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대립의 미로 (The labyrinth of contrapositions)
확실히 커다란 신비, 즉 인간, 그 불가해성을 풀어보자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는 일찍이 해결되어 질 수 없다는 것과, 만일 우리가 해결을 얻었다 하더라고 우리에게 거의 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더 믿으려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간의 능력과 성향으로 풀 수 없는 실타래(web)로 부터, 몇몇 사실들을 푸는 것이며, 그것에 관해 작은 빛을 비추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자신에 대하여 말할 때, 때때로 그 자신의 이성을 자신의 마음 혹은 감정에 대립시켜 놓는다. 우리의 감정은, 소위 우리에게 이것 혹은 저것을 하도록 말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우리에게 완전히 정반대되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의미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감정이 선한 어떤 것에 기울거나, 혹은, 적어도 포용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에 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가진 인간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쉽다. 관대하고 진심어린 것은 덕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문제를 자세히(closely) 본다면, 이러한 감정은 종종, 동경, 돕고자하는 소망, 우정과 친절을 갑자기 충동시킬 수 있다. 이것에 반해, 우리의 이성은 방어하는 능력과 효력, 일종의 자기방어로써 작용하며, 선행 안에서 우리를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자극함으로써 작용한다.
그것은 대략 이성과 감정이 대립하는 실이다.
그 가느다란 실(that little thread)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우리는 곧 그것 안에 많은 자기기만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왜냐하면 마음, 그 위대하고 동정적인(compassionate) 마음이, 실제로는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거의 그만큼 관대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종종 그 마음이 깨어있을 때 보다는, 잠들어 있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것은 매우 까다롭고(difficult) 불쾌한 특성들(qualities)을 가진다. 그 마음 안에 자신의 이웃을 향한 사랑과 도우려는 의지의 자발적 충돌과는 다른 흐름(currents)이 함께 순환한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몰래 들여다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감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면 우리를 향한 존경심은 실제적인 타격(blow)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약간의 게임을 해왔다. 즉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잠재워왔고, 실제적인 자아의 깊은 곳을 감추어왔다.
그러면 이성에 관하여는 무엇이라고 말 할 것인가? 인간이 지성을 개발할 때, 일반적으로 이것은, 계산되어진 자기보존(self-preservation)이라는 점에서, 결국 그에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기주의(egoism)의 견고한 입장을 취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소위 그 지성의 배후에는 마음이라는 거대한 조각(a big piece of heart)이 숨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방금 토론해온 그런 관대한 마음이 아니라, 냉담함(callousness)과 자애(self-love)의 가증한(hideous) 마음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종종 삶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작동시켜 온 그 가느다란 실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일종의 우리 자신의 희열(fantasy)의 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위태로운 상황을 묘사한 진실한 그림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인간 속에 대립되는 것들(contrapositions)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대립들은 그것들을 마음이나 이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존재한다. 우리 자신의 내적 자아 안에서 고독하며 초라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나 연합에로 몰아간다고 느끼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identify)를 간직하려는 끊을 수 없는 욕망 안에 스스로를 세워두고 지키며, 자기부정(self-denial)과 자기비하(self-humility)에로 움직이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과의 대립이 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양떼(herds of sheep)로서 몰린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이기주의와 완고한 자기사랑의 쐐기에 의해 분리되어진다. 우리는 서로, 매 순간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기쁘게 그리고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조직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장 깊이 감동시키는 것들에 관해 계속해서 서로를 무지한 상태로 방치하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자기영화(self-glorification)의 환각과 압력(ban)아래서, 우리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립이다. 인간의 교제에 공허와 허무를 제공하는 가혹하고도 깊은 하나의 대립이다.
여전히 또 다른 대립이 있는데, 즉 우리의 동료들을 존경하는 우리의 내적 충동과 질서의 의미에 상반되는, 욕망과 정욕이 억제되지 않는 삶을 열망하는 것이다. 때때로, 모든 통제와 절제를 파괴하고 스스로를 야수성(bestiality)에 뿌리내리도록 내맡기며, 진짜 시궁창(very putter)에도 내려가는 무의미한 욕망이 인간 속에서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그의 이웃이 그의 삶에 대하여 단 하나의 결점도 발견할 수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은 우리의 세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들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매우 극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대립이다.
