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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레슬리 뉴비긴,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김기현역, SFC, 2008)

- ‘공공의 진리’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인가? -

손성은목사(삼일교회, 부산)

 

1. 포스트모던사회의 수상해진 진리

'진리'가 수상해 졌다. '진리'의 자리에 '사실'이 대신 들어섰다. '진리'는 주관의 영역, 개인의 취향과 관계되는 것으로 사적인 영역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사실'은 과학의 영역, 학문의 대상이 되어 공적인 영역의 왕좌를 차지하였다. 이런 경향의 현대사회를 다원주의 사회, 혹은 포스트모던사회라고 한다. 이 사회에서는 절대적 객관적 진리를 우리 인간들이 알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이 현대사회의 전제에 의하면, 이런 절대적 진리의 추구는 르네상스 이후 경험하게 된 유럽사회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계몽주의사조에 근거하였다. 영미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은 모두 확실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몽주의 사조에 기인해서 귀납적 추론을 통한 과학연구가 성행하게 되었다. 그 과학에 의한 현대문명은 참으로 찬란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과학을 맹신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이 가져다 줄 것으로 보았던 인류의 행복은 묘연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오히려 그 과학 때문에 불행의 종착점을 향해서 돌진하면서 오히려 나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같기 때문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이전의 계몽주의사조가 지니고 있었던, 그 절대적 객관적 지식의 추구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답변한다. 이런 설명에 의하면, 근대에 시작되었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전투는 모두 계몽주의사조의 희생양이다. 보수주의나 자유주의나 모두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지식을 추구하였다. 보수주의는 그 확실성의 기초를 성경에 두어서 성경을 우상화시켰고, 자유주의는 이성의 기능에 그 절대성을 두어서 '역사적 예수'라는 허상을 추구하였다.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신기루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보수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두 진영간의 싸움은 어리석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제3의 대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배워야 할 겸손한 자신감이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바로 레슬리 뉴비긴(Leslie Newbigin, 1909~1998)이다. 그의 책들이 그의 서거를 필두로 해서 국내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심지어는 SFC에서조차도 그의 책을 번역, 출판하였다(레슬리 뉴비긴,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 그의 책들은 기독교의 진리가 여러 진리들 가운데 하나로서 치부될 수 밖에 없다는 좌절감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자신감을 부여해 준다. 실은 이것이 뉴비긴의 저술목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0장). 이러한 자신감은 '겸손한 자신감'이다. 이전의 절대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말미암는 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노릇하셨던 것을 본을 삼아서 세상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감이다. 그는 특별히 인도에서의 선교사경험을 토대로 해서 타종교인들에게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만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잘못임을 강조한다(레슬리 뉴비긴,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 숨쉬는 소망』, 5장). 그의 책들은 언제나 이렇게 현대의 문화선교적 상황을 감안하고 있다(Lesslie Newbigin, 『The Open Secret: An Introduction to the Theology of Mission』; 이 책에서 그는 '회심'조차도 문화를 고려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현대의 문화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과 나름대로의 대안들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부분들이 상당한 것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그가 제시하는 ‘제 3의 대안’은, 분명히 '신정통주의신학'임에 분명하다. 그가 오랫동안 WCC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논리전개는, 분명히 칼발트적이다. 그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 곧 절대적 지식의 추구에 대한 비판은, 칼빈과 칼빈의 후예들을 분리시키는 논리와 흡사하고,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17~8세기의 그 후예들을 분리시키는 논리와 너무 유사하다. 바로 칼빈의 후예들이나 종교개혁 이후의 정통주의신학들이 모두 이런 절대적 지식을 추구하여서, 교리와 신조 속에 하나님을 가두고 생명을 질식시켜버렸다고 바르트가 비판하고 있지 않는가? 생명을 질식시켜버렸다는 그의 비판에 귀기울인다고 해서 반드시 교리와 신조를 하나님을 가두는 것으로 비판할 필요가 없다.

