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황대우

‘인문주의’(Humanismus. Humanism)라는 용어는 19세기에 독일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임마누엘 니탐머(Friedrich Immanuel Niethammer)가 고전 즉 헬라어와 라틴어 교육을 강조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던 용어인데, 오늘날 이 용어가 ‘인간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개념 정의와 이해가 혼란스럽다.

16세기 인문주의는 고전 인문주의로써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의미한다. 르네상스 시대는 일반적으로 대략 1350-1600년 사이의 서구 역사를 의미하고 고전 인문주의는 15-16세기의 르네상스를 의미한다. ‘인문주의자’(humanista)라는 용어는 이미 16세기에 사용되었는데, ‘인문학’(studia humanitatis)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인문학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주로 고전 문학과 예술의 원천인 그리스 로마 시대 저술에 집중한 이탈리아 인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기독교의 원천인 성경과 초대 기독교 저술에 집중한 북유럽 인문주의이다. 기독교 인문주의라 정의되는 북유럽 인문주의는 종교개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유능한 종교개혁자들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로는 독일의 멜랑흐톤(Melanchthon), 프랑스의 칼빈, 네덜란드의 요한 슈투름(Johannes Sturm)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 모두 기독교 인문주의 즉 성경 인문주의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에게 성경 인문주의는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성경 인문주의를 배제하고 종교개혁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원어와 기독교 교부들의 원전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네덜란드와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 활동한 성경 인문주의자들 덕분이었다. 성경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로마 문학 원전보다는 오히려 성경 원문을 더 사랑했다. 그들의 주요 관심은 세속적이기 보다는 신앙적이었다. 이런 관심 때문에 고전 헬라어와 라틴어 저술들을 독서하는 것은 물론이고, 헬라어와 라틴어로 기록된 교부들의 저술도 함께 읽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언어인 히브리어와 코이네 헬라어를 익혀 성경 원본을 편집하고 읽기 시작했다.

16세기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은 둘 다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의 ‘아드 폰테스’(Ad fontes)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특히 북유럽의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은 성경과 초대기독교를 동경했다는 공통점과 개혁이라는 공동의 이상과 목표 때문에 서로를 동지로 생각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은 ‘성경과 초대기독교의 복구’라는 개혁의 이상이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각기 복구하는 길이 달랐기 때문에 개혁의 동반자가 될 수는 없었다.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자 루터는 1517-1521 사이에 급부상한 유럽 최고의 유명인이 되었다. 그의 유명세가 정작 루터 자신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결국 유럽 역사와 교회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루터가 유명세를 떨치기 전, 16세기 유럽 최고의 명사는 단연 네덜란드 로테르담(Rotterdam) 출신의 에라스무스였다. 그는 성경 인문주의의 대표 주자였다. 그는 1516년에 최초의 헬라어 신약성경 비평편집 판을 출간했다.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 <불가타 역본>이 중세 내내 ‘공인성경’(Textus receptus)으로 권위를 발휘했기 때문에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그리스어 원본의 출간은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에라스무스는 동료 인문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 교황은 수차례 에라스무스를 로마 교황청으로 거듭 초청했으나 인문주의의 대표 주자는 결국 거절했다. 루터 역시 로테르담의 인문주의자가 편집한 헬라어 <신약성경>이 출간되자마자 구입하여 탐독했고, 한 해 뒤인 1517년에 종교개혁의 발단으로 간주되는 루터의 “95개조 토론문” 게재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해도 성경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루터는 한 배를 타고 가는 동반자라고 생각했다. 즉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은 서로를 동지라 여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이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1524년에는 에라스무스와 루터 사이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지상 논쟁이 벌어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에라스무스를 추종하던 인문주의자들 다수가 에라스무스를 떠나 루터를 추종하는 종교개혁을 선택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종교개혁 전야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가늠하는 것은 성직매매가 만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컨대 1492-1503 사이의 교황 알렉산더(Alexander) 6세는 스페인 출신 로드리고 보르지아(Rodrigo Borgia)였는데, 뇌물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많은 첩을 두었고 이들로부터 8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이 자녀들 가운데 가족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잔인무도하기로 악명 높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어 ‘보르지아’는 부패의 동의어가 되었다.

또한 1503-1513년 사이의 교황 율리우스(Julius) 2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존임을 과시하기 위해 대부분의 재위기간을 강력한 군대를 직접 진두지휘한 전쟁으로 채웠기 때문에 교황을 평화의 왕이 아닌 전쟁의 왕을 상징하는 인물로 변질시켰다. 그의 후계자인 레오(Leo) 10세는 루터를 파문한 교황이었는데, 은행 가문인 메디치(Medici) 가문 출신답게 부와 권력과 명예를 탐하는 세속적인 인사였다. 그가 얼마나 세속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그가 교황의 자리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황청을 주셨으니, 이제 다함께 즐기자!”라고 했던 말로도 짐작할 수 있다. 종교개혁 전야는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권력남용과 악취 나는 부정부패로 만연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도덕적 타락상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개혁의 대상은 성직자들의 권력남용과 부정부패로 보았다. 이런 사실들을 고발하기 위해 인문주의자들은 글로써 그것을 희화화했다. 이것은 도덕적 개선이 인문주의 개혁의 최고의 목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종교개혁, 특히 루터에게는 성경의 가르침과 무관한 잘못된 기독교 교리를 개혁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에라스무스가 지향한 도덕적 개혁과 루터가 지향한 교리적 개혁은 분명 상보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갈등과 대립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의 문제를 부정부패와 매관매직, 음행 등과 같은 도덕적 타락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개혁을 도덕과 윤리 문제의 해결로 간주한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당대의 윤리적 타락을 현상적인 문제로 보았고, 이보다 더 심각한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왜곡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단순히 윤리적인 타락상을 개선하는 것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성경의 최고 권위를 회복하여 교황의 권위 위에 세우는 일과 왜곡된 중세 교리를 말씀에 따라 바르게 교정하고 가르치는 일로 확대되었다.

기독교 인문주의가 더러워진 ‘교회를 정화하자!’는 운동이었다면, 종교개혁은 쓰러져가는 ‘교회를 바르게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포괄적이다. 그래서 전자는 후자를 품을 수 없었지만, 후자는 전자를 품을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들 가운데는 종교개혁을 기독교 교리의 개혁뿐만 아니라, 타락한 사회 제도의 개선과 타락한 개인의 도덕성 회복으로 간주한 최초의 인물은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Zwingli)와 독일남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부써(Bucer) 등이다. 이들은 루터와 달리 인문주의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개혁의 우선적인 과제를 타락한 교회 제도의 개선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첫 세대 개혁파 종교개혁자들 대부분은 교리적 개혁과 더불어 사회적, 제도적 개혁도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바른 교리를 즉각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하는 일도 동시에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종교개혁 정신을 가장 잘 이어받은 두 번째 세대의 종교개혁자는 바로 제네바의 칼빈(Calvin)과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Bullinger)였다. 이들에게 종교개혁은 기독교 교리의 회복과 사회적 제도의 개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교회와 개인의 삶 전체를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 개념이었다. 성경적 인문주의 영향을 받은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라는 루터의 가르침을 단순히 바른 기독교 교리의 회복과 교육을 통한 교회 개혁에만 적용하지 않고, 나아가 사회적인 문제의 개선과 개인적인 삶의 성화에도 적용하는 포괄적인 신앙의 개혁으로 승화시켰다.


*이 글은 <생명나무> 2015년 5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