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자:  황대우

 

 

   

      빔 얀스(Wim Janse)는 네덜란드 레이든(Leiden) 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자유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계칼빈학회 회원이자 칼빈 저술 전집의 비평편집판 편집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특히 독일어로 작성된 그의 학위 논문 『신학자로서의 알베르트 하르던베르크: 한 사람의 부써 제자에 대한 인물평』(Albert Hardenberg als Theologe. Profil eines Bucer-Schülers)은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출판사 브릴(E. J. Brill)에서 1994년에 “기독교 사상사 연구”(Studies in the History of Christian Thought)라는 시리즈 57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논문의 지도교수는 네덜란드 기독교개혁교단 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였던 빌름 판 엇 스페이커르(Willem van 't Spijker) 박사이며 그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은 제자들 가운데 최고의 성적인 쿰 라우데(Cum laude) 성적을 받은 논문은 유일하게 이것뿐이다. 현재 세계칼빈학회의 젊은 회장인 셀더르하위스(Selderhuis) 교수도 판 엇 스페이커르 교수에게서 우수한 논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다. 스페이커르 교수의 한국 제자도 두 명 있는데 장신 측의 최윤배 박사와 고신 측의 황대우 박사가 그들이다. 얀스 박사의 학위논문을 지도한 부지도교수는 세계칼빈학회를 조직하고 은퇴할 때까지 회장으로 봉사한 독일 뮌스터(Münster) 대학교의 교회사 교수 빌헬름 노이저(Wilhelm Neuser) 박사이다. 빔 얀스는 2007년에 아시아칼빈학회의 주강사로 초빙되어 칼빈의 성례론을 주제로 강의했고 그 해에 한국 고신대학교에서도 두 편의 논문, 즉 칼빈과 루터주의자 오아킴 베스트팔(Joachim Westphal) 사이의 유아세례 논쟁을 다룬 논문과 베스트랄의 성례론을 다룬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빔 얀스의 책은 브레멘(Bremen)과 엠덴(Emden)의 종교개혁자 하르던베르크를 연구한 학위논문이다. 하르던베르크는 네덜란드 오벌에이설(Overijssel) 주에 속한 암트-하르던베르크(Ambt-Hardenberg) 지역의 레이즈(Rheeze)라는 마을에서 약 1510년에 태어났다. 1527년부터 약 1530년 사이에, 그리고 1540년부터 약 1542년 사이에 아듀아르트(Aduard)에 있는 시토(Citeaux = Cistercian) 수도회 수도사로 생활했다. 1530년경에 루뱅(Louvain)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1539년에는 마인츠(Mainz)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543년에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1544년에는 쾰른(Köln)의 대주교 헤르만 폰 비트(Hermann von Wied)의 신학 자문관 역할을 맡기도 했고 1547년에는 쉬말칼트(Schmalkald) 전쟁에서 군목 사역을 하기도 했다. 1547-1561년 사이에는 브레멘에서, 1564년 말 혹은 1565년 초에서 1567년 사이에는 쟁바덴(Sengwarden. 오늘날에는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에 해당함)에서, 그리고 1567-1574년 사이에는 엠덴에서 목사로 사역했다. 1547년에 흐로닝언(Groningen)에 있는 버헤인수녀회(begijn) 소속 수녀 트라위처 세이싱어(Truytje Syssinge)와 결혼했으며 1574년 엠덴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르던베르크는 마인츠에서 공부할 때부터 존 아 라스코(John à Lasco)를 알게 되었고 아 라스코와 필립 멜랑흐톤(Philip Melanchthon) 등의 권유로 1542년 내지 1543년에 수도회를 떠남으로써 로마교회와 절교하게 되었다. 이후 멜랑흐톤에게서 공부한 다음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써(Martun Bucer)의 소개로 쾰른의 종교개혁을 도왔다. 그가 부써의 라틴어 저술 2개를 번역한 이후로는 부써의 추종자로 간주되었다.

   

   얀스의 학위논문은 삼중적인 접근 방법, 즉 하르던베르크의 생애를 다룬 역사적 접근, 그의 신학을 다룬 교리적 접근,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그의 신학을 비교 연구한 교리사적 접근을 통해 하르던베르크의 신학을 연구한 것이다. 이 논문의 우수성은 하르던베르크의 모든 종교개혁 활동뿐만 아니라 50개가 넘는 그의 저술과 340통의 편지까지 샅샅이 조사함으로써 몰트만(Jürgen Moltmann) 이후 정설로 여겨져 오던, 하르던베르크가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자 멜랑흐톤의 제자 내지는 숨겨진 칼빈주의자(Krypto-Calvinist)라는 주장을 뒤집어엎고 그가 마르틴 부써의 제자라고 결론 내린 점이다. 특별히 이런 결론을 내린 결정적인 근거로 얀스 박사는 종교개혁 당시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가장 첨예한 대립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성찬론을 든다. 즉 하르던베르크의 성찬론은 다른 어떤 개혁자의 그것보다 부써의 성찬론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얀스는 브레멘의 개혁자가 개혁적 성향의 인문주의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철학적인 주석을 했고 급진주의를 반대했으며, 그의 은혜 교리는 멜랑흐톤에게서, 구원의 보편성 교리는 츠빙글리(Zwingli)에게서, 예정론과 재세례파에 대한 견해는 불링거(Bullinger)에게서, 성령론은 칼빈에게서 각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얀스는 하르던베르크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그를 부써의 제자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얀스 논문의 결론을 요약한 것이다.

