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2일자 기독신문에 실림. 작성자: 안인섭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  한국칼빈학회 총무)


[제10회 아시아 칼빈학회 주요논문 / 황대우=칼빈의 이중 교회론은 플라톤적 이원론에 근거했는가?]


그리스도 교회는 본질적 ‘하나’


칼빈의 가견-비가견교회는 인식론적 구별


칼빈은 16세기 유럽에서 활동했던 신학자인데, 아시아 기독교인들이 그에게 큰 관심과 존경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지난해 세계 칼빈학회에 참가했던 필자가 유럽의 어느 일간지로부터 받은 질문이었다. 필자는 왜 우리에게 칼빈과 그의 신학이 중요한지를 몇 가지로 나누어서 대답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적인 복음의 본질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해 주기 때문에 아시아인들은 그의 신학을 열정적으로 연구한다. 더 나아가 칼빈은 옛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새 시대는 아직 도달하지 않고 있었던 역사적 과도기에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숙고했던 위대한 교회의 선생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경청한다. 마지막으로 칼빈의 가르침은 단지 신학적인 영역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모든 삶에 복음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존중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 칼빈이 중요한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칼빈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복음의 본질을 재발견하여, 교회가 그것을 향하여 나감으로 초대교회적인 역사적 기독교를 계승하도록 할 뿐 아니라,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생활에도 의미 있을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칼빈이 교회를 섬기고 있었던 16세기는 전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였다. 1000년간 지속하면서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마가톨릭은 전통의 무게에 짓눌린 채 숨 쉴 틈 없이 조직된 관료제도와도 같이 전락해 있었다. 이런 중세 기독교를 개혁하려던 움직임은 15세기 말부터 교회 안팎에서 광범위하게 제기 되고 있었다.


로마가톨릭 안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있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로마 교황청도 교회의 혁신을 말했으며, 교황의 수위권에 도전하면서 종교회의제를 주장했던 가톨릭 그룹의 개혁 운동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근본적인 신학적 변혁은 결여한 피상적인 운동일 뿐이었다.


한편 로마교회 밖에서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던 급진적인 종교개혁 운동들(Radical reformations)도 대두 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운동들은 대안이 되기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교부들과 역사적 기독교를 간과한 채 16세기 사회 속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무리들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빈의 교회론은 이와 같은 16세기의 역동적인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칼빈은 난맥상을 보이는 교회론들의 홍수 속에서 성경적이고 교부 시대를 이어가는 자신의 교회를 세워야만 했던 것이다.
이번 제10회 아시아칼빈학회에서 발표된 고신대 황대우 박사의 논문은 이와 같은 16세기의 상황 속에서 칼빈의 교회론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이중 교회론은 플라톤적 이원론에 근거했는가? 이 제목으로, 황 박사는 소위 말하는 칼빈의 이중 교회론이 플라톤적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변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은, 칼빈 자신이 그리스로마 철학에 매우 정통하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해 준다. 실제로 칼빈의 최초의 학문적인 저술은 ‘기독교강요’나 성경 주석이 아니었다. 1532년에 등장하는 그의 첫 학술적 작품은 로마의 스토아주의 철학자였던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에 대한 주석이었다. 사실 세네카는 네로 황제 밑에서 행정을 맡기도 했지만, 그가 주장했던 것은 로마 안에 존재하는 이교도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칼빈은 이 작품을 통해서 16세기 당시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의 관대한 태도를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교부들도 세네카를 비롯한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들을 자주 인용한 바 있다. 어거스틴이 그의 신국론에서 정의로운 국가관을 피력하면서 키케로의 ‘공화국에 관하여’를 인용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칼빈 당대에도 에라스무스 같은 인물도 1521년부터 세네카의 저서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칼빈의 사상에 그리스로마 철학의 영향이 존재하는가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황 박사는 특별히 칼빈의 교회론에 플라톤이 영향을 주었는가에 초점을 두고 논지를 펼치고 있다. 이 논문은 먼저 플라톤의 이원론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면서, 뒤를 이어서 칼빈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중 교회론(Twofold ecclesi-ology)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칼빈은 아마도 이탈리아 철학자 피치노(Ficino)가 라틴어로 번역한 플라톤의 작품들을 읽었을 것으로 보인다. 칼빈의 작품 중 어떤 곳에서는 플라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듯이 보이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 칼빈의 저작들을 전후 문맥에서 면밀히 검토해 볼 때, 칼빈은 플라톤적인 이원론자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어떤 저서에서도 칼빈은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를 그리스로마 고전철학 틀을 사용해서 해석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칼빈의 이중 교회론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며,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문의 저자는 플라톤과 칼빈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플라톤은 보이는 두 종류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플라톤적인 이원론은 칼빈의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라는 교회론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의 이중 교회론에는 존재론적인 일원론, 즉 하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것이다. 둘째, 플라톤은 인간을 감각 세계에 속한 육체와 이념의 세계에 속한 영혼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칼빈은 비가견 교회(Invisible Church)를 가견 교회(Visible Church)의 비가견적인 영혼으로 보지 않는다. 칼빈에게 있어서 가견 교회의 영혼은 비가견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적 진리의 건강한 교리이다. 셋째, 플라톤의 이원론에는 두 존재들이 있다. 그러나 칼빈의 이중 교회론에서는 교회는 오직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가견 교회와 비가견 교회 사이의 구별은, 존재론적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