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밟기 기도와 최바울
십자군 운동 같은 공격적 선교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황대우 목사 (코닷 연구위원)
 
 
 
최근 KWMA 인터콥지도위원회에서 인터콥을 방문 지도한 결과 [세계영적도해]라는 책을 회수하고 수정판을 내기로 했는데, 이에 참고가 될 수 있는 글이 코닷 연구위원인 황대우 목사에게서 도착했다. 이 글이 KWMA 인터콥지도위원회가 수정하고자 하는 [세계영적도해]의 수정에 작은 도움이 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코닷  

 

 

 

최근 몇몇 기독교인들이 땅 밟고 기도하기의 일환으로 어떤절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한 것과 어느 노목사가 절에서 불교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이 인터넷 동영상과 뉴스를 통해 알려지면서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외면적 평화에 심한 균열이 발생했고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이런 일에 대해 보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불교가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을 사회의 공적인 사건으로 확대하고 조장했다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땅 밟고 기도하기가 근본적으로 미신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요, 신사도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단적인 사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것들 간의 사상적 유사성과 그 근거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렇게 정반대의 두 평가로 인해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설왕설래한다.

1. 땅 밝기 기도와 인터콥의 최바울 선교사
  땅 밟고 기도하기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 가운데 어떤 것이 성경적인가? 둘 다 성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가? 땅 밟기를 학문적으로 세세하게 논하는 것이 이 짧은 글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땅 밟고 기도하기’가 성경적인지를 살펴보고 땅 밟기 기도를 가장 강력하게 변호하고 주장한 인터콥의 최바울 선교사의 주장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땅 밟고 기도하기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단체들로는 인터콥과 예수전도단, 그리고 신사도운동 단체로 알려져 있다. 물론 수많은 한국 교회들 역시 이러한 단체들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땅 밟고 기도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사명으로 알고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다. 언급된 단체들 가운데 특별히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을 주장하는 인터콥의 설립자 최바울(본명: 최한우) 선교사가 인터넷과 언론에 자주 보도된 것은 그가 땅 밟고 기도하기를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근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는 선교사이면서 동시에 목사로 지칭될 것이다.

  최바울 선교사의 학력에 대해서는 그가 Hacettepe 대학교에서 공부했다는 것 외에는 인터넷상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었고 다만 그의 책 <세계영적도해>에서 다음과 같은 약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바울 선교사는 중동아시아 선교사로 10년 사역 후 국내에서 서울대, 고려대, 아세아연합신학교 강사, 호서대, 한동대 교수를 역임하고 KUIS 대학원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KUIS”는 “Korea University of International Studies”의 약자이며 한글로는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한다. 그는 이 학교의 총장이기도 하다.
  
<세계영적도해>라는 책은 2004년 12월 24일에 초판이 발행되었는데 현재 필자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10년 3월 20일에 출판된 증보 4판 2쇄본이다. 출판사는 ‘펴내기’이고 총판이 ‘두란노’이다.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 순복음인천교회의 최성규 목사, 산정현교회의 송석산 목사, 한동대 부총장 김영섭 교수, 고려대의 박성근 교수의 추천사가 들어 있다.

  하용조 목사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추천한다. “최바울 선교사는 인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안목이 비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은 다른 어떤 서적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서 성경적이면서 사회과학적인, 그러면서도 이상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영적 지도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계문명사와 이 시대 지구적 현상, 구약의 예언서와 신약의 계시록을 관통하며 분석, 해석적이면서 예언적인 이 책을 읽어가노라면 끝을 보지 않고는 놓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그의 화려한 이력, 그리고 한국 교회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유명 목사가 그의 저서에 대해 소개한 최상의 추천사만 보면 특별히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아니 그를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의심하거나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것 같아 보일 정도다.

2. 최바울의 세계 영적 도해 이해와 그 문제점
  최바울 선교사의 책 <세계영적도해>의 주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천사가 타락하여 사탄이 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정이고 이 고민거리를 풀기 위해, 즉 사탄을 정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는 것을 방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서 영이신 하나님과 영인 타락한 천사, 즉 사탄 사이의 영적 전쟁에 인간이 개입되었다는 논리를 편다.

