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표지 - 칼빈과 네덜란드 신앙고백

‘교회의 표지’라는 말이 교회를 정의하는데 결정적일 역할을 하게된 것은 종교개혁시대부터이다. 물론 이전에도 이 용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종교개혁가들이 이 용어를 빌어 당시의 부패한 로마교회로부터 참된 교회를 구분하려고 했던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결국 로마교회가 개혁운동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표지는 로마교회로부터 개신교를 구분시키는 개신교의 표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용어는 개신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개신교는 이 용어를 통해 개신교는 자신의 로마교와 구별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루터를 비롯한 일 세대 개혁가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표지라는 용어은 그들의 후계자들에게서보다 훨씬 덜 체계적이고 덜 조직적으로 사용되었다. 칼빈 역시 두 번째 세대의 개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일 세대 개혁가들처럼 이 용어를 그의 제자들보다 덜 조직적으로 사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이 자신의 「기독교강요」 최종판 (1559) 4권 1장 10절에서 교회의 표지로써 말씀선포 [또는 말씀설교 (verbi praedicatio)]와 성례준수 (sacramentorum observatio)만을 언급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그의 수많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개혁교회의 세 번째 표지인 치리 (disciplina)를 ‘표지 (nota 혹은 symbolum 혹은 signum)’라는 단어로 정의한 곳이 없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표지는 ‘두 가지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이 고려될 때 비로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칼빈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선포 (pura verbi Dei praedicatione)’와 ‘성례의 합법적 집행 (legitima sacramentorum administratio)'만을 교회의 표지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그가 치리를 교회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정의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칼빈은 사도행전 2:42의 주석에서 ‘교회의 참되고 진정한 모습이 판별될 수 있는 네 가지 표지들 (quatuor notas, ex quibus vera et genuina ecclesiae facies diiudicari [=dis+judico] queat.)’로써 ‘교리 (doctrina)'와 ‘기도 (preces)'와 ’교제 (communicatio)'와 ‘빵을 뗌 (fractio panis)'을 제시한다. 이 점을 고려할 경우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표지’라는 단어는 그의 후계자들보다 덜 체계적으로 사용된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칼빈의 강조는 그가 ‘치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치리 없이는] 결코 사회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치리 없이는 아무리 적절한 가족으로 구성된 [가정이라] 할지라도 그 가정은 결코 바른 상태로 유지될 수 없다. 즉 그 상태가 가능한 한 질서 있게 유지되어야하는 교회에서 치리는 훨씬 더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마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교리가 교회의 영혼인 것처럼, 거기서 치리는 신경과도 같다.’ (「기독교강요」 4.12.1) 결론적으로, 교회 표지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칼빈이 제시한 교회의 두 가지 표지인 설교와 성례집행 조차도 동등한 가치의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칼빈은 말씀선포를 제일 중요한 표지로, 그리고 성례를 부차적인 ‘말씀의 첨가물 (accessio verbi)’ 로 정의한다.

당시 박해 아래 있던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1559년에 파리 (Paris)에서 제 1차 연합모임 (총노회의 성격)을 가졌을 때 프랑스 내의 박해받는 개혁교회들을 위해 「프랑스 왕국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La Confession de foy des Eglises reformees du Royaume de France)」이 채택되었는데, 이 내용의 대부분은 칼빈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신앙고백은 1571년의 라 로쉐여 (La Rochelle)에서 개최된 프랑스 총노회를 통해 프랑스 개혁교회의 유일한 신앙고백서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라 로쉐여 신앙고백」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도 드 브레 (Guido de Br s)는 이 「프랑스 신앙고백 = 갈리아 신앙고백 (Confessio Gallicana)」을 기초로 1561년에 자신의 「벨직 신앙고백 (Confessio Belgica) =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의 공동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신앙고백 (Confession de foy, Faicte d'vn commun accord par les fideles qui conuersent s pays bas)」을 작성했는데, 이것은 네덜란드개혁교회의 공식신앙고백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표지에 관해 후자는 전자를 따르지 않는다.

