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중간상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고후 5:8)

 

어린아이들이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지금 할머니는 땅 속에 있어요?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요?” 라고 계속 질문해 올 때 그들에게 분명한 위로의 대답을 주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이 충분한 대답을 주지 않기에 어떤 이들은 이 문제를 무시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성경의 다른 교훈과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 문제가 인간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한 슬픔을 안고 있는 신자들에게 있어 이 문제는 실제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바로 그 개인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죽은 자들이 처하여 있는 상태를 가리켜 ‘중간상태’ 라고 말한다. 로마 카톨릭은 이 기간과 관련하여 신자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더욱 정화되기 위해 가는 곳으로 ‘연옥’을 말한다. 그러나 이 ‘연옥설’은 전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으며, 다만 외경인 마카비후서(12:42~45)에 근거하여 죽은 자를 위한 속죄의 미사와 예물들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약속하셨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신 후 3일간 무덤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죽음 직후에 낙원에서의 만남은 불가능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 직전에 그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맡기신 것은 죽음 직후에 그 영혼이 낙원으로 가신 것을 확신하게 한다(눅 23:46, 참고; 고후 5:1~3). 무엇보다도 죽은 자를 위한 속죄의 미사와 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속죄 사역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침례주의자와 제칠일재림주의자(안식교) 등은 중간상태에서의 ‘영혼 수면설’을 주장한다. 개인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그 영혼은 무의식적인 수면상태에 들어가고, 부활하여 천국에서 그 영혼이 깨어날 때 비로소 인격적인 의식상태를 회복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에 죽음의 상태를 잠자는 것으로 묘사한 구절이 있다(마 9:24, 눅 8:52, 요 11:11~13, 행 7:59~60, 고전 15:6,18).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은 죽임이 마치 잠자는 것과 같이 신자들에게 일시적인 것임을 증거하고자 할 때 사용하신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성경은 명백하게 죽음과 부활의 중간기에 의식있는 인격적인 존재의 지속적인 생존을 증거하고 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 등장 인물이 실명으로 소개된 실제적 사건의 비유)에서 죽음 이후에 두 사람 모두 분명한 의식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죽음의 순간에 약속받은 낙원(눅 23:43)은 무의식적인 실존의 상태가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큰 기쁨과 복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무의식 상태가 아닌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빌 1:23, 고후 5:8) 있는 것을 그토록 열망하였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인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 우리를 의식 속에서 분명히 지켜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묵시를 통하여 죽은 자들의 영혼이 기도하고 경배하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계 6:9~11, 7:9~10). 칼빈은 죽음 이후에 불신자들도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히 10:27) 공포 속에서 잠을 이룰 수 없는 분명한 의식상태에 처할 것을 말하였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복합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마 10:28, 고전 7:34, 약 2:26) 항상 하나의 영육통일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사망 시에는 그 육체와 영혼이 일시적으로 분리된다. 바울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고후 5:8)을 말한 것은 분명히 인간은 그들의 현재의 육체를 떠나서도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살전 3:13, 4:14). 성경은 중간기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영혼”(마 10:28, 계 6:9) 또는 “영”(히 12:22~23, 벧전 3:18~20)이라는 단어는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신자의 영혼은 죽는 즉시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거룩에서 완전한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고, 육체는 최후의 부활을 기다리며 무덤 속에 머물게 된다. 이 중간상태에서 신자들은 주님이 임재하여 계시는 낙원 곧 천국에서 부활의 몸을 덧입기 이전의 잠정적인 상태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마지막 점검으로서 육체의 부활을 대망하고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을 죽음과 동시에 “하데스”(마 11:23, 16:18, 눅 16:19~31, 계 1:18) 곧 고통과 형벌의 장소로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중간상태와 관련하여 성경이 강조하는 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상태보다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와 그리스도와의 충만한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상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와 누리는 생명있는 연합과 고통이 죽음 이후 중간상태에서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뿐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서 보다 훨씬 더 밀착되고 풍요로울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사명을 가지고 살기는 하지만,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