  <세계영적도해>가 말하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영적 전쟁은 사탄의 바벨문명, 즉 가인의 계보에서 나온 문명을 통해 이어지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사탄의 세계경영과 도시에서 소외된 변방, 즉 영적인 방법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세계경영의 충돌을 의미하며, 이 싸움에서 최후 승자는 결국 변방으로 도시를 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자유를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결합함으로써 탄생하게 되는 경제적 절대 권력이 세계화라는 음모를 통해 세상을 통일하고 지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며 이 적그리스도를 대항하는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싸움이 마지막 세계의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다.

  <세계영적도해>는 적그리스도의 실체를 세계시장의 장악과 세계의 통일된 시스템화라고 본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WTO 즉 세계무역기구이고 미국과 G7의 세계경영 전략이라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세계경제를 장악한 통일된 세계체제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생체 바코드 666을 이마에 새기도록 하고 세계 디지털 전산 시스템으로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완전한 세계평화, 즉 정치사회적 평화와 더불어 완전한 평등이 실현되는 소위 세속적 유토피아를 지상에 이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세계체제가 자신의 권력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성도들을 핍박한다고 해석한다.

  <세계영적도해>는 선교사들과 선교에 헌신한 성도와 교회들이 그 절대 평화의 유토피아적 세계체제를 붕괴시키고 인류 역사를 마감하는 주체들이라고 결론짓는다. “지구촌 변방에서 마지막 남은 바로 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이 세계역사를 마감시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들을 History makers라고 부른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의 절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영적도해>가 주장하는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보인다. 한 마디로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하나씩 따져보면 문제가 많다. 지금부터 성경적으로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성경해석학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많다. 여기서 모든 것을 세세히 지적할 수는 없지만 예컨대 “하나님의 사정”이라는 황당한 해석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신이 당한 곤란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사탄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그 대답은 하나님께서 너무 심심하신 나머지 사탄을 만들어 스스로 타락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오도록 하셨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대단한 천사를 만드시긴 했는데 이 천사가 타락하여 사탄이 될지는 미처 예상치 못해서 당황하셨든지 아마 둘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목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신의 조건”에 대한 최바울 선교사의 진술은 참으로 성경의 아전인수 그 자체다. “패러독스”에 대한 그의 이해와 설명 역시 교회사적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둘째, 영적 전쟁을 문명과 문화와 물질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으로 이해한 것도 심각한 문제다. 물론 영적 전쟁이란 용어는 분명 성경적이고 건전한 신학 개념이다. 하지만 성경이 죄악으로 인해 문명과 과학의 발달, 그리고 물질 중심적인 세상이 반기독교적인 방향성을 갖고 있음을 경고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문명과 문화, 제도 자체를 거부하고 그런 세상 속에서 살기를 포기해야한다고 주장하거나, 또한 이윤추구 자체를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최바울 선교사의 주장이 성경적인 것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왜냐하면 조직과 제도를 하나의 권력이라고 비판하는 그가 인터콥을 조직하고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그가 조직하고 설립한 것은 하나님의 변방적인 방법인가? 과연 그는 자신의 조직체 안에서, 그리고 그 조직체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아닌가? 이러한 그의 행보는 그 자신의 주장과 일치하기 보다는 대조적인 것으로 보인다.

  영적 전쟁이란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이 구절에 대한 성경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많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할 대상이 “혈과 육”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는 점에는 크게 이견이 없다. 그런데 <세계영적도해>는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할 대상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지적하는데 그 대상이 모두 물질세계, 즉 “혈과 육”에 속한 것들이라는 점이 문제다.

