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운동과 신학에 대한 비판적 개요


 

                                                         이신열(고신대 신학과)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게 된 오순절 운동은 현대교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글로벌 기독교 (globalized Christianity)를 대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오순절 운동의 위상은 폭발적 성장을 거듭하여 이제는 개신교의 대표적 주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순절 운동의 분류


대부분의 오순절 신학자들과 연구가들은 일반적으로 오순절 운동을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한다. 첫째, 고전적 오순절 운동 (Classical Pentecostal Movement)을 들 수 있다.  1906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흑인인 윌리엄 시모어 (William Seymour)의 주도하에 일어난 아주사 대부흥운동 (Azusa Street Revival)에 의하여 시작되어 1914년에 하나님의 성회 (Assemblies of God)가 성립되어 그들만의 교회들을 형성하였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운동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방언이라는 성령세례 (baptism with the Spirit)의 초기 증거 (initial evidence)가 임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방언은 성령세례의 구체적, 가시적, 실체적 (tangible) 증거로서 이는 행 2:4에 나타난 방언의 재현이라고 여겨졌다. 여기에 기초한 고전적 오순절 운동, 즉 자기들만의 독특한 교리를 신봉하는 교회를 형성한 채 기존의 교회들과 교류가 거의 일어나지 않은 채로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둘째, 신오순절 운동 (Neo-Pentecostal Movement) 또는 은사주의 운동 (The Charismatic Movement)을 들 수 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 방언으로 대표되어지는 오순절 운동의 성령세례가 기성 교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부터 기성교회가 견지해왔던 오순절 교회를 향하여 품어왔던 적대적 감정, 무시의 감정이 서서히 변화하여 이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부터 신오순절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오순절 운동은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서 방언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데 이는 오순절 운동이 기성 교회의 교리와 충돌을 피하고 이들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독특한 교리적 가르침인 성령세례에 어느 정도의 유연성 (flexibility)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방언을 성령세례의 초기증거로서 강조하지 않는 반면에 기성교회내에서 소그룹 모임, 기도회의 집회를 통하여 성령세례의 현실성을 주장하면서 성령세례의 결과로 주어지는 다양한 은사의 가시적 측면을 강조하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신오순절 운동은 은사를 강조하는 은사주의 운동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제 3의 물결 (The Third Wave)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윔버 (John Wimber)와 와그너 (Peter Wagner)에 의하여 주창되어진 제 3의 물결은 은사주의 운동의 은사에 대한 강조를 1980년대의 교회성장운동과 연결하여 은사를 복음전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내세우는 운동이다. 여기에는 신유 (divine healing)와 귀신 축출을 비롯한 다양한 가시적 은사들이 강조되어졌다. 이 운동은 고전적 오순절 운동이 내세웠던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서의 방언을 부인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은사주의 운동보다 훨씬 더 과격한 성령세례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        


오순절 신학의 뿌리와 성령론적 특징  


도날드 데이턴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뿌리> (Theological Roots of Pentecostalism)라는 책에서 이 운동이 교리적으로 감리교의 ‘제 2의 축복’ (the second blessing)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앞서 언급되어진 시모어의 스승으로서 그에게 성령세례를 전수해 주었던 찰스 파함 (Charles Parham)은 감리교 출신의 순회전도자이었으며 그의 성령세례론은 제 2의 축복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제 2의 축복이란 중생함을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 (justification)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고 실제로 의롭게 된다는 성화 (sanctification)를 일종의 시간적 개념으로만 해석하여 칭의 이후에 성화가 온다는 2단계 이론을 내세우는 것으로 감리교 구원론의 특징적 요소에 해당된다. 즉 칭의함을 받은 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성령의 은혜를 받고 충만함을 입은 자들만이 완전 성화 (entire sanctification)를 경험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죄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특별한 축복을 받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화는 칭의 다음에 오는 제 2의 축복을 의미한다. 고전적 오순절 운동은 이에 근거하여 칭의와 성화의 2가지 축복을 받은 자들에게 성령세례라는 제 3의 특별한 축복이 임한다는 감리교 계통의 오순절 운동과 칭의 이후에 성화와 관계없이 제 2의 축복으로서 성령세례가 임한다고 보는 장로교적 (또는 침례교적) 오순절 운동으로 크게 나누어져서 교단들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교단이 앞서 언급되어진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회인데 이 교회는 장로교적 배경을 지닌 자들이 결속하여 성령세례를 일종의 제 2의 축복으로 이해하는 것이 미국 오순절 운동의 지배적 견해로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오순절 신학의 특징은 성령세례라는 성령론의 독특한 이해에 놓여있으며 이를 통하여 사실상 기존의 교회들과 구별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성령세례는 이미 중생함을 받고 칭의의 은혜를 누린 자들에게 주어지는 2차적 단계에서의 성령의 사역으로서 중생 이후에 주어지는 성령의 특별한 능력 부여를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능력 부여의 결과로서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으며 담대하게 복음전파에 임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덧입게 된다고 보았다. 특히 고전적 오순절 운동의 경우 예수의 능력에 의한 치유운동이 교단적 오순절 운동과 결별되어진 상태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성령의 능력을 치유라는 은사로 이해하기 보다는 방언에 집중하도록 유도하였다. 즉 고전적 오순절 운동은 성령의 능력과 이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사를 방언이라는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언에 대한 과도한 집중의 결과로 인해 건전하고 균형잡힌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상실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성령을 단순히 일종의 능력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이는 사실상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라는 일반적 구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 결과 성령이 삼위일체 제 3위 하나님이시며 그가 성부, 성자와 동일한 인격체라는 사실이 간과되기 쉬운 신학적 기류가 고전적 오순절 운동 전반에 걸쳐 강하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은사주의 운동의 경우에 성령세례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사를 방언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다양한 은사들로 이해하려는 폭 넓고 균형잡힌 시각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고전적 오순절 운동 스스로가 자신의 신학적 불균형과 결합에 대한 자각과 이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서 일어나게 된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교회들로 파고들면서 그 교회들이 지닌 교리들과 조화를 통하여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세례를 나름대로 자신이 속한 교단의 신학적 배경을 고려하여 이를 재해석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이 점이 은사주의 운동의 성령세례 해석이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 결정적 이유에 해당된다. 또한 은사주의 운동이 개신교의 영역을 벗어나서 로마 카톨릭에까지 확장되면서 이러한 다양성은 더욱 심화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회피한 채 성령충만 (fillin of the Spirit), 약속되어진 축복 (promised blessing) 등의 용어들이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전적 오순절 운동에서 은사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성령세례의 해석에 있어서 다양성이 더욱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사역이 가시적 수단을 통하여 드러나야 한다는 강조는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학의 전반적 경향


