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성찬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어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6~28)

 

루터는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화체설’을 부정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실재가 빵과 포도주의 실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그 떡과 포도주 안에, 아래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어느 정도 함께 임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에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와 본질이 임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그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찬식에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말을 반복하여 여러 번 사용하였고, 그 말의 “…이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은유적인 또는 상징적인 의미로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루터는 속성 전달의 교리에 의하여 신적인 편재성이 예수의 인성에 전달됨으로써 예수님의 몸과 피는 성찬식을 행하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쯔윙글리는 예수님께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제로 “이것은 나의 몸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예수님은 종종 상징적인 의미로서 “나는 문이다”, 또는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에게 있어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적으로 임재하는 것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다만 기념하는 것일 뿐이었다. 수찬자는 신앙 안에서 영적으로만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가 어떤 물질적인 실체로서 이루어진다는 로마 카톨릭과 루터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성찬은 하나의 단순한 기념식에 불과하다는 쯔윙글리의 추종자들인 재침례주의자들의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성찬에 대한 칼빈의 성경적인 이해는 “영적 실재설” 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 비록 물질적 의미로서는 아닐지라도 문명히 ‘실제적으로’(really) 또는 ‘참으로’(truly) 임재하신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 속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상 그러한 주장은 칼케돈 종교회의(주후 451)에서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을 분리하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서로 구별은 될 수 있지만 완전히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통일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몸을 가지신 예수님의 인성은 그의 신성과의 신비로운 완전한 통일성을 이루어 현재적으로는 하늘의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다. 비록 그 인성이 한 장소에 머물고 있으나 신인(God-man)으로서 제2위(位)되신 “전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인 편재성과 더불어 어느 한 장소에 매이지 아니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 가시면서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성에 속하는 몸과 피가 천국에 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자신의 신적 편재성과 더불어 그 신비로운 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보이실 수 있다. 예수님의 신성은 결코 그의 인성과 분리되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찬에서 자신의 신성으로 우리를 만나심으로써 동시에 우리를 신비롭게 자신의 인성 안으로도 능히 이끄실 수 있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의 신비로운 능력에 의하여 천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지상의 우리와의 신비로운 실제적인 연합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와의 이 신비로운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의 유익과 생명력을 새롭게 공급받아서 항상 함께 감사와 기쁨으로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연합의 신비는 이해할 수 있는 문제라기 보다는 믿음 안에서 체험하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