레슬리 뉴비긴은 자신의 '제 3의 대안'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을 우상화시키고 있다고 한다.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에서 뉴비긴은, 보수주의자들의 성경에 대한 견해를 이렇게 묘사한다: "한편으로 성경을 인간의 주관성이 운신할 여지조차도 없는 객관적인 진리의 덩어리로 제시하려는 이들이 있다. 결과적으로 최초로 말해지거나 기록된 단어로부터 책이 실제로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기록되고, 수정되고, 편집되고, 선택되고, 번역되고, 인쇄되고, 출판되는 매 단계에 연루되는 인간의 주관성과 오류 가능한 요소들은 경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진정한 특성을 부인하는 것이다."(레슬리 뉴비긴,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 51) 이 견해를 보면, 그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의 주관성과 오류가능한 요소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것은 성경의 진정한 특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경의 진정한 특성은, 오류가능하다고 보는 셈이다. 이러한 오류가능성이 성경을 읽는 해석자의 주관성과 해석자의 오류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을 '기록한' 원저자의 주관성과 오류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의 말에 경계의식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한, 칼발트의 주장이 쉬 떠오르기 때문이다.

3. 공공의 진리는 영적인 진리인가?

이 책에서 뉴비긴은, '복음은 공공의 진리'라고 말한다. 진리가 밀려났던 사적 영역에서 공공의 자리로 나아와 그 마땅히 차지해야 할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면, 진리인 복음도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과학적 지식조차도, 절대로 절대적 지식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과학적 지식조차도 인격적 헌신(personal commitment)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헝가리의 과학철학자인,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yni, 1891~1976)의 『Personal Knowledge』에 근거한 것이다(Michael Polanyi, 『Personal Knowledge』). 뉴비긴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인용하고 있는 이 폴라니의 책은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지식에는 인격적 헌신(commitment)이 개입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 책임이 수반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인격적 헌신'이 과학적 지식에도 개입되어 있다면, 그 지식은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판단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축적해온 지식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끊임없는 상호비판과 견제를 통해서 이뤄지는 '과학공동체'(the republic of science)를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폴라니의 꿈이다.

뉴비긴은 이러한 폴라니의 '과학공동체' 모델을 포스트모던사회의 기독교인들에게 권한다. 그것은 '복음의 지식'도 오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함을 암시한다. 물론 복음의 지식에 오류가 있음을 주장한다고 해서 뉴비긴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상대주의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복음의 유일성,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를 '헌신된 다원주의자'(Committed Pluralist)라고 한다. 이 말은 '불가지론적 다원주의자'(Agnostic Pluralist)와 대조된다. 그에 따르면 '불가지론적 다원주의자'는 진리는 알 수 없고 상이한 신념과 형태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전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에 대조해서, 그에 의하면 '헌신된 다원주의자'는 '지식이란 순전히 객관적인 것도 그렇다고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인격적이고 책임있는 헌신으로 추구하고, 발견을 공적으로 진술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알 수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알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그에 의하면, 언제나 인격적 헌신으로 인하여 해석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능한 것이다.

그의 주장의 요점은 이렇다: 과학의 지식조차도 '인격적 헌신'이 개입되어서 오류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도 '인격적 헌신'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과학처럼, 지금까지 개인적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던 복음도 이제는 당당하게 그 공공의 자리에 명함을 내밀 수 있고, 또한 내밀어야 한다. 세상에 어떤 지식이 오류가능성을 부인할 수 있단 말이냐? 그렇게 주장하는 자는 감히 공공의 자리에 나아 올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언뜻 들으면, 지금까지 사적인 골방으로 쫓겨나서 공공의 영역으로의 권토중래의 호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척이나 반가운 메시지일 것이다. 공공의 시이저들에게 얼굴조차도 내밀지 못한 채로, 아낙네들의 뒤뜰에서 한담으로만 여겨져 왔던 복음이 이제는 떳떳이 학교에서도 연구실에서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니, 이전에 누렸던 만큼의 영광은 아닐지라도 이제는 똑같이 오류 많은 인생들로서 겸손하게 서로의 지식을 견주면서 경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거 감지덕지 감사할 일이 아니겠는가!