  셋째, 그 책이 제시하는 선교방법 역시 문제다. 영적 전쟁의 최고 무기는 선교라는 것이요, 이 선교라는 무기로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교회 밖에 있는 모든 세상이라는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격언을 영적 전쟁에 적용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최바울 선교사가 제시하는 사탄의 문명세계, 물질적인 도시세계를 정복하는 하나님의 변방적 방법, 즉 선교는 확실히 “공격적”이다. 영적인 대적을 무찌르기 위해 용감히 선교의 무기를 들고 적진으로 돌진해야 하며 그 적진에서 장렬하게 전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그는 “순교”라 부른다. 아마도 그는 이것을 오늘날 영적 전쟁에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할 “초대교회의 영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전도와 바울 사도의 전도 방법이 그렇게 저돌적이고 공격적인가? 과연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가 그렇게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의 결과였으며 그와 같은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선교 방법으로 인해 로마 제국이 멸망했는가?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방법, 즉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방법으로, 즉 세상의 눈으로 보면 한없이 연약하고 소극적이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열심” 등으로 부른다.

  십자가는 영적 전쟁의 최후의 격전지이다. 그 영적 전쟁의 격전지에서 외적인 승리자는 마치 사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최후 승리자이시다. 어떻게 승리하셨는가? 한없는 사랑과 철저한 희생으로 승리하셨다. 그 십자가 위에는 물과 피를 쏟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주검으로 걸려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으심으로 승리하셨다. 그리고 그 승리는 십자가의 죽음 후 3일이 지나지 않아 부활로 확증되었다. 이것이 성경적인 역설, 즉 패러독스이다. 십자가는 결코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선교 방법으로 해석될 수 없다.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선교 방법은 기독교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이슬람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최바울 선교사는 자신의 책에서 “빈 라덴과 무슬림 전사들”을 “단순 테러리스트들이 아니라 33개국 알 카에다 네트워크를 가동하면서 서구문명에 대한 이슬람 글로벌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역사적 사명감에 충만한 고급 무슬림 전사들”로 소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무슬림 전사들의 “무력투쟁 방식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적하여 싸워야 할 대상은 그 전사들이 싸우는 대상과 동일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무기력하여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는데 비해 빈 라덴과 무슬림 전사들은 선견지명이 있어서 상대하여 싸워야할 적을 잘 파악하고 자기들 방식대로 잘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 영적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그것이 선교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미 정착된 단기선교 개념은 바로 이러한 선교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단기선교를 신학적인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해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최바울 선교사는 심판의 날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 오게 된다고 하면서 그 세계역사를 마감하는 주체가 선교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심판 날의 갑작스러운 도래, 즉 주님께서 도적같이 갑자기 오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때와 시를 알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지구의 어느 변방이 마지막 선교지이며 마지막 선교 대상 민족인가?

  또한 과연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마태복음 24장 14절 말씀에서 심판 날의 도래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러한 해석은 단지 최바울 선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마치 교회의 선교 역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위대한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하지만 지금 선교에 관여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해석에 동의하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설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바울 선교사는 지난 기독교 역사 100년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한 진정한 순교자가 없었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원인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선교 방법의 결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무슬림들은 저렇게 자신들의 지하드 교리에 충실하여 목숨을 바치는데 도대체 왜 기독교는 순교할 각오로 선교하지 않느냐는 논조로 도전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 전쟁을 위해 모든 땅에서 우상을 몰아내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절간이든 어디든 우상이 있는 곳에서는 선교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공격적 선교의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목표로 한 십자군 원정이다. 물론 이 십자군 원정 사건 이전에도 중세 기독교는 제국의 영토 확장과 변방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칼과 성경을 병행하기도 했다. 그 일선에서 일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수도사들이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선교 역사에서 공격적 선교는 16세기부터 시작된 식민지 정복과 더불어 재기되었다. 식민지 정복 전쟁을 통한 복음 전도는 그야말로 칼과 성경을 통한 지배의 전형적인 양상이었다. 이것은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을 내세우는 이슬람식 선교방법과 너무 유사하다. 예수님 시대, 사도 시대, 그리고 그 이후 초대교회 시대를 살펴볼 때 공격적 선교 개념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사도 시대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던 시대에도 큰 길이나 사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예수 믿으라고 외치고 다니다가 잡혀 순교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그 시대의 모든 순교자들은 몰래 숨어 신앙생활 하다가, 아니면 평화의 시대에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발각되고 고발되어 순교를 당한 것이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선교 방법이 최바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순교를 각오하고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최상의 선교라고 가르치는가? 그러나 성경은 전도와 선교의 방법을 다양하게 소개한다. 또한 전도와 선교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선교를 공격적으로 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성경 구절은 전무하다. 오히려 때론 삼십육계를 권장하기까지 하면서 그것을 지혜라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16, 23a)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선교를 용감하게 하는 것도 때론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유일한 선교 방법은 아니다. 선교에는 “뱀과 같은 지혜”도 때론 필요하다.

