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가 배워야 교회가 산다!
요즘 한국교회는 다양한 문제로 시름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국가적인 인구감소에 따른 교인감소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젊은 세대 교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의 급감 문제, 기존교인의 참여도 결여 문제, 노령인구의 증가 문제 등등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하다.
더불어 직분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부서 간의 갈등과 같은 교회의 내적 갈등 문제도 심각하다. 이런 갈등은 서로 부딪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제를 꺼리는 개인주의일지 모른다. 개인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개인의 종교심으로 축소하고 결국 가나안교인을 양산한다. 교회생활에 대한 실망과 실증도 가나안 현상의 주요 원인이다.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실망과 실증의 가장 일반적이고 심각한 원인은 아마도 성도 간의 다툼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회 직분자들이 그 다툼의 중심에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교회의 항존직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성도 간의 다툼을 중재하고 해결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제의 해결책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 직분자들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아는 지식이 남다른 이유 때문에 존경받을 수 있어야 한다. 뛰어난 성경지식은 목사를 청빙하거나 장로를 선출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살고 죽는 본을 보여야 할 모범적인 종들이기 때문이다. 신자로서 그들의 인격과 삶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분별되어야 마땅하다.
1. 성경이 말하는 장로란?
장로는 구약에서 유래한 직분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시대에는 장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로’라는 용어가 성경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은 출애굽기 3장 16절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장로가 존재했다. 당시 장로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기 위해 장로들을 불러 모았다. 구약의 장로들은 나이가 든 노인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판결하는 일에 종사했다. 모세가 혼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고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서 하나님의 회막 앞에 모세와 함께 서도록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모세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모세 홀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민 11:16-17). 그러므로 장로들의 주요 임무는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일, 즉 통치자와 재판장의 역할이었다. 신약시대 로마제국에서는 장로와 같은 임무를 맡은 자를 감독이라 불렀다. 감독은 일정 지역의 통치자를 의미한다.
신약시대 교회에서는 장로와 감독은 동의어였다. 바울이 밀레도로 에베소의 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면서 그들을 감독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실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디모데는 감독의 자격조건 가운데 ‘신앙의 연륜’을 중시한다(딤전 3:1-7). 아마도 그것은 신약교회의 감독을 구약 이스라엘의 장로와 동일한 직분으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구약에서 장로는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의 연륜 즉 나이를 중시했던 반면에 신약에서 감독 즉 장로는 나이가 아닌 신앙의 연륜을 중시했다.
신약교회의 장로와 감독은 주요 업무에 따라 두 종류 즉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로 나누어져 업무분담이 이루어졌다(딤전 5:17). 다스리는 장로는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는가? 아니다. 주요 업무가 다를 뿐 장로는 다스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는 직분이다. 그런 장로들을 온 교회가 존경해야 마땅하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교회에서 다스리는 자도 가르치는 자도 모두 장로지만 다스림과 가르침의 세부 업무는 구분된다. 오늘날 다스리는 일은 장로가 담당하고 가르치는 일은 목사가 담당한다. 목사는 가르치는 장로이면서 동시에 다스리는 장로다. 하지만 장로는 목사와 달리 자동으로 가르치는 장로 즉 목사 역할을 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장로는 목사와 같은 훈련 기간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가르치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고신교회의 경우 최소 3-5년 혹은 7-9년 동안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도로 활동하기까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3년간 훈련을 받았다. 바울 역시 갑작스러운 회심 후 본격적인 사도로 활동하기 전에 아라비아와 고향 다소에서 약 3년의 수련기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갈 1:17-18; 행 9:30).
베드로와 바울은 신약교회의 대표적인 말씀 봉사자로서 가르치는 장로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활동했다. 오늘날 목사와 달리 그들이 하나의 지역교회에 정착한 목회자는 아니었다. 베드로와 바울의 주된 임무는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홀로 감당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여러 조력자들이 있었다.
바나바의 사촌인 마가와 같은 조력자는 바나바의 선교 여행에 필수 조력자였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바울에게도 매우 유익하고 필요한 조력자였다(참조. 벧전 5:13; 딤후 4:11). 마가나 디모데는 단순히 베드로나 바울에게 개인 비서 정도의 조력자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말씀 사역의 동역자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다년간의 조력과 훈련을 통해 동역자가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권면한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1-3)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로 소개한다. 베드로에 의하면 장로는 자신처럼 현재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살고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살아야 한다. 장로는 “양 무리를” 다스리되, 억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목양해야 하고, 나아가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렇게 하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한다.
