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면 안 된다!

 

황대우 교수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

 

 

   지금 한국교회는 어떤 사람을 직분자로 뽑는가? 대체로 무언가를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직분자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돈이 더 많은 부자, 가방끈이 더 긴 지식인, 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전문가 등이다. 오늘날 명예와 권력은 이 세 가지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재력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 직장이 번듯한 사람이 교회직분자로 뽑힐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교회직분도 세속적으로 평가된다는 아주 분명한 증거다.

   물론 교회가 직분자를 선출할 경우, 지식이나 재산, 직장 등과 같은 세상적인 요소만 고려하지는 않는다. 교인들은 직분자가 될 사람의 신앙생활, 즉 경건의 모양도 고려한다. 그래서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반드시 십일조를 내어야 하며 또한 가끔이라도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는 교인을 직분자로 선출하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직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직분자를 세우는 일에 세상적인 조건을 고려하는 것은 확실히 부당하다. 또한 경건의 모양을 교회생활에 한정하는 것 역시 주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와 같은 요소들을 장로와 집사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지도 고려하지도 않는다. 즉 예배참석이나 십일조, 새벽기도회 등과 같은 요소들을 직분 선출을 위한 일종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요소들은 너무 당연하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는 중혼자가 아닌 결혼한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되 새로 입교한 교인과 선한 증거를 얻지 못한 외인을 세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가르친다. 직분의 조건은 책망할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망할 것이 없으려면 모범적인 가정생활과 절약, 단정함, 나그네 접대, 잘 가르침, 정중함 등을 실천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않아야 하며 폭력과 다툼과 술을 삼가야 한다.

   또한 신중함, 절제, 관용 등의 성품을 가진 자로서 돈을 사랑하지 않고 탐심이 없어야 하며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충성스러워야 한다. 이런 조건들은 경건의 외적 요소이면서 동시에 내적 요소이기도 하다. 성경이 제시하는 자격 조건들이 오늘날 교회의 직분 선출 기준과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 교회직분의 성경적 조건은 경건의 내적 신앙이 외적으로 열매를 맺는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반면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회적인 조건이 훌륭하고 경건의 모양을 어느 정도 갖춘 교인이나 사회적인 조건을 잘 갖추진 못했지만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을 직분자로 선출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이는 외적 모습이 평가 기준이고 자격 조건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장로, 집사, 권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일단 헌금과 새벽기도에 열심을 보인다. 헌금과 새벽기도는 그 사람의 경건을 평가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조차도 천 명이 넘는 교회에서는 무용지물일 것이다. 대형교회 교인들은 서로 누가 누군지 잘 모른다. 장로나 집사, 권사는 더 잘 알까? 부교역자들도 자신의 담당 교구나 구역이 아니면 잘 모른다. 담임목사조차도 교구를 담당하는 부교역자를 통해 교구 성도들의 사정을 보고 받지 않으면 모든 교인의 사정을 일일이 파악하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면 성경이 요구하는 합당한 직분자를 세우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특수한 목적에 부합하는 교인

 

   어느 교회는 한 신실한 권사의 남편을 장로로 선출했다. 그는 신앙생활 한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장로가 될 만큼 신앙의 본을 보이는 분명한 증거도 없었지만 돈 잘 버는 곳의 사장이었고, 매월 적자인 교회재정을 사비로 매워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담임목사는 그가 장로가 되면 지금보다 더 교회에 충성(?)하리라는 기대 때문인지 그를 강력한 장로 후보로 올렸다. 하지만 교인들은 그를 장로의 적격자로 여기지 않아 뽑지 않았다.