  아마도 여기에 등장하는 “뱀”이라는 단어는 최바울 선교사의 논리로는 풀기 어려운 대 과제요 골칫거리일 것이다. 그것도 영적 전쟁을 위한 선교 방법에 활용되어야 할 지혜의 본보기로 등장하니 말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아마도 성경에 등장하는 “뱀”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탄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뱀”을 “지혜”의 본보기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제시하는 영적 전쟁의 대립 구도로는 풀어낼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언제나 뱀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바로 그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다니! 여차하면 줄행랑을 칠 수도 있다는 것은 최바울 선교사가 주장하는 공격적 선교 방법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은 어디에서도 공격적인 선교와 적극적인 순교를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3. 최바울 선교사의 땅밟기 기도 옹호
  이제 최바울 선교사가 왜 땅 밟고 기도하는 것을 옹호했는지 살펴보자.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선교 방법을 동원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듯이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권장하시는 최고의 기도 장소는 자신의 골방이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기도의 은밀성 강조하신다. 물론 공적인 기도를 골방에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적 기도는 예배를 위해 모든 성도들이 모인 곳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 공적 기도 역시 기도의 은밀성이라는 성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공적 기도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교제하는 장소에서 하는 것이지 땅 밟고 기도하기처럼 생뚱맞은 곳에 가서 그 기도에 함께 동참할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위협적이고 공격적으로 기도하는 것까지 허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봉은사에서 땅 밟고 기도하는 동영상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을 때 그것이 성경적으로나 기독교 역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한 그의 주장은 그 자신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선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2010년 10월 28일자 국민일보 미션라이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땅 밟기 기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이것이 약속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밟는 땅을 다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지금 신약 시대에는 그 땅과 그 거민들에게 영적 회복과 축복을 주리라는 뜻으로 대개 해석한다. 부동산을 넘겨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땅을 밟고 기도할 때 그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영적 전쟁의 의미이다. 영적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기도함으로 그 영적 세력을 제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기도 형태는 적극적이고 전투적이며 공격적이다.”

  봉은사 절에서 기도하신 분들이 눈을 부라리며 싸움을 걸 듯 기도한 것은 아니지만, 기도의 내용과 그 모습이 분명 다른 사람들에겐 도전적이고 공격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와 같은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기도,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성경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하면 믿음이 상식이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믿음이 상식을 의미하지도, 상식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비상식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물론 기도가 장소적으로 제한될 수는 없다. 기도는 어디에서도 가능하다. 집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산에서도, 들에서도, 사무실에서도, 심지어는 절간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기도의 장소에 제한이 없듯이 기도의 자세와 형태도 천편일률적으로 소리를 질러야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서 기도하느냐에 따라 기도하는 모습도 어쩌면 달라야 할 것이다.

  보통 소리를 내어서 하는 자신만의 골방 기도를 시내 한복판에서도 그대로 할 수는 없다. 아니 매우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마치 수영복 차림으로 거니는 일이 해변에서는 매우 자연스럽겠지만 그곳이 평상시 다니는 거리와 시내 한복판이라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과 같다. 교회 안에서 하는 합심 기도의 내용을 교회 밖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방법을 지혜롭게 바꿀 필요가 있지 않는가!

  땅 밟고 기도하기와 같은 형태의 기도 모습은 선교단체들을 통해 대학생들과 청년들 사이에 이미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기도의 직접성과 현장성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수많은 한국 교회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대형교회들은 대부분 이런 땅 밟기 기도와 같은 기도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실천해 오고 있다. 수많은 목사님들도 사실상 그런 종류의 기도에 익숙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자신들이 목회하는 교회에 다양한 형태로 적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도특공대”와 같은 특별한 기도팀의 조직이다.