 

   하르던베르크는 멜랑흐톤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친구이긴 했지만 그의 수구적 자세에 대해서는 혹평하기도 했다. 하르던베르크가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 변형 해설서에서 말하는 멜랑흐톤의 칭의론과 성례론에 동의하는 것은 그 자신의 성령론적 현현을 강조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고, 또한 믿음이 필수적이며 영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방해가 되지도 않는다.

  하르던베르크는 멜랑흐톤의 제자에서 칼빈주의로, 그리고 독일 개혁 교단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의미하는 숨겨진 칼빈주의(Krypto-calvinismus)도, 소위 “두 번째 종교개혁”(zweiten Reformation)이라는 운동의 핵심인물도 아니다. 즉 몰트만(Moltmann)은 하르던베르크를 멜랑흐톤의 제자로서 멜랑흐톤의 후기 모습에서 칼빈주의 개혁교단으로 넘어간 인물로 보지만 사실은 반대로 하르던베르크가 멜랑흐톤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에는 그의 성찬론 뿐만 아니라 성찬기독론(Abendmahls)이ristologie)에 개혁주의적인 개념뿐만 입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60ltm멜랑흐톤은 그의 성찬론에 믿음이 전제되어|m한다는 것과 영적 임재를 받아들이고 1557lt는 “칼빈적인 초월”(E앸간 인 Calvinsticum) 개념뿐만받아들씀니라 멜랑흐톤의 성찬기독론에서 수용된 개혁주의적인 요소를 “칼빈적 초월”이라는 용어 보다는 오히려 “하르던베르크적인 것”(H멜랑denbergianum)이라는 용어로 정의하는 것이 더 낫니라 명백한 사실은 하르던베르크가 멜랑흐톤으로 하여금 결국에는 성찬론에서 반-순수루터주의적 입장(anti-gnesiolutherischen Stellungnahme)으로 돌아서도록 만든 인물이라는 점이다.

하르던베르크는 결코 루터주의 신앙고백과 개혁주의 신앙고백 사이의 연속성에 대해 논하지 않고 오히려 가능한 많이 루터에게 호소하는데, 즉 부써의 스타일에서처럼 일치신조 해설에 나타난 루터에게 호소한다. 몰트만은 루터가 하르던베르크에게 이질적이어야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역사적인 불가사의이다.

 

   하르던베르크가 멜랑흐톤의 제자가 아니라면 베셀 한스포르트(Wessel Gansfort)와 에라스무스(Erasmus)에 의해 그의 성찬론에 각인된 스위스 종교개혁의 인문주의적 추종자도 아니다. 하르던베르크가 인문주의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이라는 그룹에서 가르쳐진 인문주의적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가 인문주의자이긴 하지만 그의 성찬론은 에라스무스의 것도 베셀의 것도 아니다. 베셀의 영성화(Spiritualisierung)가 하르던베르크에게 어거스틴 전통에 대한 눈을 뜨도록 해 주었고 에라스무스가 그를 교부의 원전으로 안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 견해 사이의 차이점은 영성주의(Spiritualismus)와 성령론(Pneumatologie) 사이의 차이, 즉 정신인 것(geistig)과 영적인 것(geistlich)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하르던베르크는 멜랑흐톤의 제자가 아닌 것처럼 또한 츠빙글리(Zwingli)나 불링거(Bullinger)의 제자도 아니다. 하르던베르크가 취리히(Zürich)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신지식과 선택된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그의 견해를 츠빙글리에게서 빌려오고 그의 예정론과 그의 신학적인 세례론 논박을 불링거에게서 빌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의 심장에 해당하는 성찬론에서는 그런 영향을 찾아 볼 수 없다. 상징적 도구주의(ein symbolischer Instrumentalismus)는 하르던베르크를 츠빙글리의 상징적 기념설(der symbolische Memorialismus)과도 불링거의 상징적 수평설(der symbolische Parallelismus)과도 대립시킨다. 선물의 성격이 선행한다. 즉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substantia)의 나타남(exhibitio)과 참여(participatio)가 기념(recordatio)과 봉인(obsignatio)의 자리를 대신하는데, 불링거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몸이 본질적으로 나타나고 참여한다는 개념을 거부한다. “영과 혼과 몸”에 예수의 본질적인 육신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하르던베르크의 교리에 “영성주의적”(spiritualistisch)이라는 형용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한 성령에 의해 나타난다(pneumatologisch-exhibitive)는 하르던베르크의 성찬 이해는 불링거에게 영향을 받은 아 라스코(a Lasco)의 성찬론과 처음부터 다른 것이었다.