   장로로 뽑힐 때까지 투표는 계속되었고 결국 담임목사의 뜻대로 그는 장로로 피택되었다. 상가교회 형편에 그런 재력가는 아마도 재정적인 측면에서 큰 위로와 희망이었을 것이다. 교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를 선출했지만 이 문제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지자 불만을 가진 일부는 교회를 떠났다. 그 재력가는 교회의 재정을 위해 꼭 필요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장로로 세워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도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교회마다 직분자를 세워야할 다양한 특수 목적과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직분은 교회의 특수 목적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건축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직분자를 뽑는 교회도 있다. 이런 경우는 장로 얼마, 집사 얼마, 권사 얼마라고 광고 한단다. 이것은 중세의 성직매매 이상의 악행이다. 성직매매는 종교개혁의 한 원인이었을 만큼 중세교회의 심각한 타락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개신교회가 그런 짓을 용감하게(?)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불행하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성직매매가 성행하고 있다. 당사자들은 ‘모든 것이 다 교회를 위한 일’이라 변명한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결코 나쁘지 않단다. 교회건축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거룩한 일이고 따라서 거룩한 일을 위한 것이라면 성직매매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황당한 논리다. 또한 직분자가 되면 어차피 감사헌금을 할 것인데 교회건축을 위해 교회재정에 도움이 되도록 미리 헌금 액수를 알려주는 것이 무슨 대수냐며 오히려 큰 소리로 따진다.

   이런 사고방식에 갇힌 사람은 교회세습도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반성은커녕 오히려 교회세습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이라고 비난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상도 교회도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주의 세상이다. 성공 지상주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돈과 권력의 노예로 전락한 한국교회가 성공 철학의 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스스로 직분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

 

   이런 사람이 직분을 받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자격 미달이기 때문이다. 교회직분의 가장 중요하고도 최우선적인 미덕은 바로 겸손이다. 기독교는 겸손의 종교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미덕이다. 우리 주님은 섬기러 오신 왕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동역자로 삼으시는 교회 직분자들의 기본적인 미덕은 겸손이다.

   기독교의 충성은 그리스도의 겸손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직분자에게 겸손 없는 충성은 조직을 위한 조폭의 충성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 겸손히 충성하는 자만이 합당한 교회 직분의 자격이 있다. 교회 직분은 세상의 어떤 다른 직분이나 직위와도 같지 않다. 그것은 소원의 대상도 탐욕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섬김의 수단일 뿐이다. 섬김을 통해서만 존경을 받는 것이다.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섬김, 즉 사랑이 교회 직분의 출발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시다. 모든 지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즉 자신의 자리에서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길이다. 교회 모든 직분자는 섬기는 자, 즉 봉사자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인 교회를 사랑하시고 섬기듯이 교회를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교회 직분자는 다른 연약한 지체들을 몸인 교회에 더욱 단단히 붙어 있도록, 그리스도의 명령에 더욱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본을 보여야 한다. 오직 섬김과 사랑으로! 그래서 그는 잘 가르치는 자이면서 동시에 잘 돌보는 자여야 한다. 서구 사회의 ‘장관’(Minister)도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종의 섬김’(ministerium)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미니스터’는 기독교의 목사와 설교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직분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적인 욕심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나와 비슷한 누구도 되는데 나도 충분히 자격 있어!’ ‘나보다 못한 누구도 직분자인데 왜 내가...?’ ‘내 친구, 동료 누구도 집사, 장로인데 나는 왜...?’ ‘교회 직분자가 되는 것은 나의 사회적 신분에 걸맞아!’ 등과 같은 일종의 비교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래서 ‘직분자가 되고 싶다’ 혹은 ‘직분자가 되어야 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직분자가 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할 것이다. 중대형교회의 경우에는 교회안내와 같이 많은 교인들과 접촉할 수 있는 부서에서의 봉사를 자원한다. 또한 교회의 유력한 직분자와 친분을 쌓는다. 물론 담임목사와 친해지는 것은 필수다. 작은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나 가장 영향력 있는 특정인과 친해지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이 투표에서 떨어지면 교회를 옮길 고민에 빠지게 된다.

