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2017년은 종교개혁500주년이 되는 해다. 종교개혁에 빚진 것이 많은 국가와 도시는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다. 하지만 머나먼 유럽에서, 그것도 500년 전에 일어난 타국의 역사적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의 신앙적 정체성이 개신교에서 기원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개신교 신자’라고 불린다면 500년 전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 유의미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재인식되어야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종교개혁자들이 있다. 당시 재세례파와 개혁의 의지를 가진 로마교도들은 20세기 전까지 종교개혁자로 분류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들이 주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빌미로 재세례파 역사가들을 비롯한 몇몇 역사가들은 16세기 종교개혁을 ‘불완전한 개혁’이나 ‘실패한 개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16세기 종교개혁이 단순히 특정 지역만의 사건이라든가, 특정 계층이나 단체만의 사건 정도가 아닌, 온 유럽 사회 전체의 사건, 즉 세계사적 사건이라는 반증이다.

종교개혁은 당시 인문주의운동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배우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개혁과 인문주의가 한 배를 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라는 알을 깨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때,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부화를 거부하고 로마가톨릭과 함께 남아 있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부화 사건, 즉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16세기 역사 전환기적 사건이 그 둘 사이를 확실하게 갈라놓았다. 인문주의자들은 당대의 타락상과 부조리들을 글로 풍자하고 비난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그것들을 개혁하기 위해 그들의 인생 전부를 걸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개신교의 뿌리다. 종교개혁을 모르고서는 개신교 신앙의 정체성을 알기 어렵다. 종교개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정의의 정신으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 나아가 기독교 사회와 국가 전체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건 운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때론 자신을 말씀 앞에 바로 세우는 일조차 버거워한다. 그래서 전체 교회를 개혁하거나 기독교 사회가 아닌 종교다원적인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성경을 통해 스스로 반성하고 개혁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말씀의 거울에 나타난 자신의 더러워진 얼굴을 보고도 씻지 않는다면 거울은 그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개혁의 첫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말씀의 거울 앞에 부지런히 세울 때 하나님의 개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자신을 말씀에 맡길 때 말씀은 놀라운 능력으로 개혁을 이루어 간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을 통한 인간의 일이 아니라,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일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개혁을 위해 잘 준비된 도구들이었다.

종교개혁의 가장 귀한 유산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를 귀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말씀의 권위와 능력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에 인간의 공로와 자랑만 남았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성공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에는 열광한다. 분명 성경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는데, 타락한 교회는 중세뿐만 아니라 언제나 세상적인 성공과 인간의 영광만을 원한다. 오늘 우리 교회는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가? 우리 신앙의 정체성과 현주소를 알기 위해서라도 종교개혁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배우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