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장로교회에 유아세례와 성찬참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분위기다. 몇몇 장로교회는 헌법에 유아세례를 만2세까지 제한하고, 입교를 14세 이상으로 규정한다. 사실 이런 규정은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전도 일색의 성장제일주의를 지향하다 보니 이런 규정도 문제 삼는 것 같다. 특히 3세부터 13세까지의 어린이들에게 있는 세례 공백기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아마도 ‘어린이세례’라는 생소한 개념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 한국장로교회의 성찬식은 1년에 많아야 3-4번이다. 물론 더 자주 시행하는 교회도 있지만 극소수다. 특히 대형교회는 더 자주 시행하고 싶어도 예배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1년에 3-4번의 성찬식도 버겁고 부담스럽다. 전도행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소형교회들도 3-4번의 성찬 횟수가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성찬에는 세례교인만 참여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느 예배에 참석했다가 자신을 소외시키는 성찬식을 경험하면 그것을 낯설고 불쾌하게 여길 수 있고, 이 불쾌감을 ‘차별’이라는 민주주의 개념과 연결시켜 교회에 불만을 호소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불만은 교회의 전통과 성격을 몰라서 생긴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성장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한국교회의 반응이다. 그런 불만의 소리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교회라면 당연히 세례와 성찬이 교회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 의미와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가르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이런 반응에 불만을 호소한 교인이 더 불쾌한 감정을 갖고 교회를 떠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교회로서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닐 수 있다.

   쉬운 길이 있다면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성찬참여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쉬운 길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든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 하는 것이 성찬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이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합리적인 이성은 추진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굳이 성찬참여 자격을 세례자로 한정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성찬에 참여하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면 기독교의 물세례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다. 이렇게 결론 내리기에는 심각한 문제의 장애물이 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그것이다. 물론 지상명령 속의 세례가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약속하신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면 그 장애물도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양한 신약성경의 물세례 사건과 말씀, 그리고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2000년 동안 이어온 교회의 물세례 역사 전체를 부인할 수는 없지 않는가?

세례는 무엇인가?

세례가 구약성경만큼 역사가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이전부터 있었던 특정 유대인 집단의 정결의식이다. 세례 요한을 기독교 물세례의 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물세례를 베푼 사건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천국복음은 연속성이 매우 강한데, 그것은 두 분 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세례는 처음부터 ‘회개’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강력한 성령 강림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때 베드로가 자신의 설교를 듣고 고민에 빠진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비슷한 말씀으로 권면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이 말씀에서 회개와 세례와 죄 사함과 성령 받음은 마치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처럼 보인다. 또한 이 네 요소는 구원의 전제 조건,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전제 조건처럼 들린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물세례가 믿음의 주된 요소로 보이는 회개와 죄 사함과 성령 받음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할 신약적인 개념의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은 누구든 예외 없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회개는 세례의 출발점이고 용서는 세례의 종착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초대교회에서는 정결의식인 세례의 물이 인간의 죄를 씻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물세례를 죄 씻음 즉 죄 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는 새 생명의 탄생 사건, 즉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사건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는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영적 탄생 표지, 즉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표지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처음부터 세례식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새로운 지체를 받아들이는 입교의식으로 이해하고 집행한 것은 당연지사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의 초기부터 이미 세례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공인하는 일종의 신분확증의식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만 살펴보아도 재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누구나 세례를 받아야 하고, 이렇게 세례 받은 자만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지체 즉 교회의 공식 교인으로 인정받는 기독교 전통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세례와 성찬은 어떤 관계인가?

 

2000년의 기독교 역사가 아주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은 세례가 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의식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세례가 교회의 또 다른 핵심적인 의식인 성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교회는 성찬 참여의 자격을 수세자 즉 세례 받은 사람에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교회의 가장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세례 받은 자에게만 부여하는 교회 전통이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신약성경은 어디에서도 세례와 성찬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거나 세례 받은 사람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명시적 성경 본문이 없다는 이유로 그 두 요소를 분리할 수 있다거나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너무 성급하고 왜곡된 판단일 수밖에 없다. 세례와 성찬의 상관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고려되어야 한다.

   신적인 기원을 가진 성찬은 가장 중요한 교회전통이지만, 정작 신약교회가 어떻게 성찬을 집행했는지 알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은 사도행전 2장 42절을 통해 성찬이 교회예배의 필수 요소라는 사실을 명시함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여전히 성찬과 애찬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지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1세기 교회 모습을 기록한 신약성경만으로 세례와 성찬이 무엇 때문에 상호 밀접한 관계로 발전했으며 어떻게 이것이 오랜 교회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파악하는 일은 어렵다.