    하르던베르크가 비텐베르크와 취리히 사이의 중도를 걸어간 칼빈과 같은 인물로 보는 견해는 교리사적인 뉘앙스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르던베레크가 1548년에 작성한 자신의 브레멘 성찬고백서 초판에서 칼빈이 연합을 위해 쓴 소논문 “거룩한 성찬에 관한 소논문”(Petit traicté de la saincte cene)으로부터 주요부분을 빌어온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칼빈의 제자는 아니다. 이런 현저한 표절은 영적인 친밀성(Geistesverwandtschaft)을 나타내는 것이지, 다른 접촉이나 언급이나 회상이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스승과 제자의 관계(Meister-Schüler-Verhältnis)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몰트만 이후 통상 하르던베르크를 숨겨진 칼빈주의로 분류해 온 것은 하르던베르크의 교리 개념이 가진 비루터적인 특성이 거의 “숨겨진”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1555년의 법적인 보호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대성당 설교자는 결코 자신의 견해를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것으로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 칼빈주의적인 사상을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숨겨진 칼빈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르던베르크의 대적자 티만(Timann)이 그를 교회연합에 친근한 신학자들, 즉 멜랑흐톤, 브렌츠(Brenz), 부써, 무스쿨루스(Musculus)와 함께 분류했는데 이러한 분류는 근거 있는 심사숙고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하르던베르크를 당대의 어떤 책략가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하르던베르크는 숨기는 일을 좋아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그 자신의 무기를 가진 실행자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하르던베르크가 부써에게 호소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가 부써의 가장 덜 정치책략적인 권위를 사용하려고 노력한 것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계속해서 부써에게 의존했다. 그는 부써의 번역자로서 1544년 가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가진 긴밀한 만남과 그 이후의 짧은 관계를 통해 라인강 지역에서 부써의 대표자와 종교 정치적 전진기지로, 비텐베르크와 취리히 사이의 중재자로, 그리고 온전히 부써의 추종 신학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하르던베르크가 부써의 여러 저술들을 통해 부써의 성령론적인 성찬관을 매우 공개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언급한 것을 사실이다. 이것은 스트라스부르 개혁자의 신학과 내적인 친밀성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부써 신학과의 이런 내적 친밀성은 비단 하르던베르크의 성찬론에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브레멘 개혁자가 부써의 저술 가운데 “요약적 개념”(Summarischer vergriff)을 1556년에 낮은 독일지방(서북쪽 독일과 여기에 근접한 네덜란드 지역) 언어인 니덜도이취(niederdeutsch)로 번역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성찬론 문단이 브레멘 성찬론 논쟁의 기폭제로 작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써 신학과의 긴밀성은 하르던베르크의 신학 전반에 걸친 개념에서도 표현된다. 특히 계시와 삼위일체에 관한 그의 견해와 기독론 일부에 대한 견해, 그리고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화, 및 율법과 실천적 삼단론법(syllogismus practicus)을 포함한 구원론에 대한 견해,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주제에 대한 견해,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직분과 치리를 다루는 교회론과 성례론과 세례에 대한 견해에서 두드러진다. 부써와 마찬가지로 하르던베르크 역시 자신의 신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을 어거스틴주의(Augustinismus)에서 찾았으며 외적인 수단에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했고 성령론을 강조했다.

   

   하르던베르크의 신학적 독립성은 결혼과 정부 권력의 합법성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브렌츠의 무소부재 개념(Ubiquitätsbegriff. 역주: 부활하신 그리스도 몸은 하늘과 땅 세상 곳곳 어디든지 계실 수 있다는 루터주의적 성찬론에 나타나는 기독론)에 반대하여 세운 성찬기독론에서 잘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는 고대교회의 기독론과 스콜라적 기독론을 독립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칼빈주의적 초월”(Extra Calvinsticum. 얀스가 이것보다 더 선호하는 개념은 “하르던베르크적”(Hardenbergianum)이라는 용어다.) 개념을 발전시켰다. 브레멘과 그 외 독일 북부 지역의 루터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도록 각성시킨 사람은 멜랑흐톤이 아니라 하르던베르크였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과 각성이 독일 개혁 교회의 형성을 가속화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