「프랑스신앙고백」은 제27조에서 ‘교회의 표지’라는 용어 대신에 ‘어느 것이 참된 교회인지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구분하는 것 (discerner soigneusement et avec prudence quelle est la vraye Eglise)’에 대해 논하고, 이어 제28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 말씀에 복종하기 위한 어떤 신앙고백도 없는 곳과 성례의 사용이 전무한 곳에서는 실제로 어떤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 (ou la parole de Dieu n'est receue, et qu’on ne faict nulle profession de s'assubiecter, parler proprement, on ne peut iuger qu‘il ait aucune Eglise)’라고 결론 내린다. 「벨직신앙고백」은 제29조에서는 ‘표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참된 교회를 인식하기 위한 표지들은 다음과 같다: 교회가 복음의 순수한 설교를 사용할 때,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처럼, 성례의 순수한 집행을 사용할 때, 교회치리가 악덕을 교정하기 위해 사용될 때 ... 이것에 의해 참된 교회는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Le marques pour cognoistre la vraye Eglise sont telles: si l'Eglise use de la pure predication de l'Evangile; si elle use de la pure administration de Sacramens comme Christ les a ordonnez; ... Par cela peut on estre asseur de cognoistre la vraye Eglise, ...).’

요약하면, 「프랑스 신앙고백」에서는 참된 교회를 식별하는 기준을 설교와 성례에서 찾는 반면, 「벨직 신앙고백」에서는 설교와 성례와 치리를 교회의 삼대 표지로 정의한다. 바로 여기에 화란개혁교회가 교회의 표지를 세 가지로 삼게 된 기초가 놓여있다. 그러나 「벨직 신앙고백」가 개혁주의 신앙고백문 가운데 교회의 표지를 세 가지로 삼은 최초의 것은 아니다. 그것 보다 1년 앞선 1560년에 작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역시 제18항에서 ‘교회의 세 가지 표지 (The Notis of the trew Kirk of God)’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설교 (The trew preaching of the word of God)와 그리스도 예수의 성례의 바른 집행 (The rycht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is of Christ Jesus)과 바르게 시행되는 교회치리 (Ecclesiasticall discipline uprychtlie ministred)’이 교회의 삼대 표지로 정의된다. 개혁주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치리를 교회의 세 번째 표지로 삼게 되었고, 이것은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분시키는 가장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이 칼빈의 두 가지 표지론에서 칼빈주의자들의 세 가지 표지론에로의 발전이 변질로 평가되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칼빈 역시 교회치리를 교회건설 (aedificatio ecclesiae)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개혁교도들은 칼빈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정의한 것을 ‘표지’라는 말로 정의한 것의 차이에 불과하다. 물론 시대가 흐르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 점점 차이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이 들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소한 16세기 중반 직후가지 그와 같은 차이점들은 거의 인식될 수 없다.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점은 프랑스와 화란에 산재해 있던 개신교도들이 처한 프랑스 왕국과 네덜란드라는 환경이 칼빈이 처한 제네바의 환경과 정치 종교적으로 매우 달랐다는 것이다. 즉 칼빈의 제네바는 개신교 정부로써 개혁교회를 보호하고 지원해 준 반면에 당시 프랑스 왕국과 네덜란드는 종교적으로 여전히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모든 개신교도들은 정치 종교적 보호를 받기는커녕 지독한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박해아래 있는 개혁교도들은 건전한 교회건설을 위해 정부와 독립된 개교회 자체의 치리를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칼빈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칼빈 역시 스트라쓰부르크의 프랑스 피난민 교회를 맡아 목회하던 시절에 그 도시의 치리회 (Kirchenpfleger) 개념을 도입하여 자신의 교회에 적용했던 적이 있다 (칼빈은 거기서 처음으로 성찬의 참여여부를 위해 치리를 적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