   2-3세기에 기록된 기독교 저술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지금까지 보존된 사료는 더욱 적기 때문에 당시 초대교회를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이란 몇몇 단편에 불과할 뿐, 결코 전체적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3세기 초의 기독교 문헌인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에 의하면 세례를 받기 위해 신앙교육을 받는 사람, 즉 세례예비자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교회가 이처럼 세례와 성찬의 관계를 밀접하게 연결시킨 것은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즉 기독교가 종교로 인정받지 못해 박해받던 2-4세기의 일이다.

   1세기의 신약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성찬 참여의 자격을, 2-4세기 박해시절의 초대교회가 왜 세례 받은 자로 제한했을까? 왜 이런 규정을 만들고 지켰을까? 2-4세기에 있었던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그 기간 내내 지속된 것도 아니고 전국 단위로 이루어졌던 것도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시절을 제외하면 박해는 대부분 국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드문드문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된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 박해 받을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였다.

   이와 같이 불안정한 교회는 틀림없이 고린도전서 11장 말씀의 경고를 신중하게 고려하고 적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즉 교회는 성찬 참여자가 하나님의 심판인 “징계”와 “정죄함”을 받지 않도록, 즉 “주의 떡이니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나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래서 성찬 참여의 자격을 제한하는 것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철저한 세례교육을 통해 세례 받은 자에게만 성찬을 제한하는 것이 박해로부터 순전한 교회를 지킬 수 있는 효과적이고 탁월한 방법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는 누가 받을 수 있는가?

 

신약성경 본문과 2-4세기 기독교 자료에 나타난 세례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성인세례와 관련된 내용이다. 신약시대와 기독교 초기에는 확실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성인 불신자가 기독교 신자로 회심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세례를 위해 공적인 회개와 신앙고백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마치 세례의 대상을 성인으로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것을 근거로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 자료 모두 오직 성인만을 세례의 대상으로 간주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것은 너무 지나친 단순 논리의 결과다.

   신약시대와 기독교 초기에는 주로 성인 남녀가 세례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성경의 명시적 진리이고 교회의 역사적 사실이다. 사도행전 8장 12절에는 빌립의 복음전도로 사마리아 성의 “믿는 남녀가 다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사도전승>에서도 성인 남녀가 세례 받는 모습과 절차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신약성경에는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면 지체 없이 세례를 베푸는 것이 일반적이며 세례 받기 전의 세례예비자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반면에, 교회가 핍박받던 2-4세기 기독교 저술에서는 누구든 최소 3년 이상 세례예비자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런 과정을 수료한 다음 반드시 자신의 입으로 신앙고백을 한 자에게만 세례를 베풀도록 권면하는 규정이 흔하게 발견된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어느 시대보다 신약시대에 특별히 강력하게 나타났다. 이후로는 신약성경이 저술되고 완성됨에 따라 점차 교회는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보다는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게 되었다. 교회 안의 모든 현상과 가르침의 진위여부도 성경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했다.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초기 저술들 중에는 정경으로 인정받을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감안하는 일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신약시대의 세례 풍토와 이후 시대의 세례 풍토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초대교회 세례의 주요 대상은 신앙교육을 받고 자신의 입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연령층의 사람들이었다. 신약시대부터 교회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적 환경을 감안하면 거의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종과 여종도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 아이까지도 세례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신약성경이 유아세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교회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유아세례의 전통을 쉽게 부정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지혜롭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유아세례에 관하여는 역사적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그룹과 부정하는 그룹으로 대별된다.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례를 신앙고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본다. 이들을 사로잡는 것은 다음의 내용과 유사한 성경구절들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믿고 시인하는 신앙고백이 선행되지 않는 세례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고 보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자의식 근거한 의지의 확고한 표현, 즉 고백이 세례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것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그리스도인들이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생겨난 재세례파다.