 

 

직분가 되기를 원하는 교인

 

   기필코 직분자가 되어야 한다는 야심과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을 선전하고 문자나 전화로 자신을 뽑아달라고 호소한다. 교회 직분 투표를 마치 세상의 투표와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 목사 중에도 이런 착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직분자 투표는 대선이나 총선 혹은 학교의 반대표를 뽑는 것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직분자 선출은 인기투표가 아니다. 또한 자원하는 사람을 뽑는 것도 아니다.

   직분자 선출은 개체교회에 충성할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께 충성한 사람을 뽑는 일이다. 세상의 직분이나 직위는 그 자체에 권위와 권력이 내재되어 있지만 교회직분의 권위와 권력은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만 있으며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만 발휘된다. 충성과 섬김의 대상이 교인이기 전에 먼저 머리이신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이 곧 지체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다. 이것이 교회직분의 독특한 성격이다.

   교회직분선출이란 자원하는 사람을 뽑는 세상의 모든 투표와 달리,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조건의 사람을 뽑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스스로 교회직분에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떤 자격도 가치도 없는 죄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자신의 신앙적 삶을 지탱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면 감히 교회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우는 일은 스스로 자격 없는 사람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동역자로 삼는 은혜로운 사건이다. 그러므로 봉사자로 선출된 자는 전혀 자격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왜 선택하셨는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묻고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직분이란 누군가 인간적인 능력이 출중해도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 즉 구원사역이기 때문이다. 모든 구원사역은 오직 은혜로만 이루어진다.

   한 마디로, 스스로 직분가 되기를 원하는 교인은 교회직분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교회직분의 기본 조건

 

   직분자를 뽑을 때 교회도 교인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자격 조건이다. 그 조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상당히 까다롭고 엄하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사실상 참된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 일정 기간 영적 훈련을 기쁜 마음으로 받을 경우 나타나는 몇몇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직분자로 세워야 한다. 신학교도 마찬가지로 신학생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목사 후보생들만 보아도 그 교단교회의 미래가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교인을 가르치고 직분자를 세우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성공주의가 교회 안에서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성공주의는 교회직분을 선출할 때도 작용한다.

   교회를 성공주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성공주의에 사로잡힌 교인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고난의 십자가로 돌리도록 가르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영광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고난 받기 위해 오신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닌 그리스도의 고난을 선택해야 마땅하다.

   죽어야 부활을 경험할 수 있듯이 고난을 받아야 영광에 이를 수 있다.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인생의 고난을 모두 대신해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는 우리 자신이 져야 한다. 우리가 각자 자신의 십자가와 고난을 감당하는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직분의 기본 조건은 겸손이다.

   겸손하지 않은 자를 교회의 직분자로 뽑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또한 겸손으로 시작한 직분자가 겸손을 잃어버리면 직분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고 만다. 교회직분의 첫 번째 조건도 겸손이요, 마지막 조건도 겸손이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삶을 체득하고 모범을 보이는 교인에게 직분을 허락하셔서 자신의 교회를 섬기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직분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아니면 자신의 어떤 능력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무용하다는 사실을 날마다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칭찬에 목메지도 일희일비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자, 그가 합당한 교회 직분자다. 인간적인 계획과 시도는 인간적인 결말로 도달하기 마련이다.

   교회직분의 유일한 출발점은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이 교회직분의 기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섬기도록 동역자들, 즉 직분자들을 세우시는 것이다. 그래서 직분자 선출은 거룩한 일이다. 교회직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 거룩한 일을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목적이나 명분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다만 악용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직분의 기초이실 뿐만 아니라, 목적이시다. 직분의 최고 목적은 그분의 몸의 지체들을 사랑으로 섬겨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세상적인 목적은 모두 가짜요 사기다. 따라서 다른 목적으로 직분자를 선출하거나 직분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거룩한 일을 악용하는 악행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모범, 즉 겸손한 사랑만이 교회직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