과연 그렇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가 말하듯 공공의 광장에서 복음의 주, 곧 예수 그리스도가 토론되고 논의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복음은 마땅히 공공의 진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과연 복음이 공공의 진리'이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공공의 진리이기 위해서 '인격적 헌신'이 개입된 오류가능한 여타 다른 진리들과 동등한 것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일까? 공공의 자리에 얼굴을 내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지덕지하게나마 우리의 복음의 공공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아프리카 오지의 어떤 소국가가 올림픽에 나와서 세계열강과 함께 나란히 자신들의 국기가 게양대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감격하는 그런 자부심을 우리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해야 우선은 경쟁을 할 수 있고, 1등국가로서의 면모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하는 논리를 우리는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예의인 것일까?

4. 구원의 확신은 어느 정도 가능한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구원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확신할 수 없는 것일까? 만일, 확신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 것이 교만이라고 치부해왔던 로마천주교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절대 오류가 없다고 할 정도로 확신을 갖는 것이 교만일까? 교만이지 않으면서 그런 오류없음의 확신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필자가 알기에는 전통적인 개신교가 주장해 온 것이 이런 입장이다(Louis Berkhof, The Assurance of Faith:The Firm Foundation of Christian Hope』, Ch.4.). 이것은 인간의 자기구원에 대한 확신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바로 찰스 핫지가 말하였던 '성령의 가르침'으로 가능한 확신이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 16-17). 인간의 해석학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바로 성령의 인쳐주심으로 인해서 가지게 되는 확신은, 결코 그 절대적 지식을 가지는 자로 하여금 교만케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4-15).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 그 어떤 것에 근거하여 절대적 지식을 절대로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구원의 확신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바울사도의 확신이 그런 확신이 아니던가? : "내가 확신하노니 ...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뉴비긴은 바울의 이런 절대적 확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바울사도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하게 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한 말을 바울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게 될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71). 하지만 이런 견해는 전통적인 개혁주의계열의 해석에 주의하지 못해서 갖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 바울의 두려움을 하나님에게 버림받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의 전파하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삶과 행동으로 인하여 복음에 누(累)가 되고 자신이 신실하지 못한 자로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John Calvin, 『The First Epistle of Paul to the Corinthians』, 199. 뉴비긴처럼 해석하게 되면 전통적인 개혁주의신앙의 요체들 중의 하나인, '성도의 견인'교리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게 된다. ). 바울사도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분명하고 절대적인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전통의 해석이다. 이런 해석이 뉴비긴 같은 '제3의 대안'을 제시하는 이들에 의해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5. 결론: 공사(公私)를 초월하는 영적인 진리로서의 복음

'제 3의 길'을 걸어야만 공공의 광장에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사도는, 훨씬 이전부터 그렇게 하였다. 그는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이 바라다 보이는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스토아 철학자나 에피큐리안철학자들과 더불어서 쟁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복음은, 공공의 광장에서의 논쟁과 변론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 아니다. 자신의 변론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행17:32). 바울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고전1:18). 공공의 광장에서의 변론을 통해서,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아무리 깊은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더라도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없다. 공공의 진리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 고백한다(고전2:4-5). 바울사도가 시이저에게까지 복음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공공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제시는 복음이 오류가능함을 가지고 있는 것인양 가장된 겸손으로 제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눈에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로되, 우리의 어리석은 전도를 통해서라도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되면, 듣는 이들의 눈과 귀를 열어서, 다른 세계, 다른 영역에 속한 전혀 다른 진리를 볼 수 있게 하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되 결코 교만하지 아니하게 하는, 그런 복음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결코 다른 진리들과 공공의 자리에서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공적이거나 사적인 영역을 모두 초월한, 영적인 영역에서 주어지는 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인 것이다.

이런 진리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어떤 사조가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풍조에 흔들리지 아니하면서 여전히 절대적인 진리로서 우리를 구원하는 진리인 것이다. 계몽주의사조에서도 이런 진리가 선포되었고, 포스트모던사회에서도 이런 진리가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수고에 기름부어주시는 이는 오직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공공의 자리에 아무리 우리의 복음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헛된 수고일 뿐이다.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포스트모던사회에서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바울사도의 말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기본자세여야 할 것이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