  교회를 위해,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권장할 일이다. 그리고 함께 모여 그런 기도 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기도특공대와 같은 조직은 그 용어에서부터 이미 그것의 공격적 성격을 감지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성경 말씀을 근거로 그런 조직을 만드는가? 그냥 기도는 좋은 것이니까 많이 하고 집중적으로 하자는 논리인지, 아니면 집요하게 두드리면 반드시 열리게 되는 것이 기도의 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100일 기도, 1000일 기도, 일천 번제 등이 교회에 무분별하게 도입된 결과인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정복하신 방법이 십자가의 희생적인 사랑이었듯이 로마 제국에서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 역시 로마 제국을 바로 그 기독교 사랑으로 정복했다. 최바울 선교사도 자신의 책에서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핍박 가운데 목숨 걸고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 십자가를 지고 정도(定道)를 걸었으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歷史)를 반전시키고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탄핵하기 위해 그들의 땅에 찾아가서 그 땅을 밟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과연 그가 말하는 십자가를 지고 정도를 걷는 행위인지 묻고 싶다.

  로마 제국을 정복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기 위해 순교했을 뿐이다. 그들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들에게 찾아가서 보란 듯이 기도한 다음 잡혀 죽은 것이 아니다. 적진에 복음을 들고 들어가 장렬하게 순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로마의 박해 시절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어떤 사람들보다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 순진함과 순종이 기독교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로마 제국을 기독교 제국이 되게 한 원동력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최바울 선교사의 공격적 선교 방법은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실 교회사에서 이와 같은 공격적 선교 방법은 중세 초에 영토 확장이라는 명분과 더불어 사용되었으며 중세 중반에 일어난 십자군 원정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기독교적인 선교 방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슬람식 선교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방법은 무력이다. 물론 그들도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다.

  이런 이슬람식의 공격적이고도 무력적인 선교 방법은 종교개혁 이후 종교전쟁으로, 다시 식민지 정복 전쟁을 통해 교회사에 재등장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지 정책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선교는 그 시작의 역사를 아마도 19세기 정도로 잡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적극적이다 못해 공격적이고 전투적으로 선교해야 한다면, 성경이 그것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종교전쟁도 불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종교전쟁을 불사하는 전도와 선교의 근거를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싸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전쟁을 단순히 전도와 선교 영역에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선교 영역에서의 영적 싸움을 마치 영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타종교와 불신자들과의 기싸움 정도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런 잘못들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영적 영토가 확장된다는 비성경적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장소를 3차원적 공간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적 영토로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영적 전쟁이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러한 영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이 시작되는 첫 번째 장소는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육체의 소욕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 이러한 개인의 내적 전쟁은 살아 숨 쉬는 한 지속될 것이다. 영적 전쟁은 자신과의 싸움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불의와 악들, 그리고 그것들을 양산하는 모든 악한 영적 세력들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 이런 싸움은 단순히 개인의 영적 문제로 끝나지 않고 온 교인들이 힘을 모아 함께 대적하고 싸워야 하는 연합전쟁이다.

  이 싸움에서 지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착용해야 한다. 진리, 의, 평안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영적 전쟁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도 깨어서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영적 전쟁은 상대가 누구이든 구체적인 사람을 대상으로 치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쟁의 대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적 전쟁이 타종교인과 불신자들과의 싸움은 분명 아니다. 그들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전도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에게 타 종교인들을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사는 마을에서 쫓아낼 권리는 없다. 그리고 성경이 그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마음에 품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의무와 책임은 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주문하고 명령한다.

  우리는 한편으로 타종교인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형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역시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해 보여야 할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사랑, 즉 기독교의 희생적 사랑,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선교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모든 종교 가운데 기독교만이 인류를 위한, 인류를 구원해 낼 유일한 참 종교임을 드러내는 위대한 행동이다. 전도와 선교는 이 사랑을 실천하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