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와 종교개혁, 그리고 정통주의에 대한 신학적 고찰


 

 

 

A. 중세신학의 성격과 종교개혁 - 자연과 은혜의 관점에서 살펴본

 

신학은 항상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영원 전에 창조 (creation)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전 우주를 오늘도 보존 (conservation), 통치 (governance)하신다는 섭리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과 이 세상을 향한 그의 뜻을 알려 주시는 계시 (revelation)가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로마교의 신학은 중세에 이르러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본성을 깨달아 알 수 있다는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을 크게 강조하기 시작함으로서 계시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신학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사람이 지닌 합리적 이성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결과이며 죄로 타락한 인간 이성의 불완전함은 그의 은혜에 의하여 완전하게 된다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ecit)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고는 중세신학에 있어서 이러한 자연신학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성의 기능에 대한 강조는 중세철학, 즉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 혹은 스콜라 철학의 발전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자연신학에 대한 강조는 사실상 하나님의 계시를 등한시하는 결과를 야기시켰으며 그 결과로 중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은혜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려는 태도를 자아내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렇게 왜곡되어져서 실추되어진 은혜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결국 기독교의 개혁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왜곡은 왜곡된 신관 (view of God)을 촉발시켰으며 이는  기독교가 올바른 궤도에서 이탈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신학자들이 추종하는 은혜론 (the doctrine of grace)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깨달았는데 그 이유는 중세의 신학자들이 은혜를 하나님의 베푸신 호의라는 신적 측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은혜가 어떻게 인간에 의하여 수용되어지는가에 대하여 더욱 민감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세는 은혜 만능 (All is grace)의 시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사실상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라는 베일 속에 숨겨지게 되고 말았다.  세례 (infant baptism)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혜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주입된 은혜’ (gratia infusa)인데 이를 통하여 인간의 모든 원죄를 용서된다. 이 은혜는 오로지 사제의 수여에 의하여서 그 효력을 발휘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게 되었다. 성찬 (the Lord's supper)은 세례를 통하여 회복된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범하는 죄악으로 인하여 더러워진 오염으로부터 인간을 깨끗하여 하여 ‘거룩하게 하는 은혜’ (gratia sanctificans)로서 여기에서 사제의 역할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성례 (sacraments)를 통하여 은혜는 기계화 (mechanization) 혹은 물화 (physicalization) 되었으며 이는 성례가 사제의 집례를 통하여 주어질 때 은혜는 저절로 주어진다는 마술적 개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는 중세의 맹목적 신앙 (fides implicita)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안셀름 (Anselm of Canterbury)의 유명한 신앙의 대전제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부터 이를 회복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 (Martin Luther)이었다.  그는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물화된 은혜의 결과에 반응해야 하는 , 즉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해진 인간의 노력이 첨가되어야 구원받는다는 교리화된 신념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그 주된 내용이 ‘믿음에 의한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즉 구원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칭의론은 엄격하게 풀어 설명한다면 이는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한 은혜에 의한 칭의’ (justification by the instrument called faith)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루터가 말하는 은혜는 분명 중세 신학에서 주장하는 사제의 집례 하에 저절로 주어지는 물화된 은혜를 뜻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중세신학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재해석하기를 인간의 반응이란 단지 믿음만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의 성격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 편에서의 자발적 참여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발적 참여는 성령의 숨겨진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칼빈은 주장하였다. 따라서 믿음이란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거지가 내미는 빈 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도구이다. 루터는 이런 맥락에서 믿음을 수용하는 믿음 (fides apprehensiva)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믿음과 연결시킴으로서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신학이 망각하여왔던 은혜의 중요한 측면, 즉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호의 (favor)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각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의 두 가지 중요한 모토 (motto)인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이 어떻게 연관되어지는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성경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이 믿음은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주어진다고 종교개혁자들은 올바르게 지적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종교개혁의 계시신학의 핵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중세 신학의 인간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사제에 해당될 것이다) 중심적이며 왜곡된 은혜론 (the doctrine of grace)은 종교개혁자들의 계시신학에 근거한 이신칭의론(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에 의하여 그 정당한 의미, 즉 신적인 의미가 올바르게 회복되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어떠한가? 