그리고 세 번째 대립이 있는데 즉 두려움(fear)과 명랑함(cheerfulness)의 대립이다. 불분명하고 숨어 있는 두려움(crytic fear)은 마음을 갉아먹을 수 있으며, 매일 아침, 자신의 얼굴을 세상을 향해 명랑한체 하는 것을 무디게 할 수 있다. 악몽속에서 그러한 두려움은 내적으로 그를 좀먹고 지치게 하는, 견딜 수 없는 비탄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궁핍과 비참한 생활속에 있는 그와 같은 다년간 유쾌한 무관심(lighthearted unconcer 대립의 미로 The labyrinth of contrapositions)
확실히 커다란 신비, 즉 인간, 그 불가해성을 풀어보자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는 일찍이 해결되어 질 수 없다는 것과, 만일 우리가 해결을 얻었다 하더라고 우리에게 거의 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더 믿으려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간의 능력과 성향으로 풀 수 없는 실타래(web)로 부터, 몇몇 사실들을 푸는 것이며, 그것에 관해 작은 빛을 비추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자신에 대하여 말할 때, 때때로 그 자신의 이성을 자신의 마음 혹은 감정에 대립시켜 놓는다. 우리의 감정은, 소위 우리에게 이것 혹은 저것을 하도록 말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우리에게 완전히 정반대되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의미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감정이 선한 어떤 것에 기울거나, 혹은, 적어도 포용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에 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가진 인간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쉽다. 관대하고 진심어린 것은 덕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문제를 자세히(closely) 본다면, 이러한 감정은 종종, 동경, 돕고자하는 소망, 우정과 친절을 갑자기 충동시킬 수 있다. 이것에 반해, 우리의 이성은 방어하는 능력과 효력, 일종의 자기방어로써 작용하며, 선행 안에서 우리를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자극함으로써 작용한다.
그것은 대략 이성과 감정이 대립하는 실이다.
그 가느다란 실(that little thread)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우리는 곧 그것 안에 많은 자기기만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왜냐하면 마음, 그 위대하고 동정적인(compassionate) 마음이, 실제로는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거의 그만큼 관대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종종 그 마음이 깨어있을 때 보다는, 잠들어 있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것은 매우 까다롭고(difficult) 불쾌한 특성들(qualities)을 가진다. 그 마음 안에 자신의 이웃을 향한 사랑과 도우려는 의지의 자발적 충돌과는 다른 흐름(currents)이 함께 순환한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몰래 들여다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감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면 우리를 향한 존경심은 실제적인 타격(blow)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약간의 게임을 해왔다. 즉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잠재워왔고, 실제적인 자아의 깊은 곳을 감추어왔다.
그러면 이성에 관하여는 무엇이라고 말 할 것인가? 인간이 지성을 개발할 때, 일반적으로 이것은, 계산되어진 자기보존(self-preservation)이라는 점에서, 결국 그에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기주의(egoism)의 견고한 입장을 취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소위 그 지성의 배후에는 마음이라는 거대한 조각(a big piece of heart)이 숨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방금 토론해온 그런 관대한 마음이 아니라, 냉담함(callousness)과 자애(self-love)의 가증한(hideous) 마음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종종 삶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작동시켜 온 그 가느다란 실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일종의 우리 자신의 희열(fantasy)의 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위태로운 상황을 묘사한 진실한 그림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인간 속에 대립되는 것들(contrapositions)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대립들은 그것들을 마음이나 이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존재한다. 우리 자신의 내적 자아 안에서 고독하며 초라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나 연합에로 몰아간다고 느끼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identify)를 간직하려는 끊을 수 없는 욕망 안에 스스로를 세워두고 지키며, 자기부정(self-denial)과 자기비하(self-humility)에로 움직이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과의 대립이 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양떼(herds of sheep)로서 몰린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이기주의와 완고한 자기사랑의 쐐기에 의해 분리되어진다. 우리는 서로, 매 순간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기쁘게 그리고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조직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장 깊이 감동시키는 것들에 관해 계속해서 서로를 무지한 상태로 방치하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자기영화(self-glorification)의 환각과 압력(ban)아래서, 우리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립이다. 인간의 교제에 공허와 허무를 제공하는 가혹하고도 깊은 하나의 대립이다.
여전히 또 다른 대립이 있는데, 즉 우리의 동료들을 존경하는 우리의 내적 충동과 질서의 의미에 상반되는, 욕망과 정욕이 억제되지 않는 삶을 열망하는 것이다. 때때로, 모든 통제와 절제를 파괴하고 스스로를 야수성(bestiality)에 뿌리내리도록 내맡기며, 진짜 시궁창(very putter)에도 내려가는 무의미한 욕망이 인간 속에서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그의 이웃이 그의 삶에 대하여 단 하나의 결점도 발견할 수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은 우리의 세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들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매우 극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대립이다.
