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신앙과 그 어려움들 (Faith and its difficulties) 

 

 

   어떤 사람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분께 복종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모든 어려움들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인간이 그러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신앙의 어려움들은 그에게 정면으로 부딪혀오기 시작하며, 종종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대부분 이러한 어려움들은 바른 길로부터 주기적으로 이탈함으로써 일어나게 된다. 종종 인간은 다시 바른 빛 가운데서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며 잘못된 사색과 사변에 혼합되고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의 수수께끼는 우리 모두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압박한다.

 

   첫째로 우리의 내적인 삶이 여전히 반위들로 가득차 있다는 괴로운 경험과 그 힘이 그런 이유에서 우리의 내적인 삶 전체, 심지어 우리의 모든 신성한 행동들까지도 통재하는 그 괴로운 경험이 있다. 매순간 마다 나는 내 자신의 존재의 함정(pitfalls)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기도한다.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 나의 마음을 실로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복종으로 가득차게 된다. 나는 나의 기도가 마음의 문제라고 느낀다. 내가 기도하는 말들은 자발적으로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강한 긴급성을 가진채 나온다. 내가 기도를 끝마치고 일어서자, 섬광처럼 “나는 그것을(기도) 매우 훌륭히 해냈어” 라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꿰뚫고 지나간다.

 

   그것은 나를 괴롭히고 압박해온다. 나는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안다. 오직 그 분을 통해서 만이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저 은혜를 사물화할 때(And when I appropriate that grace of God), 또한 그것이 내 자신의 선함과 경건에 기인한 것처럼 행동할 때 저것은 모든 신앙의 경험들을 가장 무섭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한 친구, 그리스도인인 친구가 인간의 기준으로 측정했을 때 우리가 매우 심각한 범죄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죄에 빠졌었다. 이 이야기를 속삭이듯이 내가 함께 저녁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 그룹에 말하게 된 그 순간, 나는 기쁨의 즉각적인 불꽃이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낀다.

 

   아! 그도 역시 인간이구나! 그리고 나는 마치 내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들과 죄들을 가진 내 자신의 무한한 결점들(shortcomings)을 정당화하려고 하며 그리고 나는 그것들 속에서 몇몇 종류의 지지를 발견한다. 비밀스럽고 깊이 나의 마음속에 나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죄로 내 자신을 꾸미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느낌들에 지배를 받으며 내속에 그렇게 실제적이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비와 동경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의 삶에 절망하도록 만든다.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고백해 왔다. 나는 내가 죄 속에 잉태되었고 태어났다는 것, 그래서 자연히 내가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은혜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다고 배워왔다.

 

   내가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목사님과 인간의 길 잃어버린 비참한 상태에 관해 설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동의한다. 목사가 분명하고 명백한 방법으로 인간이 길을 잃었으며 그 자신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할 때 그때 나는 즉각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내 성격 속에 있는 결점에 대해 나의 주의를 환기시켜 줄때 그리고 내가 행한 몇몇의 잘못에 관해 나를 훈계할 때 나는 화를 내게 되고 쉽사리 흥분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그것은 내 스스로가 의식하고 있는 보다 큰 결점이나 잘못들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나를 화나게 만든다. 이것이 나를 압박하고 나로 하여금 죄에 대한 나의 모든 경건한 말이 단지 허식(show)이나 위선에 불과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며 나의 마음이 실로 결코 그것 안에 있지 않았으며 그것의 일부도 아니었다고 느끼게 만든다.

 

   나는 내가 원거리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한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이 토론의 문제인 한 그러나 그것이 접근되어오고 구체화되고, 나의 관심이 나에게 있는 분명한 잘못 혹은 죄로 불려질 때 나는 그것은 상대하지 않으려함이 틀림없고 그것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한 때 나의 내적인 삶에 영광스러운 영적 환희(jubilation)를 경험했다. 나의 명상에서 그리고 많은 힘든 환경들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매우 가까이 계셨고,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리고 나를 통해 주실 수 있고 기꺼이 주시려 한 그 무엇을, 보다 훨씬 전에 깨달았다. 전에 그럴 때가 몇 번 있었으나 그때 이후로 나는 다시 일상의 삶을 침체의 구렁텅이로 빠트려 버렸다.

 

   내가 깊이 느낀 애정(affection)과 부드러움(tenderness)의 저 기간에 관해 회고 할 때 나는 내가 묽은 자기만족(self-complacency)의 느낌에 지배되어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회고 속에서 나는 지금 왜 주님께서 나에게서 그 환희(ecstasy)의 느낌을 가져가 버리셨는지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자기아첨(self-flattery)과 헛된 영광 안으로 첨가시키는 인간에게 더 이상 그분의 축복들을 낭비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나를 억압하고, 그리고 나에게 결국 실제는 아름다운 어떤 것도 나의 삶속에 들어올 수 없다는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들어오자마자 즉시 그것은 내 마음의 이러한 숨겨진 성향들로 인해, 얼룩지고 더럽혀진다는 것 때문이다. 나는 나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매우 가까이 계신 날들이 나의 삶속에 있어 왔으며 나는 그분께 간구했다. “그것이 항상 그렇게 되게 해 주소서, 나의 하나님 그리고 결코 나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그러나 삶은 항상 다시 평상적이고 일반적인 옛날의 삶으로 역류해 버렸고, 그리고 나는 지금 하나님께서 달리 어떻게 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쁨과 환희의 날들이 내게 있어서 독소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을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고통이며 괴로움이다.