베드로가 권면한 장로들은 사실상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병행했다. 그들은 오늘날 목사와 장로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동시에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사도시대에는 이미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장로와 다스리는 일에 전념하는 장로로 구분하기 시작했지만 오늘날과 달리 가르치는 사역 전담자인 목사와 다스리는 사역 전담자인 장로로 명확하게 분리하지는 않았다. 주요 직무가 가르치는 일 혹은 다스리는 일 둘 중 하나에 더 집중하는 정도의 차이였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장로의 필수 직무는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이 두 직무의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목사의 가르치는 직무와 장로의 다스리는 직무는 서로 구분되고 분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스리는 장로에게 가르치는 직무가 직접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 해도 다스리는 장로라면 자신의 교회에서 목사 다음으로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적시할 필요가 있다.
2. 잘 배우려는 자세 없이는 잘 다스릴 수 없다.
모든 교회 직분자의 기본이자 공통적인 자격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 아는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제업무를 전담할 사람 일곱을 뽑았는데, 그들은 “성령과 지혜” 즉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스데반과 빌립은 사도들 못지않게 설교하고 전도하는 일을 잘 감당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 즉 말씀에 능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구제업무를 전담하기 위해 선출된 집사도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누구에게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있게 가르친다면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가 그래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가르칠 능력이 없는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를 바르게 다스리는 원리는 성경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장로는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 다음으로 성경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없는 장로가 교회를 말씀대로 잘 다스릴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알아야 하나님의 교회를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든 국가든 일반적인 사회 집단을 경영하는 원리는 그 역사와 현장, 그리고 지도자들의 지식과 경험 등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교회를 잘 경영하는 원리는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서만 찾아야 한다. 교회는 말씀 위에만 세워질 수 있고 말씀으로만 다스릴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나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것보다 더 큰 교회 불행은 없다. 목사 청빙뿐만 아니라 장로 선출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격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아는 신앙지식이다. 이것은 모든 교회 직분의 필수 자격조건이다. 이것을 자격조건으로 제시하지 않거나 그 자격조건에 한참 미달하는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는 교회는 사탄의 유혹과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장로는 누구보다 성경지식과 신앙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성경을 머리로 배울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배워야 한다. 가슴으로 배운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감동하고 자신의 삶을 진리인 성경에 맡기는 훈련을 의미한다. 장로는 그 훈련을 가장 잘 받은 탁월한 신자여야 한다. 다스리는 장로보다 가르치는 목사는 배나 탁월해야 한다. 이런 장로들을 통해 교회는 든든히 서가게 된다. 교회를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우는 시금석은 성경을 삶으로 체득한 지식, 산 신앙이다.
장로의 주요 임무는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교회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다스리는 원리를 알아야 하고 그 원리를 성경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성경 66권의 내용은 통일성도 있고 다양성도 있다. 성경의 통일성과 다양성은 실과 구슬이다. 통일성이라는 실로 다양성이라는 구슬을 꿰어야 한다. 성경의 통일성을 소개하는 길라잡이는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장로는 성경뿐만 아니라, 신앙고백에도 잘 알아야 한다.
장로가 교회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에 민감해야 한다. 또한 성경지식으로 이단적인 가르침을 분별해낼 수 있는 식견은 반드시 갖추어야 하다. 강단의 설교가 신앙고백에서 벗어나는지 분별하는 일도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장로는 교인들이 선포된 설교와 성경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데, 그래서 심방이 필요하다. 심방은 장로가 교회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장로가 심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다.
심방을 통해 장로는 각 가정을 말씀으로 권면할 수 있다. 그리고 심방결과를 반드시 목사와 당회에 보고하고 보고 받은 당회원들은 혹 심방한 가정의 어려움이 있을 경우 그것을 놓고 함께 기도할 필요가 있다. 당회원들은 그 가정의 어려움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 모든 심방의 원리도 성경과 신앙고백으로부터 배워야 하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심방을 해야 신앙적 권면도 가능하고 교회의 치리도 가능한 것이다.