그리고 세 번째 대립이 있는데 즉 두려움(fear)과 명랑함(cheerfulness)의 대립이다. 불분명하고 숨어 있는 두려움(crytic fear)은 마음을 갉아먹을 수 있으며, 매일 아침, 자신의 얼굴을 세상을 향해 명랑한체 하는 것을 무디게 할 수 있다. 악몽속에서 그러한 두려움은 내적으로 그를 좀먹고 지치게 하는, 견딜 수 없는 비탄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궁핍과 비참한 생활속에 있는 그와 같은 다년간 유쾌한 무관심(lighthearted unconcern)의 희극을 연출할 수 있다. 원상으로 회복시키는데 대한 두려움, 그의 행복의 조그마한 구조가 어느 날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가 알고 있고 자신 속에 있는 짐승 같은 잠재성이 어느 날 자신을 폐허의 가장자리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자신의 무의미함을 냉정하게 발견하는데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신(God)에 대한 두려움 - 인간 내면에 숨어 살고 있는 그러한 모든 어둡고 칙칙한 두려움은 농담(banter)과 유쾌함(lightheartedness)의 형식으로 덮여있다.
이것은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의 삶에, 어두운 운명을 위협적으로 드리우는 하나의 대립이다. 참으로, 우리가 인간이라 부르는, 빠져나올 수 없는 실타래의 모든 극미한 실들을 잡아당기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새로운 대립들 앞에 서게 되며,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우리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것이 얼마나 소망없는 일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나는 내가 전에 읽어본 한 이야기를 기억한다. 존재 자체가 모두 복잡하여 인간은, 하나의 국회와 비교되었다. 그 국회에는 많은 정당들이 있다. 논쟁과 토론의 혼란 속에서 그 정당들은 대담하고도 공격적이 된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에 어떤 한 지도자가 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는 의사봉을 취하고는 “내가 정부다”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당파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마치 모든 입법권과 행정권이 그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야기는 인간의 삶의 가변성(fickleness)과 불확정성(uncertainty)에 관한 조명이다.
우리를 개인적으로 미완성인채로 남겨두는 환경의 힘에 의해, 그리고 우리를 명령하는 강제적인 힘에 의해, 삶은 어느 정도 안정된 균형 속에 유지되어 진다. 겉으로는, 인간의 사건들 속에 하나의 동일성과 정해진 그리고 확고한 보폭(pace)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세계를 뒤흔드는 사건들의 폭풍으로 모든 닻들이 느슨하게 끊겨져 나갈 때, 그때 우리는 이러한 모든 힘들의 사나움과 무서움을 깨닫기 시작하며,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수수께끼 앞에 다시 서게 되는 것이다.n)의 희극을 연출할 수 있다. 원상으로 회복시키는데 대한 두려움, 그의 행복의 조그마한 구조가 어느 날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가 알고 있고 자신 속에 있는 짐승 같은 잠재성이 어느 날 자신을 폐허의 가장자리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자신의 무의미함을 냉정하게 발견하는데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신(God)에 대한 두려움 - 인간 내면에 숨어 살고 있는 그러한 모든 어둡고 칙칙한 두려움은 농담(banter)과 유쾌함(lightheartedness)의 형식으로 덮여있다.
이것은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의 삶에, 어두운 운명을 위협적으로 드리우는 하나의 대립이다. 참으로, 우리가 인간이라 부르는, 빠져나올 수 없는 실타래의 모든 극미한 실들을 잡아당기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새로운 대립들 앞에 서게 되며,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우리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것이 얼마나 소망없는 일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나는 내가 전에 읽어본 한 이야기를 기억한다. 존재 자체가 모두 복잡하여 인간은, 하나의 국회와 비교되었다. 그 국회에는 많은 정당들이 있다. 논쟁과 토론의 혼란 속에서 그 정당들은 대담하고도 공격적이 된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에 어떤 한 지도자가 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는 의사봉을 취하고는 “내가 정부다”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당파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마치 모든 입법권과 행정권이 그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야기는 인간의 삶의 가변성(fickleness)과 불확정성(uncertainty)에 관한 조명이다.
우리를 개인적으로 미완성인채로 남겨두는 환경의 힘에 의해, 그리고 우리를 명령하는 강제적인 힘에 의해, 삶은 어느 정도 안정된 균형 속에 유지되어 진다. 겉으로는, 인간의 사건들 속에 하나의 동일성과 정해진 그리고 확고한 보폭(pace)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세계를 뒤흔드는 사건들의 폭풍으로 모든 닻들이 느슨하게 끊겨져 나갈 때, 그때 우리는 이러한 모든 힘들의 사나움과 무서움을 깨닫기 시작하며,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수수께끼 앞에 다시 서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