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유아세례는 위기를 맞이했다. 이 위기는 성찬 참여를 세례 받은 자로 제한하는 전통이 도전 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전통적으로 세례와 성찬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 둘을 분리하여 시행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등록교인들에게 이질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물론 세상 속에 있는 죄인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세상 밖으로 부름 받은 의인 공동체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신자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세상과 분리될 수는 없지만 세상과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가 확실히 세상과 다른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세례와 성찬이다. 하지만 이 두 교회 표지는 오늘날 교회성장과 전도라는 대의명분에 희생될 위기에 놓여 있다. 대의명분이란 교회가 전도하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거리를 가능한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성찬이 이런 대의명분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찬식에 세례 교인만 참여한다면 그것이 곧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요, 이런 차별은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 정착하게 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어, 결국 전도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를 정당화 하는 사람들이 들고 나오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장 9-10절)


그들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요, 이런 고백과 믿음이 있는 사람이 곧 구원받은 성도인데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런 논리가 정당하다면 아마도 교회는 교회 역사 속에서 시행되어 온 세례와 성찬을 더 이상 습관처럼 거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세례와 성찬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실제로 그것을 거행하지 않는 교회는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교회가 예전처럼 세례와 성찬을 진지하게 거행하는 일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세례와 성찬은 말씀과 더불어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단지 뭔가 색다른 가시적 이벤트로 전락하고 있다.


이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개신교의 구원교리를 너무 지나치게 심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다. 즉 구원이란 마음의 확신에 달린 불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시적인 예식들은 모두 형식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이원론이 문제다. 그래서 세례식과 성찬식의 가치는 평가절하 되어 큰 교회일수록 그것들은 번거롭고 귀찮은 행사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유아세례도 역시 이런 경향과 추세에서 예외적이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베푸는 유아세례식은 단지 온 교인들이 그 아이의 생일을 교회 안에서 축하하는 생일축하행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사실상 성인세례식도 세례 받는 사람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한다는 점 외에는 유아세례식과 별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유아세례의 위기는 오늘날 비로소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이 위기는 사실상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 시대인 16세기에 등장한 재세례파가 유아세례 무용론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세례는 죄 씻음, 즉 죄 용서를 의미한다. 죄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 회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또한 반드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것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정당한 기독교 교리이다.


여기서 신앙고백과 회개 없는 죄 용서는 없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고, 또한 죄 씻음의 의식인 세례는 신앙고백과 회개 ‘후에, 혹은 더불어’ 시행되어야 한다는 공식이 성립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유아세례는 용인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유아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재세례파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가장 큰 성경적 이유이다.


재세례파가 유아세례의 무용론, 즉 유아 때 받은 세례는 무효라고 보았기 때문에 신앙고백이 동반된 진정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아세례 받은 사람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 때문에 그들에게 재세례파라는 불명예스러운 명칭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재세례파의 견해가 유아세례를 지지하면서 유아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 입교식(개신교)이나 견신례(천주교)를 주장하는 견해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재세례파의 유아세례 무용론을 강력하게 학문적으로 변호한 책이 <신약의 세례>(Baptism in the New Testament)인데, 이 책의 저자는 영국 출신의 침례교도 신약신학자 비슬리-머레이(Beasley-Murray)이다. 이 책은 <성서적 침례론>이라는 제목으로 2006년에 한글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비슬리-머레이는 신약 본문에 대한 학문적 주석과 언어 분석을 통해 성경적 세례란 손으로 물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물속에 잠기도록 하는 ‘침례’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또한 유아세례가 성경해석학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교회사적으로도, 특히 초대교회의 초기 문헌상으로도 지지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아세례가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립되었고 교회 관습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재세례파와 이들과 일맥상통하는 교리를 가진 침례교도들의 견해와는 달리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루터교회, 영국성공회, 감리교회 등 대부분의 개신교회들까지도 유아세례를 매우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어떤 성경적 근거에서 유아세례를 성경적이며 사도적인 제도라고 보는가?


장로교도들과 교혁교도들이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성경적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근거는 성경에 나타난 언약적 관점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할례에 나타난 언약 사상이 신약의 세례에 계승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자신에게로 데려오도록 하셔서 천국이 이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건과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서신서들에도 기록된 종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근거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강력한 것들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먼저 유아세례라는 문구와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유아세례는 기독교의 주일에 대한 해석의 문제와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교리적으로 본다면 삼위일체를 기독교 교리로 받아들이는 문제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천주교도들과 모든 개신교뿐만 아니라 심지어 동방정교도들까지도 주일을 기독교 예배의 날로 지키는 것을 성경적이라고 하듯이 유아세례의 문제도 비슷하다. 비슬리-머레이의 주장처럼 유아세례의 습관이 초대교회 역사 속에서도 상당히 늦게 생겼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지지되기 어렵다. 아마도 그런 추측은 매우 이른 초기의 문헌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초대교회의 이른 초기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아세례에 관한 기록은 신약 성경에서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초기 기록들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3세기 초, 즉 200년대 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에는 세례를 베풀 때 어린아이들에게 먼저 베풀 것을 권고한다. 이런 자료들에 대해서는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책 <초기 4세기의 유아세례>(Die Kindertaufe in den ersten vier Jahrhunderten)을 참고하기 바란다.


만일 우리가 유아세례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 성경에 없다는 이유로 유아세례를 포기해야 한다면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도 역시 함께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논리적인 일관성이 빈약하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포기해야 한다면 아마도 성육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독교 핵심교리들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신앙을 고백한 자만이 세례를 받고 그 세례만이 유효하다면 유아에게만 세례를 베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심각한 지체부자유자들과 거의 모든 정신박약아들에게도 역시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러한 자들에게는 결코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는가?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권리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정한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성경 구절을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으로 적용하려는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을 요구할 수 있는 대상 역시 말귀를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으로 세례 받기 전에 신앙고백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유아뿐만 아니라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세례가 죄용서와 죄 씻음을 의미하지만 물세례 자체가 구원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우리 가운데 물세례와 구원의 관계가 개인에게 어떻게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한 아이에게 베풀어지는 유아세례와 구원의 관계도 그렇고, 신앙을 고백하는 한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물세례와 구원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구원에 관한 정보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성경적인 가르침과 제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시적 모습에 관한 수많은 구약의 표현들을 신인동형론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신약의 세례를 구약의 할례와 유비관계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유아를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는 언약의 세례를 베푸는 일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감히 아이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방식으로 유아세례를 옹호한다고 해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구원의 원리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논리적 일관성에 집착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유의하자는 뜻이요, 신앙의 대선배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역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자는 뜻이다.

 

2011년 09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