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사랑과 계명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22:38)으로서 그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12:31)고 단정하셨다. 특히 이웃사랑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새 계명”(요12:34)과 “율법의 완성”(롬13:8~10)으로 선언하셨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성경의 이러한 강조를 ‘상황윤리’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결단에 잘못(해석하고) 적용하여 결과적으로는 기독교 윤리의 파탄을 불러오고 있다. 상황윤리론자들은 ‘상황’에 따라서 ‘사랑’을 최고의 규범으로 절대화하여 다른 계명을 상대화시킨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규범만으로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만이 유일한(포괄적 절대적) 규범으로서 항상 선을 이룰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이루어지는 그 사랑의 결단은 모든 계명을 초월하여 인간의 행위를 항상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 그 자체는 본래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사랑의 규범에 비추어 주어진 그 상황에 따라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윤리에 의하면 십계명도 사랑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경우에는 지켜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지킬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죄와 벌』의 주인공인 ‘소냐’의 매춘행위도 가족을 위한 사랑 때문에 행한 것이기에 결코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상황윤리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평가해 보고자 한다.

 

사랑이 가장 ‘큰 계명’ 이라는 것(고전 13:1 이하)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다른 하나님의 계명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랑이 하나님의 다른 계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 그 자체를 하나의 계명이라고 하고(마22:38 이하, 요 13:34, 딤전 4:12), 또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요15:10, 요일 5:3),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그 사랑이 온전해진다고(요일 2:3 이하, 요일 1:6) 하였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 이라는 것(고전 13:10)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할 뿐이지, 사랑만으로 모든 율법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사랑은 다른 계명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원동력(근본정신)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과 율법은 효소와 가루 반죽 같아서 좋은 빵(율법의 완성)을 얻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 중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시킬 수 없다.

 

사랑이 “새 계명”이라는 것(요 13:34)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다른 옛 계명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상 사랑의 계명도 옛 계명 중의 하나이다(레 19:18, 신 6:5).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하심으로 언약에 기초하여 목숨까지 버리신 자신의 희생적 사랑(아가페)이 모든 사랑의 새로운 표준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사랑만이 새 계명이요 그 밖의 모든 계명은 옛 계명으로서 이제 새 계명에 의해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성경의 ‘불변적 원리’를 오늘 우리의 실제적 상황에서 적용할 때 그 적용의 발전적 변화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구약 성경에 ‘의로운 전쟁’이 원리적으로 허용되어 있다(수 8장). 불의의 침공으로부터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기본적인 기회를 계속 제공하기 위한 필요수단으로 행하는 재래식 전쟁은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핵전쟁은 이러한 일반은총의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바로 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일한 성경 원리를 따라 오늘날의 핵전쟁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이처럼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한 원리 적용의 발전적 변화는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상황윤리’를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황윤리는 상황에 독립해 있는 어떤 불변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항상 상황에 독립하여 있는 성경의 불변적 원리의 관점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불변하는 계명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도 항상 순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