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보다는 나눔을


해마다 11월말이 되면 추수를 감사하는 행사가 열린다. ‘추수감사절’이 그것이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그리고 익은 곡식을 걷어드리는 기쁨은 어느 사회에나 동일했고, 그것은 축제였다. 우리나라에도 무천(舞天)이나 영고(迎鼓), 동맹(東盟) 등 시기를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추수를 감사하는 제천(祭天)의식이 있어왔다. 일본 사회의 전통축재인 마쯔리도 따지고 보면 무병식재(無病息災)의 기원과 오곡풍양(五穀豊穰)의 추수를 감사하는 축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보면 농경사회는 경배의 대상은 다를지 몰라도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를 지킨 점은 동일하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성경에 근거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미국교회적 전통에서 유래된 절기라고 할 수 있다. 1620년 영국을 떠났던 순례자의 조상들은 66일간의 고통스런 항해를 마치고 뉴잉글랜드 케이프 코드에 도착한 날은 11월 11일이었다. 영국 플리머스를 출발할 때는 102명이었으나 도착했을 때는 78명이 살아남았고, 이 중 남자는 27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어린아이가 6명이었으니 성인 남자는 불과 20여명에 불과했다. 낯선 환경, 황량한 산야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옥수수를 심었고, 힘겹게 일년을 지내고 얻은 추수는 그저 얻는 자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한 끼 식사로 옥수수 두 톨씩을 배급받으며 연명했던 살인적 겨울을 생각할 때 추수는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의 축제였다. 브래드포드 지사는 감사의 날을 선포했고, 1623년 공식화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했다. 1863년의 일이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한국교회는 1903년부터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이다. 물론 성경에도 추수를 감사는 맥추절이나 수장절과 같은 절기가 있다.

  추수를 감사하는 진정한 정신은 추수는 자연의 결과, 곧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산물인 것을 고백하는 뜻이 있다. 청교도들이 추수를 감사했던 것은 추수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산물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추수감사절을 지킴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점은 추수의 기쁨은 독점(獨占)에 있지 않고 나눔에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감사의 정신은 많이 거둔 것(豐産)을 즐거워하는 절기가 아니라, 거든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베풂의 축제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추수에 대한 감사는 독점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을 인하여 감사하는 절기인 셈이다. “사방 백리 안에 굶주리는 자 없게 하라.”고 했던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은 기독교 정신이며, 그런 기독교적인 정신의 실천이 최부자집 300년 부(富)의 비결이었다. 성경을 이 점을 이렇게 말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라.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레19:9-10, 레23:22, 신24:19-22). 우리가 얻은 소유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소유물은 남을 섬기고, 이웃을 배려하고, 수확이 없는 이들을 위한 사랑의 도구일 뿐이다. 독점은 모두를 가난하게 하지만, 나눔은 모두를 풍요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