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과 오늘 우리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이하는 2017년을 겨냥하여 2년으로 계획되었던 연재 글을 여기서 마무리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 조금 애석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필자에겐 숨겨진 ‘뒷이야기’의 소재 부족에 대한 큰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어서 좋은 일이다. 이 글은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개혁의 ‘뒷이야기’ 보다는 오히려 잘 알려진 종교개혁의 ‘앞이야기’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종교개혁으로 번역되는 ‘리포메이션’(Reformation)은 때론 ‘교회개혁’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종교개혁’ 대신에 ‘교회개혁’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는 ‘종교’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의 여지 때문이다. 즉 오늘날 ‘종교’라는 단어는 세상의 모든 종교를 의미하고, 따라서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할 경우, 마치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당시 개혁운동에 동참한 것처럼 오해할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 ‘교회개혁’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또한 ‘개혁’이라는 단어 대신에 ‘갱정’(更正)이라는 용어가 한국교회 초기에는 자주 사용되기도 했다. 아무튼 ‘교회개혁’이라는 용어가 16세기 종교개혁을 오직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사건으로 명확하게 제시하는 장점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교회개혁’이라는 용어가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칫 다른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이 오직 교회 문제만 다룬 개혁운동으로 축소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16세기에는 기독교가 유럽사회의 국교였고 모든 국민이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종교개혁은 그야말로 사회 전체의 개혁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16세기 이후 사회와 교회가 분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교회개혁의 의미로 축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종교’라는 단어는 유럽역사에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계몽주의시대 이전까지 기독교를 의미하는 용어로만 사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빈도 자신의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라는 책 제목에서 그 단어를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다. ‘종교’(religio)라는 단어는 <기독교강요>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칼빈의 다른 저술에서도 ‘종교’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대부분 기독교의 ‘신앙’ 혹은 ‘경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단순히 개인의 신앙적 교리와 윤리만을 바르게 정립하도록 외친 개혁운동으로만 규정하기 어렵다. 종교개혁자들이 당시 교회의 윤리적 타락상을 지적한 것도 사실이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정립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종교개혁은 그와 같은 개인적 차원의 개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차원의 개혁이었다. 또한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제도나 교리만의 개혁을 의미하는 교회 내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과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사회 전체적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의미의 종교개혁이 불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종교’라는 용어의 주된 의미도 16세기의 그것과 다르고, 또한 기독교신앙이 더 이상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정신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더욱 한국역사에서는 기독교가 단 한 번도 국교의 역할을 해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한국교회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고, 최우선적인 개혁의 대상이다. 세속 사회가 교회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성향은 로마제국에서부터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사회적 지탄을 받는 원인과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원인은 달라도 너무 달라 비교 불가능하다.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너무 먼 로마제국의 교회 상황과 비교하기 보다는 한국의 초대교회 모습과 비교해도 작금의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원리적 가르침에서 너무 멀리 간 것이 아닌가 싶다. 지상교회 가운데 온전히 거룩한 교회를 찾을 수는 없지만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을 ‘정상적인 상태’로 간주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오해는 없다. 교회는 어디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 역사에서 부패한 교회의 대명사와 같은 중세교회와 비교될 정도로 흉측한 모습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중세교회보다 더 심각한 악취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부패현상의 발생지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일수록 더욱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의 모토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이기 때문이다. 즉 구호로는 최상의 개혁 주창자인데 실제로는 선두적인 개혁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부정과 부패를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관행이라는 이유로, 혹은 ‘좋은 게 좋다’라는 이유로 저질러대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교회의 권력이 숨 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어김없이 이런 부정부패가 도사리고 있다. 예컨대 개교회의 직분자 선출, 노회 임원 선출, 총회 총대 및 임원 선출, 힘 있는 총회 이사회 이사 및 이사장 선출, 각종 기관장 선출 등의 자리가 그렇다.

예컨대 총회장 선출을 생각해보자. 언제부턴가 고신교회도 총회장을 선출하는데 막대한 선거비용이 들이는 관행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초창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초창기에는 서로 총회장을 하지 않기 위해 역정을 내었다는 것이다. 요즘 세태와 얼마나 다른가? 서구 개혁주의교회 역사에서 총회장이 되기 위해 선거비용이 들었다는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 고신교회는 총회장이 되기 위해 어마무시한 선거비용이 든단다.

지난 “기독교보사장선출사건” 이후로 그 비용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한 때는 억대였다고 들었다. 세상 정치를 위해 즉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의 선출을 위해 선거비용과 선거공약이 필수적이라고 교회 정치를 위해서도 그런 선거비용과 선거공약이 필수적인가? 그것도 1년만 하고 그만 둘 직책을 위해서! 임직 1년을 위한 선거공약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낭비다. 그렇다면 1년을 위한 선거비용은 사실상 악이다. 성경 어디에서 교회직분을 위한 선거비용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장구한 교회역사에서 선거비용이 절실히 필요했던 시기는 중세 말기에 교황선출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중세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천주교회의 역사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은 천주교의 교황선출이 개신교 어느 교단의 총회장 선출보다 훨씬 정당하고 깨끗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런 이유 없이 ‘촌지’를 받는 것을 사회에서는 ‘범죄’로 규정한다. 그래서 선거를 정당하게 치러져야 할 것을 공시하고, 일정 액수의 선거비용을 허용하되 돈봉투를 돌리거나 식사를 접대하는 등의 비용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한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깨끗해야할 교회정치가 세상정치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후보자들의 식사대접과 여비명복의 돈봉투가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횡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은 하루 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이것은 공명정대해야 할 선거를 혼탁하게 만드는 부당거래가 틀림없다.

우리 고신이 만일 종교개혁자들의 후예가 맞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우리가 깨달은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에 용감하게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고신교회는 설립자 한상동 목사의 회고에서 알 수 있듯이 “돈 없이, 인물 없이, 건물 없이”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돈도 있고 인물도 있고 건물도 있다. 아니 많다. 그래서 고려신학대학원과 고신대학교, 그리고 대학병원은 고신의 부유한 자랑거리다. 그런데 혹 이런 부유함의 자랑거리가 우리 고신교단의 정신을 훼손하는 흉측한 괴물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신앙의 원리에 따라 냉정하고 정당하게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신 정신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최근 TV에서 순교자요 애국지사이신 주기철 목사 일대기를 다룬 다큐가 방영되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내 자신과 우리 고신 교단이 한 없이 부끄러웠다. 주기철 목사가 지금 우이 시대에 목회를 하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분명 개혁가의 모습일 것이다. 신민에게는 충절의 의가 요구되고, 부부에게는 정절의 의가 요구되는 것처럼, 신앙인에게는 주님을 향한 순결의 의가 요구된다는 신념, 이것이 그의 순교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순교 정신은 종교개혁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종교개혁자들도 단지 자신들이 깨달은 정당한 성경 내용을 주장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여기기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실천한 행동가들이었다. 행동 없는 신앙이 죽은 것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실천 없는 개혁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일 뿐이다.

*이 글은 <생명나무> 2016년 2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