봄 ‘18개 조항’(Achtzehn Schlussreden)을 작성했는데 이 문서는 그의 최초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도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Ferdinant Ⅰ)의 탄압의 손길이 뻗쳐 오자 은거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여러 편의 논문을 썼는데 그 중에 1525년에 쓴 「이단자들과 그들을 화형한 자들에 대하여」(Von Ketzern und ihren Verbrennern) 라는 글은 재세례파 운동의 중요한 이념인 자유의 개념과 통치자의 권력의 한계 등을 언급한 가치 있는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휘브마이어는 하나님만이 누가 이단자인지를 판단할 수 있고, 하나님은 세속 권력자에게 이단이건 아니건 간에 어떤 이를 화형 시킬 권리를 부여하신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적어도 그는 1525년 1월 이전에 유아세례는 실제성이 없는 헛된 것이라는 확신에 도달하였다. 루이스 W. 스피츠는 휘브마이어가 1525년 1월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아세례를 폐지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신자들을 경악하게 했다.”고 쓰고 있다.3) 1525년 7월에는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 세례」(Vom christlichen Tauf der Glaubigen)라는 책을 썼는데 이 글은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성인 세례의 정당성을 변호한 재세례파의 고전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해 11월에 쯔빙글리가 「세레에 대한 휘브마이어의 저서에 대한 참되고 철저한 응답」이라는 반박서를 출판하고 양자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을 보면 휘브마이어의 저서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탄압과 투옥 가운데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던 그는 취리히를 떠나 모라비아 지방의 니콜스브르크(Nikolsburg)로 갔고 이곳에서 1년간 사역하는 동안 약 6,000명에게 재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4)
   그는 설교와 저술을 통해 크게 활동하였는데 그는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정부만이 무력을 행사할 권위를 가졌으나 영적인 문제는 교회의 고유한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배격하고 무저항 원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이 반영된 저서가 「무력에 관하여」(Von dem Schwert, 1527)이다. 그는 또 재산의 공유를 반대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궁핍한 자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하였다. 즉 그는 무저항원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쯔 등 스위스 형제단과 다르며 재산의 공유(Community of goods)나 무정부주의 원리를 배격한 점에서 훗트(Hans Hut)나 비데만(Jacob Wiedenann)과도 다르다.
   합스부르가에서는 지금까지 평화롭기만 하던 자기들의 영토 내에서 종교적 혼란을 방치해 둘 수 없어서 1527년 휘브마이어를 체포하였다.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후퇴하여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1528년 3월 10일 비엔나 교회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다뉴브강에서 익사 당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여성들에 대한 처형방법이었다. 그의 저서에는 금서 조치가 취해졌다.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 운동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교회개혁 의지와 신앙적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스부르그에서의 일어난 재세례파 운동은 휘브마이어의 사역의 결과였다.




1) W. Estep, The Anbaptist Story, 30.
2) G. Williams, The Radical Reformation, 121.
3) 루이스 스피츠, 173.
4) W. Estep,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