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회개 (Repentance)

 

 

 

   우리는 예수께 배웠고, 그분이 우리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말씀하셔야 하는 것을 들어 왔다. 우리는 지금 우리자신들에게로 그리고 삶의 일상적인 것들에로 돌아가기를 잘한다. 나는 교회 안에서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거기서 나는 내가 꾸밈없이 존경하고, 강하며 세련되고 정결한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 사람들의 삶에서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어느 정도 발견했다. 나는 매일 그 사람들이 구원받았다는 것과 그들이 이기주의의 속박과 악한 욕망들을 갈망함으로부터 해방되어진 것을 보아왔다. 확실히 그러한 모든 악한 세력들은 그들 삶속에 존재하지만, 또한 거기에는 참되고 실제적인 구원이 있다. 그들의 삶은 다르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더욱더 성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비극적이고 무서운 시대에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엄청난 고통과 심지어 순교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힘을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때때로 내가 서둘러 말하고 싶어질 때면, 이 말씀이 나를 자극시킨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시 116:11). 그러나 내가 기독교를 전체적으로 관찰하고 대다수의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고 생각할 것인가를 주의해볼 때 나는 종종 실망한 감정의 무게 때문에 가라앉는다. 나는 우리 모두가 반복해서 이러한 경험을 한다는 것을 말하곤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굴레 씌우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실제적인 참된 열망의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옛 죄들에 빠져들고 만다. 우리는 다시 중상모략을 탐닉하며, 그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다시 희미한 이기주의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이기주의는 또 다시 우리의 마음을 독살시켜 버린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를 묶고 있는 족쇄들을 덜거덕거리게 하고 흔들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깨트리거나 부수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우리를 그 악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그러나 마치 하늘이 놋쇠로 되어있는 것처럼, 마치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그분께 도달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우리의 목소리가 우리 마음의 범위를 넘어가지 않는 것처럼 그러한 기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완전한 패배한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은 용기를 잃어버리고, 힘없이 지쳐버린 채 삶이 실제로 새로워질 가능성에 대한 모든 확신을 강탈당하고 만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의 엄청난 운동이 구원하는 과정을 향하여 인간을 도울 목적으로 들어왔지만, 이 운동이 그러한 목표와 목적을 성취하는데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 이상한 기쁨의 감정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서, 모든 것은 다시 옛 것으로 되돌아 가버린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서 환멸을 삼켜 버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잔인하고 냉혹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래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실망시켰다. 우리는 너무도 크고 무한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우리의 눈이 그분의 은혜의 충만한 의식 속으로 열려졌을 때, 우리는 그러한 구세주를 섬기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분을 위하여 우리의 죄 많은 길들을 포기하는 것이, 그리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이 쉬운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Reality)는 우리를 다르게 가르쳤다. 우리가 죽었다고 믿어온 원수들은 공격은 새롭게 하기 시작했고, 그 공격은 날로 더 강해졌다. 그리고 우리를 도울 것이라던 그 분은 저 멀리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피로한 기색이 우리를 덮쳐버렸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막 4:26,27). 우리는 대답한다.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 씨는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성장하지 않는다! 성장은 자동적으로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단 하나의 설명이 있는데, 즉, 결코 그 씨가 성장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반항심을 가지고 성장할 기회를 그 씨앗에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실패하는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어둡게 하는 너무나도 깊은 무력감, 우리에게 있는 그러한 무력감의 실제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내가 이러한 질문을 할 때 3가지 대답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으며 나는 그것들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일 것이다. 첫째로 이러한 무력감은 우리의 일반적인 고립(loneliness)과 소외( estrangement)에 의해 발생하게 된다. 이것에 의해서 나는 우리 모두가 고독한 존재들(solitary beings)로써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에서 우리는 자기 보전적(self-contained)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킨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악착스럽게 홀로 살아가도록 허락하시며, 우리의 어려움들과 불행에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고 느낀다. 우리는 또한 서로에게서 소외되어 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문제점들을 살펴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들을 나누지 않는다. 우리는 줄곧 혼자서 우리의 문제들과 우리가 몹시 지쳐있는 결과를 붙잡고 씨름하며, 싸운다. 몇 년 전 나는 3개의 본문을 다루는 설교를 들었는데 이들 3개의 본문은 오늘까지 나에게 남아있다. 첫 번째 본문은 :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5)였다. 두 번째 본문은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 였다. 그리고 3번째 본문은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 5:7) 였다. 이 세 본문은 3가지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책임과 그가 매일 해야 하는 선택의 짐을 져야만 한다. 나아가, 우리는 서로의 짐들, 즉 걱정과 실망의 짐들을 져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곁에 서신 그분의 강한 어깨위에 우리의 모든 짐을 던져야 한다. 이 세 본문 중에서 우리는 첫 번째 것을 매우 잘 이해하며, 그것에 주의를 집중해 왔다. 우리는 끝없이 짐 나르는 자들이 되었다(We have become burden carriers, ad infinitum).  우리는 우리의 악한 욕망들을 대항하여 무서운 전쟁을 치루면서 맹인처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우리는 악에 대항한 전투에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거나 전혀 지원해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를 귀찮게 하는 근심과 걱정꺼리들을 영광이라곤 거의 없는 사소한 것들로 가득한 우리의 윤기 없는(lusterless)삶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등 뒤에 서계신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비록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그것들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찌라도 그리스도의 비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정말 어떤 씨처럼 저절로  성장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며, 만일 우리가 그 나라에 속한 것들을 추상적인 것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에 강하게 붙잡힌 우리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비록 적의 왕국이 아무리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경건과 헌신이 적을 괴롭히고 불안하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두 번째 중요한 원인은 우리의 공통적인 불신이다. 우리는 구원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죄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이러한 삶에서 우리는 결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말한다. 심지어 가장 위대한 성자들도 완전한  순종에 있어서 다만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라고 너무도 정확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나은 것으로 변화가 배제되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히 지금 우리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께서 죄에 종노릇하는 그들을 자유케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역에 있어서(in doing) 우리가 너무 예수를 축소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 자신을 축소 시켰다. 그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옛 자아를 남겨 둘 수는 있다는 것을, 우리는 조용히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용감히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어떤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가 역시 마침내 커다란 실망에 부딪힐 것이라고 매우 기뻐하면서 그의 시도를 얕잡아 본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을 위험한 치명적인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강한 욕망들의 노예 상태로부터, 남자와 여자와 젊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예수께 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말하는 것이 긴급히 필요하다.  이러한 욕망들은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하고 엄습할 수도 있으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베풀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깨닫도록 하실 것이며, 우리 마음에 실제적인 후회와 회개를 일으키게 하실 것이다. 시기와 질투에 빠져버리는, 심지어 자기 숭배자와 추구자들을 가장 고상한 것들에 남겨두는, 자존심과, 자만심 같은 그러한 죄들로부터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그 분에게는 있다.