중세신학에서 주장하는 은혜에 의하여 완성된 자연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에서 자연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근대과학의 등장에 필수적인 요소인 객관적 자연관 (view of nature)의 등장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헬라 철학의 범신론적 구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사상의 비기독교적 요소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하여 기독교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자연물은 어떠한 원인 작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그의 사고는 결국  세상의 만물이 궁극적으로 신이라는 실체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즉 우주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헬라철학에서 주장하듯이- 신적이라는 테두리 속에 여전히 갇혀 있음을 뜻한다. 그의 이러한 사고는 우주를 목적론적(teleological)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도 감지된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중세의 지배적 사고는 사실상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경험적으로 바라보고 파악하는 일에 커다란 걸림돌 이었다. 오캄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을 비롯한 유명론자 (nominalist)들은 이러한 당대의 지배적 사고에 제동을 걸었지만 그 시도는 역부족이었다. 이는 자연만물을 그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지 못한 범신론적 사고가 잔재해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적 증거를 중세 신학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의 틀 속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자연은 하나님과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론적으로 연관되어져 있다고 가정하였기 때문에 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그 형상을 유추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analogia entis)는 자연신학의 모습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이에 대하여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존재론적으로 그 어떠한 유추관계도 허용하지 않았다.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에게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져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종교심과 연결되었다. 이제 자연은 하나님에 의하여 피조되었으며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반면에 이 피조는 신적 본질의 유출 (emanation)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자연은 하나님과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라는 두 가지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 토마스 토랜스 (Thomas F. Torrance)와 같은 현대신학자는 이러한 피조물의 의존성과 독립성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우발성’ (contingence)이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적 존재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는 중세의 자연관을 배격하면서 경험론적이며 유명론적인 사고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실적 (realistic) 사고를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을 하나님에 절대 의존적임과 동시에 특정한 질서에 의하여 한정되어지는 물체로 파악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결국 근대과학의 정신으로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B. 정통주의 (Orthodoxy)와 경건주의 (Pietism)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해 내려가 이를 현대 개신교 신학에 이어주는 가교와 같은 역할을 담당해 왔다. 먼저 ‘정통’이란 용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동방정교회 (The Eastern Orthodox Church)는 자신이 로마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수호한다는 관점에서 정통교회임을 주장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동방교회를 그리스 정교회 (Greek Orthodoxy Church)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 헬라어에서 orthodoxy는 단지 ‘바른 의견’을 뜻하는데 동방정교회가 서방의 로마교회와 맞서 올바른 교리를 지닌 교회임을 뜻한다.  둘째로 우리가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개신교 정통주의 (Protestant Orthodoxy)가 있다. 개신교 정통주의의 특징은 신학함에 있어서 스콜라적 방법론을 도입하였으므로 이에 근거하여 개신교 스콜라주의 (Protestant Scholasticism)라고 불리기도 한다. 개신교 정통주의는 16세기말과 17세기 초에 시작되었으며 방대한 신학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사고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정통주의는 논의와 논쟁을 통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빠짐없이 다루고 있는데 신, 자연, 인간을 포함한 순수하고 객관적이며 포괄적인 교리와 지식체계를 추구하였다. 이는 요즈음의 용어로 세계관을 방불케 하는 것이며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이 추구하는 바를 훨씬 더 능가하는 차원을 지닌다. 왜냐하면 기독교 세계관은 사실상 기독교를 통하여 가장 탁월한 학문을 형성하려는 시도인데 반하여 정통주의의 교리와 지식체계는 과거의 모든 세기에 주어졌던 신학적 지식을 섭렵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논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통주의는 종교개혁과 철학, 그리고 중세와 교부들의 신학의 역사를 두루 섭렵한 신학자들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중세 스콜라 철학을 철저히 알았을 뿐 아니라 이를 토의하고 비판하고 공격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을 추구함의 결과로 사실상 그것에 완전히 침잠하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비판을 위한 수용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스콜라 철학을 거부하기 위하여 그 논리를 수용하였고 이 철학의 실질적 내용을 완전히 섭렵하였으므로 누구보다도 이에 박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본주의 (fundamentalism)와 정통주의는 신학함에 있어서 완연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이에 만족함으로서 사실상 자신과 다른 사고들을 감히 논의와 토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정통주의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평이한 혹은 여자적 (literal)인 성경해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점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후예이지만 성경에 대한 집중적이며 역사적인 사색을 거부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정통주의와 다르다.

