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1)
이제 우리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로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이 주제는 아마도 성찬과 관련된 어떤 주제보다도 더 많은 토론과 논란의 근원이었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특히 조심해서 칼빈이 말했던 것과 말하지 않았던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칼빈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표징론(the doctrine of signs)에서 출발해야 한다. 게리쉬가 고찰한 바와 같이, "칼빈의 모든 성례 신학이 그의 표징론(물론, 그는 이를 어거스틴으로부터 차용하였음)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성례전적 표징에 대한 칼빈의 토론은 그의 전 작품에 걸쳐 발견되며 그는 모든 곳에서 동일한 것, 즉 표징과 상징된 것은 분리되지 아니하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따라서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표징과 상징된 것을 구별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를 징표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며 믿음을 지닌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를 그의 영적 은사와 더불어 영적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수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한편 오랫동안 그리스도에 참여해 온 자들은 이 교제를 지속하고 갱신한다.
"성례에 관한 상호 협약"이라는 글의 서문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성례가 그 실재와 효력에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우리 중에 누구인가?" 요한복음 6장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거의 동일한 사실을 언급한다: "성례는 가시적 징표, 그리고 이것과 연결되는 상징되는 것으로 구성되는데 후자는 곧 그 실재에 해당된다."
로날드 월레스는 표징과 이에 의해 상징되는 것 사이에 발생하는 성례전적 연합에 대한 칼빈의 교리의 주요 사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성례의 신적 행위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는 신적 행위와 인간 행위 사이에 형성된 연합은 매우 밀접하므로 실제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실체가 된다." 칼빈이 표현하듯이, "따라서 사물의 명칭은 여기에서 표징으로 전달되는데 이 전달은 마치 그것이 엄격하게 적용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며 앞서 언급된 연결의 토대 위에 상징적으로 간주된다." 둘째, 이 성례전적 연합은 "아주 초월적이며, 자유로운 인격성을 띄는 것이기 때문에 상징된 것은 반드시 표징으로부터 구별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만약 표징이 실제로 그 상징하는 것 자체가 된다면, 이는 성례로서 작용하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 연합을 설명하는 자연적 유추(analogy)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계에 어떤 평행도 없는 독특한 신비이다. 성례전적 연합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유추는 성육신의 신비이다. 넷째, 월레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연합의 신비를 통해서, 칼빈이 이 성례전적 연합의 신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통제하는데 적어도 보탬이 되는 유추를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칼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연합과 성례에 있어서 표징과 실재 사이의 연합 사이에 칼빈이 이해한 유추는 그의 주요 논지들의 일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제공한다. 분리 없는 구별을 주장함에 있어서 칼빈은 정통 기독교에서 공인된 공식에 호소하고 있었다. 폴 로렘(Paul Rorem)은 칼빈의 성례 신학은 "칼케돈 공의회처럼 균형을 잡는 행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고 구별되어야 하는 것같이, 표징과 상징된 실재 또한 분리되지 않고 구별되어야 한다.
칼빈에게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현존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지 결여된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 아니기 때문에 표징과 상징된 것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셉 틸렌다(Joseph Tylenda)는 칼빈이 "adesse(현존하다, 임재하다)"라는 단어를 "이 단어가 실재적이며 물리적인 임재를 지칭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대신에, 칼빈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는 "exhibere"인데 이 단어는 "임재를 전제로 삼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에 사용된다. 실제로 칼빈의 성례전적 표징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측면은 이 표징들이 공허한 상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존 헤셀링크(I. John Hesselink)가 지적하듯이, "개혁주의 교회와 장로교회를 포함한 대중적 견해와는 전혀 달리, 칼빈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단순한 상징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게리쉬는 성찬 교리의 이 요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원전에 대한 가장 왜곡된 독해만이 칼빈에게 성례가 순수하게 상징적이며 교훈적 기능을 지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 성례는 형상화된 상징을 수단으로 삼아 가르치지만, 이는 또한 상징된 것의 전달에 의한 은혜의 참된 도구이기도 하다.
만약 이러한 생각이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사고의 전체적 흐름에서 이미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표징의 성격에 대한 칼빈의 조심스럽고 분명한 주장들에 의해서 제거되었어야 마땅하다. 표징과 상징되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그는 기독론적 공식의 언어, 즉 "분리 없는 구별"을 적용한다. 우리는 표징을 상징되는 것으로부터 구별해야 하지만 이들을 분리할 수는 없다. 표징이 있는 곳에, 실재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이 실재, 즉 성례의 질료와 본질이므로, 표징은 실재적 임재에 대한 서약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표징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임재를 유효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표징은 실재일 수 없으며 또한 실재가 될 수 없으며 결여된 실재에 대한 상징도 될 수 없다.
칼빈보다 훨씬 전에 어거스틴이 고찰한 바와 같이 성례신학에 있어서 표징과 표징의 대상을 분리 없이 구별하는 것은 결정적인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에 관해서 칼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펴보기 전에 간단히 논의되어야 할 둘째 이슈는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의 말씀에 대한 칼빈의 해석이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칼빈은 이 질문에 대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1:24에 관한 주석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이 표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내 몸이다. … 그리스도는 떡을 그의 몸이라고 부르신다. … 그렇다면 모든 논쟁을 뒤로 하고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떡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고 간주하도록 하자. 이제 질문은 바로 "어떤 의미에서의 떡인가?"로 귀결된다. 우리가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이 표현을 비유적인(figurative) 것으로 보아야 한다. 확실히 이를 부인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정직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몸'이라는 용어가 떡에 적용되었는가? 요한이 성령을 비둘기라고 부른 것(요 1:32)과 동일한 이유에서 이런 적용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용인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에 우리는 동의한다. 이제 성령이 그렇게 불리워지는 이유는 이것이다. 즉 그가 비둘기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이름이 가시적 표징에 전이된 것이다. 이 본문의 경우에도 환유(metonymy)의 유사한 형태가 적용되어 '몸'이라는 단어가 떡에 적용되어 그에 대한 표징과 상징이 되었다고 파악할 수 없을까 … ?
그렇다면 나는 문제의 해결점을 여기에 제시한다. 즉 여기에 표현에 있어서 성례전적 형태가 주어졌다는 것이며 주님께서 상징된 것의 이름을 표징에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환유에 대한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상징된 것의 이름이 단순히 그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표징에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답한다. 오히려 그것의 상징으로서 실재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
따라서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왜냐하면 떡이 나타내는 몸이 우리에게 제공되거나 또는 이 상징을 우리에게 제공하시면서 이와 동시에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주신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보장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공허한 표현으로 우리를 속이는 기만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의 사실이 나에게는 모든 논쟁을 멀리할 정도로 분명한 것이다. 여기에 실재는 표징에 연합된다. 또는 이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떡을 함께 떼고 먹는 것은 영적 효능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번역:이신열)
*전문은 ["성찬의 신비-칼빈의 성찬론 회복" 이신열 역/ 원저"Given for you" 키이스 A. 매티슨]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성신학자인 로널드 롤하이저가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침소가 일상의 성찬이라는 말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바로 성례전적 차원에서 성찬은 주님과 교회의 황홀한 연합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데 있어서 성찬만큼 래디컬한 의식이 다시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