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종교개혁이 최초로 발생한 곳

작성자: 황대우

누군가 우리에게 최초의 개혁주의 종교개혁 도시가 어디인지를 묻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도시 스위스 제네바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제네바가 종교개혁을 수용하기 약 15년 전에 이미 종교개혁으로 물들기 시작한 도시가 있는데, 그곳은 스위스 취리히(Zürich)다. 도시 취리히는 취리히 주의 수도로서 스위스의 북쪽의 상단에 위치해 있는데, 스위스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스위스 서쪽 끝에 있는 도시 제네바와는 지리상 먼 곳이다. 그리고 취리히와 제네바 사이에 있는 베른이라는 큰 도시에 의해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취리히의 종교개혁이 제네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스위스 취리히 주의 수도인 취리히는 1218년에 대도시로 성장했는데, 스위스 동맹에 가입한 것은 1352년이다. 1353년에는 베른(Bern)도 이 동맹에 가입했는데, 16세기 초에는 스위스 13개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들이 가입한 상태였다. 이 스위스 동맹은 오늘날 스위스라는 중립 국가를 형성하게 된 전신으로, 1499년 바젤 평화조약에 의해 대외적으로 실질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최초의 개혁파 종교개혁 도시 취리히는 단순히 교회만 개혁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개혁하는 일에 성공했다. 물론 이러한 도시 전체의 개혁이 비단 취리히만의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취리히가 가장 이른 시기에 그와 같은 개혁을 시도하였으므로 사회 전반의 개혁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취리히 개혁의 선두주자는 취리히의 종교개혁가로 알려진 훌드리히 츠빙글리(Hulrych Zwingli. 1484-1531)다. 훌드리히는 울리히(Ulrich)라고도 불린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두 가지 면에서 유명하다. 첫 번째로는 그가 루터와는 달리, 개혁 초기부터 제도적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그가 중세교회의 ‘보는 예배’ 대신에, 새로운 형식의 ‘듣는 예배’를 도입한 선구자라는 점이다. 츠빙글리는 예배 개혁을 위해 강해 설교 형식의 설교를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음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최초의 종교개혁자로 간주될 수 있다.

츠빙글리는 1518년 연말에 취리히 대성당을 담당하는 사제로 청빙 받은 후, 1519년 1월 1일, 그의 35번째 생일에 자신의 첫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 다음 날 그가 설교를 위해 선택한 성경본문은 마태복음 1장이었다. 이후 설교시간마다 그는 이전에 설교한 그 다음 본문을 선택하여 마태복음 마지막장을 끝낼 때까지 연속적으로 설교함으로써 새로운 설교 형식을 도입했다. 이렇게 시작된 새로운 설교 형식을 ‘연속 읽기’(lectio continua)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강해 설교’의 원형이다. ‘연속 읽기’란 성경 각 권을 선택하여 1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연속적으로 강해 설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시 중세 전통의 보편적인 설교 형식, 즉 수도원 전통에 따른 ‘경건한 읽기’(lectio divina. 혹은 lectio sacra) 형식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교회에서는 사제가 1년 동안 읽을 성경 본문이 교회력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이런 설교 형식은 오늘날 주제 설교와 유사하다. 취리히 개혁자는 중세교회의 수도원적인 설교형식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새로운 설교 형식, 즉 선택된 성경 각 권을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연속적으로 강해 설교하는 ‘연속 읽기’를 도입했던 것이다.