 

   나는 이 삶속에서 우리가 완전하게 되리라는 것은 믿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일찌기 이것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인간이 죄를 범했으며 그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진리를 수용할 때 그분께서 인간을 실제로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그분 스스로 그것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무력한 세 번째 이유는 우리의 공통적인 반항심(un-willengness)이다. 우리가 고침받기를 원하는지를 질문 받는다면, 우리는 종종 어거스틴의 대답을 따른다. “그러지요 주님 -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들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왔다. 우리는 모든 불성실과 상호간의 화냄이 닻을 내리고 정착된 삶의 방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일반적인 실수들을 정박시키는 일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실수에 붙들려 있고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실속이 없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는 메마르게 되었고 절름발이가 되었다. 우리의 사회는 불일치와 개인적인 성마름(touchiness)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종종 서로 적당한 거리에 남아 있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묵인해왔다. 심지어 우연히 변화를 야기 시킬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조차도 우리를 억압한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세상은 증오와 전쟁, 이름 없는 불행(misery), 걱정거리와 위험들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더 이상 복음을 가져올 법을 알지 못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참으로 당신은 자유롭습니까?”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는 아주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자랑하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내 스스로 겨우 믿는 쓴 웃음(acid smile)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노예상태로 묶여있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감히 말할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에게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분께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허다한 증인들”(the cloud of witnesses)의 삶속에서 그것을 우리에게 알도록 해 주신다. 나는 그것이 참 된 것을 안다. 마침내 우리가 깨어서 죽음으로부터 일어날 때 환한 그분의 얼굴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며 밝혀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한 우리가 서로 그때에는 그분의 약속의 길을 걷는 바른 길을 발견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감히 말한다. 얌전하게 이것이라고 : “용서는 당신에게(with Thee)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Thou)이 두려워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With Thee) 자비와 풍부한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하라! 실제로 자유하라! 열망, 우리의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실제적인 하나의 열망이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