3. 말씀에 죽고 사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
성경 말씀을 잘 배우고 숙지하여 가르칠 역량과 적용할 지혜를 갖춘 장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장로를 세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해나갈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에 충성하는 신자를 장로로 세워야 교회가 산다. 예전에는 장로를 뽑을 때 성경지식은 기본이요, 교회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교회 일에 앞장서는 헌신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을 장로로 뽑았다. 거기다가 인성까지도 중요하게 고려했다. 한 마디로 까다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담임목사의 말을 잘 듣는 사람, 혹은 돈이 많거나 많이 배웠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괜찮은 사람을 장로로 세우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보다는 사회적인 체면에 충실하려는 인본주의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를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교회를 망치고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하고 또한 그 말씀 위에 든든히 서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충성하고 말씀에 충실한 성도를 직분자로 세워야 한다.
교회마다 수(首)장로 또는 선임장로가 있다. 수장로라는 용어 자체가 비성경적이지만 만일 그 용어를 바르게 활용하려면 성경지식을 근거로 뽑으면 되지 않을까? 성경을 가장 잘 알고, 교회를 말씀 위에 든든히 세울 성경원리를 가장 많이 알고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 수장로가 된다면 좋지 않을까? 시무장로 가운데 장립을 가장 먼저 받은 사람이 수장로가 되는 현실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그런 ‘수장로’ 개념은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수장로라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고 싶다면 그는 장로 가운데 성경지식이 가장 탁월하고 그것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누구보다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장로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성경에 대한 지식이다. 성경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정보 차원의 지식이 아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지식’은 신자에게 이론이 아닌, 경험을 의미한다. 삶으로 경험되지 않고 체득되지 않은 지식은 온전한 신앙지식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유교문화 전통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착한 수장로 개념은 성경뿐만 아니라, 개혁교회 전통과 정신에도 어긋난다.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는 모든 인간관계를 자연스럽게 서열화한다. 심지어 친구관계조차도 무의식적인 서열이 정해져야 서로 편할 정도다. 유교문화가 수용하기 가장 힘든 개념이 평등이다. 유교문화는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열 중심의 유교문화에서 평등이란 갈등과 하극상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유교처럼 기독교도 질서를 존중한다. 성경이 하나님을 질서의 하나님이라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회와 집단은 질서를 존중해야만 한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질서는 서열화가 아니다. 그것은 상호존중으로 승화된 진정한 평등이다. 교회에서 장로는 성도를 사랑으로 섬겨야 하고 성도는 장로를 사랑으로 존경해야 한다. 또한 모든 장로는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목사와 목사, 장로와 장로, 집사와 집사 사이에 질서는 있지만 서열은 없다.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목사들 가운데 어떤 목사도, 장로들 가운데 어떤 장로도, 집사들 가운데 어떤 집사도 수위권이나 지배권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누구든지] 모든 의심과 유혹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1571년 독일의 엠덴(Emden)에서 개최한 최초의 네덜란드 개혁교회 총회가 결정한 첫 조항인데, 이후 모든 총회 결정에 빠짐없이 포함된 내용이다. 상호존중에 근거한 평등사상은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덕목이자 기독교문화다.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간의 존중과 협력만이 교회가 살 길이다. 갈등과 분쟁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술수다. 모든 교회 직분자들, 특히 장로는 교회의 파수꾼이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말씀을 잘 알고 말씀에 민감한 자만이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다. 장로가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교회가 산다. 장로로서 교회를 말씀대로 세우고 싶다면 우선 성경과 신앙고백에 정통해야 한다. 배움에 게으른 장로의 교회는 희망적일 수 없다.
신자들에게 세상적인 시기심과 질투심이 죽고 성경적인 상호존중심이 살아난다면 교회의 직분자 선출은 욕망과 갈등과 분쟁으로 얼룩진 이전투구의 장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겸손과 축복과 화평으로 충만한 축제의 장이 될 것이다. 가르치고 다스리는 장로의 직분은 교회의 꽃이자 기둥이다. 모든 성도들이 존경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길, 교회를 반석위에 세우는 든든한 기둥으로 서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