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자유와 계명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 1:9~11)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있어 선으로도 악으로도 규정할 수 없으며 금지도 명령도 할 수 없는, 따라서 인간 자신이 주권을 가지고 자유롭게 선택 또는 거부할 수 있는 어떤 “중립적인 일과 행위” 즉 ‘아디아포라’ (헬:adiaphora)를 인정할 수 있느냐?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호소하여 신앙생활에 있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행위들(술과 담배 등)은 각자가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여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에 있어 그러한 중립적인 영역이 인정될 때 사람들은 점차 도덕적인 방종으로 치닫게 되어 마침내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이 전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에서 명백하게 금지하지도 명령하지도 않은 일들, 한 가지 예를 들면 결혼을 하고 안하고 하는 문제는 각자가 자기들 나름대로 성경(고전 7:8~9)에 호소하여 자신들의 결정과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아디아포라’ 즉 인간이 주권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종의 윤리적인 중립 지대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주권자이시며,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참고; 마 22:37 이하)고 명령하고 있다. 인간은 크고 작은 일과 행위를 결정할 때 항상 하나님의 뜻과 법 아래에 있음을 겸손히 고백해야 한다. 따라서 비록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책임있는 삶의 한 부분이기에 우리가 주권자가 되어 마음대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해도 좋은 즉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 영역에 속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사실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다 선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속된 것은 없으되”(nothing is unclean in itself, 롬 14:14)라고 하였으며, 말씀과 기도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며” (딤전 4:4~5)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그 자체가 본래부터 불결하거나 또는 선도 악도 아닌 어떤 중립적인 것(아디아포라)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는 다만 “속되지 않은 것” 즉 “선한 것”만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 중에 받고 행함으로 그 모든 것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 되도록 해야할 책임을 가진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자신의 결혼문제를 각자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성경이 각 개인의 결혼을 개별적으로 명령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결정에 대해서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항상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는 가운데 책임 있는 선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라” 또는 “하지말라”는 명시적인 법 조항이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가 윤리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결정하여 행할 수 있는 허용된 것일지라도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가 또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가를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윤리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는 스스로 자신이 주권자가 되어 선도 악도 아닌 애매모호한 중립적인 회색지대에 서서 그 자유를 육체를 위한 방종의 기회를 삼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로 항상 하나님을 향하며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좇는 적극적인 자유를 행사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빌 1:9~11)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언제나 진실하고 허물없는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