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이런 방식으로 성례가 하나님에 의해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례에 우리의 신뢰를 직접 두어서는 아니 된다. 성례는 수단이므로 단지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수단으로 사용하실 때에만 가치를 지니게 된다. 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보실 때 편리한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시되 모든 것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도록 하시는데 이는 그가 모든 것의 주인이며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소용을 위해서 주어진 다른 어떤 피조물들에 우리의 신뢰를 둘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신뢰가 성례에 머물러서도 아니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성례에 돌려져서도 아니 된다.” 다른 모든 것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성례의 사용에 있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더욱이 성례는 그 자체로서 은혜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성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칼빈은 만약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죄라는 장애물을 세우지 않는다면, 새로운 율법의 성례(지금 기독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가 은혜를 정당화하고 제공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한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을 제외한 채 의를 약속하는 것과 유사한 어떤 견해도 "영혼들을 낚아채어 멸망으로 이끄는 것이다." 어거스틴을 거듭 인용하면서 칼빈은 "가시적 표식 없이 불가시적 성화가 있을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참된 성화 없이 가시적 표식도 있을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칼빈의 사고에 있어서 성례와 성례에 사용되는 요체(matter)에 대한 어거스틴적 구분은 아주 중요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구분은 상징과 진리가 성례에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뜻할 뿐 아니라, 양자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서로 밀착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양자 그 자체는 결합되어 있지만 요체는 표징으로부터 항상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 중 어느 하나에 속한 것을 다른 것으로 전이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성례가 그 나타내고자 하는 바 효력을 발생한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인용한다.

 

그러나 성례의 요체 또는 실체란 무엇인가? 칼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례의 그 요체 또는 (당신이 선호한다면) 그 실체(substance)에 해당되신다. 그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함을 지니게 되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어떤 약속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성례가 어떻게 효력을 발생하게 되는가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성례들을 통하여 때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이 우리 속에 더 증진되고 확증되고 증가되는 도움을 얻는 만큼, 때로는 그리스도를 더욱 충만히 소유하며 그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만큼, 성례가 효과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성례에 베풀어져 있는 것을 참된 믿음으로 받을 때에 그런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성례를 받은 악한 자들이 이를 헛되게 만들고 무효화시킨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응답으로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가 주장한 바를 마치 성례의 효능과 진리가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나 또는 그 사람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변화가 심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바는 견고하게 서 있고 그 본질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베풀어 주신 것과 그것을 받는 것은 별개의 것이므로, 주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제정된 상징의 실제적인 본질은 변함이 없고 그 자체의 능력을 상실하지도 않는다. 다만 악인 또는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이것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다음의 짧은 문장으로 잘 해결해준다: "혹시 여러분이 육신적으로 받는다 해도, 그것은 신령한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그렇게 신령한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번역: 이신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