정통주의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을 모든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를 일반적으로 언약신학 (covenant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여 주일 (the Lord's day)에 대한 철저한 준수와 언약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언약을 맺으셨고 이 언약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지켜내셨음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언약신학을 계약신학 (federal theolog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언약신학의 대표적 주창자로 네덜란드 태생의 코케이유스 (Cocceius), 푸치우스 (Voetius) 위치우스 (Herman Witsius)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통주의는 신학자들이 신학체계를 소중히 여기며 방대한 지식체계를 추구하면서 진리를 옹호하고 이를 증진시키려는 노력 가운데 그들의 신학은 그들만의 신학으로 변질되어갔다. 즉 라틴어와 철학을 거쳐 신학이라는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평신도들에게 정통주의는 단지 신학적 지식의 체계화에 불과하였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능력에 대한 탐구보다는 신학적 체계와 토론, 그리고 이를 통한 상대의 지식이 정당하지 못함을 보여주려는 지적 추구는 인간이 지닌 감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를 자아내게 되었다. 정통주의에서 획득되어진 신학적 지식은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자신들이 지닌 지식으로 억압하는 횡포의 차원에까지 이르게 된다. 역사적으로 이는 독일과 프랑스가 경험하였던 30년 전쟁 (1618-1648)을 통하여 잘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는가? 정통주의는 개신교 신학의 가장 객관적이며 체계적인 표현에 해당된다. 이러한 신학을 추구하기 위하여 정통주의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방법론을 도입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자연신학이 계시신학과 함께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을 형식원리 (formal principle)로, 종교개혁의 이신칭의의 교리를 실질원리 (material principle)로 하는 두 원리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형태 (form)와 질료(material)로 구분하는 것과 유사한 구도이기도 하다. 그 결과 성경은 성령의 권위와는 별도로 그 자체로서 권위를 지니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성경을 합리적으로만 해석하려는 시도들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고 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정통주의는 결국 반정통주의적 운동을 낳게 되었지만 정통주의의 한 요소이었던 주관성 또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앞서 언급되어진 바와 같이 정통주의 내부에 자연신학이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주관성이 이미 정통주의에 깊게 뿌리가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반정통주의 전통은 네덜란드의 ‘나데르 레포마치’(De Nadere Reformatie)를 포함한 독일의 경건주의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운동은 신학적, 교리적 이유보다는 오히려 교회내의 정치적 이유에서 태동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경건주의는 중생과 그 체험을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으므로 비중생자 (non-regenerated)는 신학에 임할 수 없음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슈페너 (Philip Spener)와 프랑케 (August Herman Francke)등은 경건주의의 대표적 인물들로 여겨지는데 슈페너는 교회의 개혁을 위한 경건의 실제적 능력을 추구하는 교회내의 교회 (ecclesiola in ecclesiam)를 강조하였으며 프랑케는 히브리어를 중심으로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을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한 경건을 실천하고자 하여 병원, 양로원을 설립하거나 운영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실제 신앙생활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반영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경건 (pietas)을 강조하였던 경건주의가 결코 합리주의를 배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경건주의는 합리주의의 기초위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건주의의 합리성은 정통주의에서 중요시하는 객관적 지적 능력과 이에 기초한 체계적 지식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정통주의자가 지닌 합리성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이를 억압하는 차원에 이르렀다면 경건주의자의 합리성은 이와는 달리 자신의 체험과 감정을 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건주의자의 합리성은 교육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다음에 다루게 될 계몽주의를 촉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통주의의 교리적 지식체계에 대한 반동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리의 단순화가 요구되었던 것에 기인하는데 이러한 단순화는 결국 합리화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