‘연속 강해’라는 새로운 설교 형식을 도입한 취리히교회의 예배는 오늘날 모든 개신교가 드리는 말씀 중심의 예배, 즉 설교 중심의 예배로 발전하게 되었다. 츠빙글리가 받은 인문주의 교육, 특히 수사학은 이런 새로운 형식의 강해 설교를 더욱 빛나게 했다. 츠빙글리는 이런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위해 예배 시간에 어떤 종류의 음악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사실 그는 다재다능한 천부적 음악가였다. 그는 어릴 때 이미 성악과 기악을 공부하여 현악기와 관악기뿐만 아니라, 북도 칠 줄 알았으며, 심지어 작사와 작곡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왜 이처럼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취리히 개혁가 츠빙글리는, 자신의 입으로 ‘새로운 엘리야’라고 칭송한 비텐베르크의 개혁가 루터와 달리, 예배에 음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일까? 예배에 음악사용을 금지한 것은 아마도 그가 예배의 중심을 말씀, 즉 설교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음악이 말씀 중심의 새로운 예배 형식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즉 예배 참여자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 즉 오직 하나님의 음성만 선명하게 듣도록 하기 위해 아름다운 음악조차도 인간적인 요소로 간주하여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취리히 시의회는 츠빙글리가 도입한 새로운 설교 형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래서 시의회는 1520년에 오직 성경에 따른 설교만 하도록 결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취리히 종교개혁을 위해 시의회가 주도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시의회의 지지에 힘입어 취리히 개혁가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예컨대 면죄부, 성인 숭배, 십일조, 사순절 금식규례 등과 같은 교리와 관습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함으로써 교회 개혁을 호소했을 뿐만 아니라, 스위스 용병제도와 같은 국가적 문제에 대해서도 망설임 없이 공격함으로써 스위스 연맹 전체의 사회적 개혁을 추구했던 것이다. 물론 츠빙글리의 취리히 개혁이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조롭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1522년 3월, 취리히에서 발생한 소시지 사건은 취리히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소시지 사건이란 레오 유트(Leo Jud)를 비롯하여 츠빙글리의 개혁에 동조하는 몇몇 사람들이 인쇄업자 크리스토프 프로샤우어(Christoph Froschauer)의 집에 모였을 때, 사순절 기간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한 금식규정을 고의로 어긴 것이다. 츠빙글리도 그들과 함께 그 곳에 있었지만 소시지를 먹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회가 이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그는 곧 사순절 금식규례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라고 설교함으로써 동료들의 행동을 지지했다. 이 설교는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1522년 4월 16일에 출판되었다.

츠빙글리는 교회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까지도 모두 성경의 가르침을 그 해결 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는 당시 최고로 여겼던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발이었기 때문에 많은 천주교도들과 수도사들이 반발했고, 이로 인해 1523년 1월 29일 취리히 1차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참석자가 600명 이상이었던 이 토론회를 위해 츠빙글리는 자신의 <67개 조항>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취리히 종교개혁의 바로미터와 방향타가 되었다. 물론 취리히 종교개혁의 결정적 완성은 1525년의 미사 폐지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츠빙글리의 <67개 조항>을, 면죄부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한 루터의 <95개 조항>과 비교하면서, “교회적이며 개인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모든 개혁 프로그램을 포괄하는 것”으로 “독일어로 그의 신학을 가장 폭넓게 다룬 책”이라고 적절하게 평가했다. <67개 조항>의 주장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거나 금하지 않으신 것은 모두 옳은 것이다.” “불의하게 모은 재산을 성전이나 수도원이나 대성당이나 성직자나 여수도사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거스르는 명령을 하지 않는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 하나님의 성경은 이생 후에 연옥에 관하여 전혀 모른다.” 등등.

<67개 조항>에서 무엇보다도 강조되는 것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와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시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구원이시요, 그의 몸인 모든 믿는 자들의 머리시다. 그가 없이는 모두가 죽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머리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고 평이하게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하나님께 이끌리고 변화함을 받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므로, 자신들을 대제사장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예와 권세를 반대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등등.

개혁주의 종교개혁의 발원지, 취리히는 츠빙글리의 가르침을 따라 말씀과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닌 교회를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처럼 여긴 말씀의 권위, 설교의 권위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어버린 오늘날 모든 개신교회는 결코 종교개혁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기 위해 모든 인간적인 장치를 배제하려고 노력했던 취리히교회의 조촐한 예배 모습과,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아 보이는 인간적인 요소들을 가능한 많이 예배 속에 들여놓은 오늘 우리의 화려한 예배 분위기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다. 물론 16세기 종교개혁의 모든 것을 모판처럼 21세기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만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종교개혁의 원리와 신앙 원칙마저 무시하거나 포기한다면 훨씬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위 글은 <생명나무>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