   초대교회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도 유아세례를 거부했는데, 그의 거부 이유는 재세례파의 그것과 어느 정도 구분될 필요가 있다. 교부는 세례를 죄에 대한 완전한 죽음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세례 이후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한 순결을 지킬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가능한 세례 받는 시기를 늦추도록 권면했다. 경건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생각은 교회가 박해받던 시절에 이미 상당히 보편화 되었고,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의 경우를 감안하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례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증거다. 물론 재세례파도 확고한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에 세례 이후의 삶이 이전의 삶과 확실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중시 한다.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그룹의 주장을 단순화하면 ‘세례 = 구원’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 등식이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여기서 ‘세례’가 ‘물세례’라는 점이다. 불세례 즉 성령세례는 구원과 동일하다. 하지만 물세례와 구원이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신앙고백이 선행된 물세례가 성령세례를 자동으로 동반한다면 물로 세례 받는 것은 곧 구원 받는 것과 동시적인 사건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통상적인 경험으로도 물세례와 성령 받음이 동시에 일어나는가 하면, 때론 물세례보다는 성령 받음이, 때론 성령 받음 보다는 물세례가 선행되기도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유아의 물세례는 성령세례가 동반될 수 없는가? 성경에는 이것에 대한 명시적 표현이 없다. 물세례에는 반드시 신앙고백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신앙고백이 선행된 물세례에 성령세례가 자동으로 동반되는 것이 아니므로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고백이 그 자체로 구원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이 반드시 물세례에 선행되어야 할 당위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자의식이 분명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자신의 입으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상태와 연령대라면 물세례 전에 자발적인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만일 유아에게 물세례를 베푸는 것이 불가하다면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정신지체아는 평생 세례 받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유아나 정신지체아를 대신하여 가족이나 돌보는 사람이 신앙고백을 대신하는 것을 성경이 금하는가? 성경은 오히려 한 사람의 가장이 기독교 신자가 되면 그 집안 식구 모두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런 신약시대의 관습도 이후 개별적인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전통으로 변화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에게까지 고백을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아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이 고백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먼저 세례를 베풀라! 또한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자는 모두 말하길 바란다. 하지만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는 이들을 대신하여 이들의 부모 혹은 이들의 친족 가운데 누군가 말하길 바란다.”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를 언약백성의 자녀로 인정하여 먼저 세례를 베풀고 후에 신앙교육을 통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도록 하는 것을 비성경적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성경이 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은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인가, 목적인가, 아니면 결과인가? 예수님께서도 아이들을 배제한 제자들의 태도와 달리, 그들을 환영하시고 축복하심으로 그들이 천국의 주인공들이라고 칭송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문맥상 유아세례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하지만 그 본문을 유아세례와 연결시키는 시도 자체를 비성경적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역시 부당하다.

 

어린이세례 논쟁, 과연 필요한가?

신약성경만 놓고 본다면 교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항상 모든 연령대의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다. 또한 세례교육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당장 세례를 베풀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기원된 기독교세례는 2000년의 교회 역사를 통해 정착된 역사적 산물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세례 문제의 해결책을 단순히 신약성경에서만 찾는 것은 때론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세례의 근거와 원리는 당연히 성경의 가르침뿐이다. 하지만 세례를 어떻게 시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세한 답을 성경이 모두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회 역사를 살펴보지 않고서는 결코 구체적인 시행의 문제에 대한 좋은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전통이다. 물론 모든 판단의 최종 근거는 오직 성경뿐이다. 또한 교회전통이 아무리 오래되었다 해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성경에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전통을 마치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쉽게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 역시 신중하지 못한 처사요, 때론 심각한 오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래된 교회전통일수록 그 기원과 의미 및 가치를 요모조모로 따져보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교회전통을 과감하게 바꾸고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세례와 관련하여 교회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세례의 중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교육이다. 역사적 교회는 세례를 교회 전체의 존립과 신자의 영적 삶을 좌우할 만큼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유아세례자와 세례예비자는 가정과 교회에서 세례교육을 철저하게 받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장로교는 이 두 가지 모두 잃어버렸다. 돛도 없고 닻도 없는 배가 자꾸 산으로만 간다. 전도행사에 매몰된 한국의 중대형교회에서 성찬뿐만 아니라, 세례조차도 어쩌면 성가신 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교회성장에 도움은커녕 방해거리 정도로 취급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어린이세례에 관한 논쟁, 즉 세례의 나이를 논하기에 앞서, 오늘날 한국장로교회가 과연 얼마나 세례를 중시하는지, 또한 입교하거나 세례를 받기 위한 신앙고백과 신앙교육에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이 바른 순서 아닐까? 오늘날 한국장로교회의 가장 심각한 성례 문제는 세례의 공백기나 성찬참여의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되어야 할 신앙교육의 부제다. 장로교회가 헌법으로 정한 유아세례와 입교 사이의 일정 기간은 사실상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가르치는 교육기간이다. 합당한 근거로 그 기간을 조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 기간 자체를 없애는 것은 교회의 역사를 무시하고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처사다.

   이런 점에서 목회 현실을 핑계 삼아 세례 공백기를 대체할 어린이세례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위험천만한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성경교리와 교회전통을 무시하고 현실과 편의를 중심에 둔 목회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까지도 단번에 먹어치울 수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지금 한국장로교회에는 유아세례, 유아성찬, 어린이세례 등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성례인 세례와 성찬의 의미와 원리가 무엇이며 그것이 교회역사를 통해 어떻게 전수되고 적용되었는지 진지하게 배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교리와 교회 역사를 중심에서 밖으로 몰아낸 목회와 헌법은 모래 위에 지은 화려한 집에 불과하다.

 

 

*이 글은 2017년 <목회와 신학>에서 다룬 ‘어린이세례’(?)라는 주제로 청탁받아 게재된 내용인데, 몇 자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