 

   내가 죄인이라서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부유함으로 내게 주신 그 모든 것은, 그것이 내 삶의 영역(reaches)에 들어오자 마자 더럽혀지게 된다. 그분께서는 나를 겸손하고 감사하게 하기 위하여 내게 주신 그 무엇들을 내가 나의 내적 자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사용한다. -그것은 그분과 함께하는 나의 삶의 무거운 짐이다.

 

   나를 낙심하도록 만들기 쉬운 또 다른 경험이 있다. 우리는 심지어 가장 성스러운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이런 삶속에 있는 한 단지 완전한 복종의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도달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것처럼,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염려하는 틀림없이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리고 지금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인간의 성적 욕망들에 관한 중요한 것을 말해야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진실한 신자들 가운데에서까지도 이러한 육체적 욕망들의 멍에(yoke)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가!

 

   나는 이야기 되어진 그것을 들어왔으며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데 그것은 대다수의 인간은 죄가 토의되어지고 그들이 그 “죄”라는 낱말의 의미와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때 그들의 생각들이 감각적인 열정과 불결한 쾌락들의 죄에로 거의 변함없이 그들을 이끌어 갔다는 것, 그리고 항상 그들이 실제로 절망하는 그것들에로 끌려갔다는 것을 발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평생 이것에 만족해야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또 다른 것들이 있다. 때때로 우리도 우리의 이기주의와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 때문에 불안하게 된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도 격심한 반란과 혁명을 일으키는 목소리들, 우리의 온 문명을 뒤집어 엎으려는 욕망을 일으키려는 목소리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러한 과격파들의 요구들과 함께 함성들을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는 이유들이 있다. 여전히 때때로 그 슬픈 진실을 우리가 우리의 현재사회에 대하여 그런 사나운 증오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필요를 공감하는데 불행히도 실패했다는 것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우리는 만일 우리가 그들의 고생과 결핍을 경험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느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비참과 궁핍가운데 있는 이러한 사람들이 비참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결코 발견되어질 수 없는 방향들 속에서 그들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려 하는 것이 무슨 이상한 일인가?

 

   종종 우리는 우리의 판단에 있어서 너무 가혹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두를 보고 있는 그 고생과 결핍에 의해 전혀 감동받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원죄들의 자리와 생각의 신(a him of thought)을 뒤섞어 버렸고, 그래서 많이 변론하고 철학화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뒤덮고 위협하는 무서운 심판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관심과 동정심의 결핍이 지금 널리 퍼져있는 정신이상(정신착란)으로 비난 받을만큼 극심한 정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내적으로 불안하게 하고 불확실하게 만든다. 우리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귀에 거슬리는 목쉰 소리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에서 우리가 자기중심적 이었는가를 심지어 우리가 상상했던 것들에서 조차도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에 관심을 기울였던 가를 알기 때문이다.

 

   현대 세계에서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역시 우리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무엇에 의하여 감염되어졌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만큼 탐욕스럽고, 증오로 가득차게 되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이기심(selfishness)과 잔혹성으로 말미암아 서로에게 소외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온갖 종류의 반복(적의)와 오해들로 말미암아 서로에게 소외당하게 되어졌다. 그리고 항상 그분의 최악의 적들을 향해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깊은 애도를 베푸셨던 위대하고 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천천히 우리의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지금 그 폭풍이 교회(the church)의 온 세계를 자유롭게 강타한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불쾌하고 불안하게 느끼고 있다. 때때로 거칠고 조잡한 모욕적인 언사 뒤에 진실한 실제적인 예배에 관한 깊은 내적인 열망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결국 매일의 삶의 태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에 대한 커다란 실망이 함께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생각들은 지금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억누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수수께끼로 보기 시작하고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께 닿아 있는지 어떤지를 혹은 이것이 단지 우리자신의 상상이 꾸며낸 허구였는지 아닌지를 우리 자신들에게 집요하고 묻기 시작한다.

   우리는 인간(man), 그 불가해성을 토론했지만, 보다 깊이 우리를 흔드는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아 있는데, 즉 그 수수께끼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 속에 우리가 측정할 수 없는 반위들을 보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it to be)고 상상해왔던 것과는 다르다. 우리에게 직면해 있는 문제보다 더 무시무시한 물음은 우리는 실로 누구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도달하고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은 무엇인가? 저 모든 것은 사실이고 따뜻하며 살아있는 실제인가? 아니면 그것은 환상,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자존심인가? 이다.

 

   우리가 신앙의 어려움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이러한 어려움들이 인간 스스로 인 그 수수께끼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삶의 그물망을 풀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의 관점은 종종 흐려지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신앙의 커다란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보는 선명도를 결핍하게 된다. 그들은 종종 어둡고 애매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스스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신앙하기를 추구하고 열망하며 갈구하고 있지만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그 무엇에 의해 실망하고 낙담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어디서든 얻을 수 없다. 만일 성경이 우리에게 세상과 멀리한 것을 말하는 구리고 우리에게 눈먼 신앙(blind faith)을 요구하는 책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성경은 그러나 우리자신들을 다루는,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가를 우리가 누구이어야만 하는가를 말해주는,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에 들어 올 수 있는 위로부터의 힘(power)을 말해주는 책이다. 그러나 저 힘은 우리의 삶 속에 증거 되어야 하고 진실하게 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보여져야하며 느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