오순절 및 은사주의 신학자들, 특히 고전적 오순절주의자들의 경우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철두철미하게 인정하는 보수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닌 자들이었다.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체험되어 믿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즉 성경을 있는 그대로, 문자 그대로 믿는 다는 점에 있어서 근본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이들의 사고 속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근본주의적 경향 이면에는 사실상 복원주의 (restorationism)의 차원이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성령세례가 오늘날 우리의 경험 속에 그대로 재현되어서 복원되어야 한다는 사고가 고전적 오순절 운동의 독창적 교리인 성령세례의 초기증거로서의 방언을 고찰함에 있어서 반드시 언급되어져야 할 내용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복원주의적 사고와 더불어 오순절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반드시 체험되어져야 한다는 체험 위주 또는 체험 우선의 차원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가시화 되어져서 우리의 현실 속에 나타나고 우리가 그것을 체험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는 환원론적 사고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처해 있는 죄악으로 가득한 현실을 너무 가볍게 평가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 편에서의 불신앙, 죄악의 결과이지 이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부족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오순절 신학의 지나친 긍정주의적 (eudemonistic)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그 안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날카로움과 영광스러움이 현존한다. 그러나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인간은 오히려 금수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 희망과 긍정, 그리고 더 나아가서 행복을 논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다. 오순절 신학은 이 점을 간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 오순절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가시적 차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든 것을 현실과 경험이라는 검증의 잣대를 통하여 해석하려는 현대적 사고가 더 지배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오순절 운동의 말씀을 대하는 신학적 태도는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신론


오순절 운동의 이러한 성령론적 특징은 그 신학함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집중을 의미하였다. 성령론의 특징이 가시적 은사로 드러났다면 이는 오순절 및 은사주의 신학의 신론에 있어서 그 가시적 차원에 대한 강조로 드러나게 됨이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 차원에서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교리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섭리론에 있어서 특별 섭리에 해당하는 기적을 위시한 신유 등을 두드러지게 내세우며 이를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 3의 물결 운동의 경우 하나님의 영을 대적하는 권세들 (powers)과의 기도를 통한 영적 대결이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인데 이러한 강조는 사실상 천사, 마귀를 비롯한 악령들의 존재와 사역을 자세하게 논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삼위일체론의 이해에 있어서 성령의 독자적 사역을 강하게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성령의 사역으로서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가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각 위격들이 하나의 본질을 공유함으로서 누리게 되는 동등성의 차원보다 각 위격의 독자성과 독특성만이 강조되는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는 성령이 성부, 성자와 함께 동역하시는 다양한 사역에 있어서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개념을 강조하게 됨으로서 사실상 동방교회가 내세운 필리오퀘 (filioque)를 부정하는 경향과 근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는 최근의 <은사주의 신학>(Renewal Theology, 전 3권)이라는 조직신학 저서를 집필한 미국의 장로교 출신 은사주의자인 윌리엄스 (J. Rodman Williams)의 사상에도 드러나고 있다. 오순절 및 은사주의들의 신론이 일반적으로 전통적 신론을 답습하여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신론의 특정한 부분들이 오순절 신학 특유의 성령론적 집중이라는 엄연한 현실에 의하여 잠식되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 신학이 성령론에 대한 지나친 집중을 통하여 사실상 신론을 간과하게 되었음에 대한 또 다른 반영이라고 판단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