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고신대학보] 313호(2007년 11월 5일 발간)에 실린 종교개혁기념 글입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써 (Martin Bucer) - 창조 원리는 기독교 윤리의 원형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는 누구인가? 그는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초부터 불기 시작한 칼빈에 대한 활발한 연구 덕분에 다시 알려진 인물이다. 부써는 칼빈이 제네바(Geneva)에서 쫓겨났을 때 그를 슈트라스부르크로 초청한 사람이었고, 그 후 제네바의 종교개혁가가 가장 존경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부써는 1491년 11월 11일, 엘자스(Elsass) 지방의 슐레트슈타트(Schlettstadt)에서 태어났다. 만6세부터 만15세까지 고향에 있는 라틴어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더 공부하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결국 공짜로 공부할 수 있는 수도원을 선택했다. 1년간 수도사 예비과정을 거친 후 드디어 1508년에는 도미니칸 수도사가 되었다. 수도원에서 10년 동안 공부한 것도 모자라 1517년 1월 말에는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대학에 입학했다. 부써는 1년 뒤 바로 이곳에서 자신에게 일어나게 될 변화를 전혀 알지 못했다.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 11월 1일) 전야, 즉 부써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한지 정확히 9개월 째 되던 날 저녁에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당 정문에 면죄부에 관한 95개 조항의 토론문을 게재했는데, 이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약 6개월 후 루터는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속한 어거스틴 수도원의 긴급 종단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이 회의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논쟁(1518)이라 불리는데, 바로 여기서 그 유명한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 탄생했다. 루터는 이 십자가의 신학을 자신의 신학이라고 부른 반면에 천주교 신학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 불렀다.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역설했다. 마르틴 부써는 비텐베르크의 마르틴이 십자가 신학을 역설하는 그 자리에서 종교개혁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으며 루터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 후 부써는 1523년부터 1548년까지, 25년 동안 당시 독일에서는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가로 활약했다. 생애의 마지막 3년은 영국 캠브리지(Cambridge) 대학 교수로 지내면서 영국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했다.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써는 수많은 저술들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 세 편을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1523년에 출판된 책,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과 어떻게 그런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Das ym selbs niemant, sonder anderen leben soll, und wie der mensch dahyn kummen mog); 1538년에 출판된 책, [참된 목회와 바른 목회 사역에 관하여: 어떻게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세워지고 시행되어야 하는가?](Von der waren Seelsorge und dem rechten Hirtendienst, wie derselbige in der Kirchen Christi bestellet und verrichtet werden); 사후인 1557년에 출판된 책,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하여](De regno Christi). 이 세 권 속에 나타나는 공통된 주제는 ‘섬김’과 ‘봉사’이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게 회복되어야 할 주제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심각하게 앓고 있는 지병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기주의’, 즉 ‘자기중심주의’라는 병일 것이다. 이 병은 인생이 원죄로 감염될 때 발생했다. 타락한 인류가 겪는 모든 재난이 바로 이 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 사회의 모든 범죄도 그 중심에 이 병이 자리 잡고 있다. 속임수와 다툼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수단이 되었고, 살인과 전쟁은 수단이 되었다. 한국 교회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부정, 부패, 편법, 탈법의 문제들뿐만 아니라, 교회의 내적인 문제들, 즉 서로 높은 곳에 앉겠다고 반목과 분열을 일삼는 것 역시 저 인류의 원초적 질병이 일으키는 발작들이다.


부써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성경적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이기주의’라는 불치병에 신음하고 있는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십자가 위에 던지셨다는 것이다. 즉 바로 그 희생의 십자가 위에 핀 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강제와 핍박과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왕들과는 달리, 자신을 희생하는 그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속에 사는 우리 각자가 마치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의 ‘작은 그리스도(little christ)’가 되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부써는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시며, 나의 결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써에 따르면 이런 기독교 윤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비로소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심어놓으신 창조 원리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분명 윤리적 종교이다. 의무와 책임만을 가르치는 칸트 윤리의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가르치는 십자가 윤리의 종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인생의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거듭난 삶이다.


이기주의라는 불치병에 걸려 신음하는 우리를 향해 소리치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써의 음성을 들어보자. “영생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만 가능합니다. 젊은이들을 말씀에 위배되는 길로 가도록 권면하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형제 사랑이라는 한 가지 율법으로 완성됩니다. 형제 사랑이란 항상 자신의 유익이 아닌 이웃의 유익만을 추구합니다. 이 모든 것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와 질서와 계명에 따르면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을 위해 살되, 반드시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무는 영적인 일이나 세상적인 일에 있어서 공공의 유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부름 받고 세움 받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추구할 때보다 더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실 수는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람의 사랑이 많이 식어버립니다.(마 24:12) 모든 사람은 각기 편안한 삶을 추구하고 따르며 다른 사람들이 일한 것으로 먹고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철저히 그와 반대되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에게 정당하게 주어진 것조차 포기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늘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작성자: 황대우 목사


(고신대학교 신학과 겸임교수, 개혁주의학술원책임학술위원, 창원은광교회 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