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조 발라

     

1440년 9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자 문헌학자였던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다. 지난 700여 년 간 사실성을 의심받지 않았던  ‘콘슨탄틴 기증서’가 위조문서인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기증서’ 라는 문서는 프랑크왕국의 페핀 3세가 중부 이태리의 상당한 땅을 교황에게 헌납했던 756년경부터 광범위하게 회람되기 시작했는데, 이 문서는 토지의 헌납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되었다. 문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심한 나병에 걸려 고생하던 콘스탄틴 황제는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로마의 감독 실베스터 1세에 의해 고침을 받고, 감사의 표시로 로마에 있는 궁궐터와 이탈리아 중부의 상당한 토지를 로마감독에게 기증했다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신성불가침의 권위로 받아드려졌고, 그 누구도 문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때 교황 니콜라스 5세의 서기였고, 당시에는 아라곤과 시실리의 왕 알퐁스의 서기였던 로렌조 발라는 이 문서를 검토하는 중에 은밀한 거짓을 발견했다.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이 문서를 검토하는 중에 이 문서에 사용된 라틴어가 4세기 언어가 아니라 8세기의 라틴어임을 알게 되었고, 콘스탄틴황제 때에 사용되지 않는 몇 가지 용어를 발견했다. ‘원로원 의원의 긴 양말,’ ‘황제의 관,’ 그리고 로마의 관리를 칭하는 용어가 4세기의 용법과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로마제국의 관리를 칭하는 ‘사트랍’(satrap)이라는 용어는 4세기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칭호임을 밝혀냄으로서 그 문서가 후대의 위작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사실 ‘사트랍’은 고대 페르샤제국의 통치자를 칭하는 용어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역사적 문맥과 정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이 문서가 4세기의 것이 아니라 8세기에 만들어진 위조문서임을 입증했다.

  파장은 대단했다. 중세교회는 도덕적 신뢰를 상실했고, 거짓과 위선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발라 자신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회유를 거절하자, 그는 거룩한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사악한 야수로 지목되었고, 그의「콘스탄틴대제의 기증으로 믿어진 선언의 허구성에 관하여」(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s)는 금서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발라의 문서고증은 부인할 수 없었기에 당시 교황 에우게네(Eugenius IV, 1431-1447)는 이 문서가 위서(僞書)임을 인정했다.

  거짓의 운명은 한시적이라는 점이다. 일정기간 남을 속일 수 있으나 장구(長久)의 벽은 넘을 수 없다. 남을 속일 수는 있으나 자기 양심은 속일 수 없다. 아무리 입을 맞추고 변사를 앞세운다 한들 거짓은 영원히 이길 수는 없다. 사실 자체는 잠시 잊혀질 수 있으나 사실 자체를 영원히 잠재울 수는 없다. 거짓으로 옷입고 위선의 누각에서 영화를 누린들 그것이 양심의 채찍을 막아주지 못할 것이다. 진실한 역사는 잠들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은 때로 가려지고, 곡해되고, 오해될 수는 있으나 영원히 가릴 수는 없다. ‘용기 있는 지식인.’ 이것은 한 세기가 지난 후 에라스무스가 로렌조 발라를 가리켜 한 말이다. 우리 사회에도 용기있는 지식인, 용기 있는 법률가, 그리고 용기 있는 기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