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황대우


1. 이단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단’(이단(異端)이란 ‘다를 이’에 ‘끝 단’자로 구성된 단어이며 ‘끝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단을 의미하는 영어 명사 ‘헤러시’(heresy)의 어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하이레시스’가 신약성경에서는 ‘사두개파’(행 5:17), ‘바리새파’(행 5:17), ‘파당’(행 26:5; 고전 11:19; 갈 5:20) 등과 같은 ‘분파’를 의미하는 중립적 개념이다. 1세기의 사도들은 일종의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2세기의 속사도교부들은 그 용어를 부정(否定)과 차별(差別)의 의미를 내포한 평가적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이단의 의미다. 그러므로 이단이란 용어는 이미 2세기부터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개념이다.

영국 신학자 맥그래스(McGrath)에 의하면, “이단은 우발적이든 고의든 주인의 집안에 대안적 신념 체계를 세우는 수단, 즉 일종의 트로이 목마 같은 것이다. 이단은 겉으로는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괴적 씨앗을 심는 신앙의 원수이다. 그래서 숙주 속에 자리 잡고 숙주의 복제 시스템을 이용하여 지배력을 장악하려는 바이러스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정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용어는 아마도 ‘사이비’가 아닐까?

‘닮을 사’, ‘말 이을 이’, ‘아닐 비’로 결합된 사이비(似而非)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다른 것’이다. 이 용어는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과 일맥상통한다. 용어상 ‘사이비’는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이단’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둘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단’으로 분류되기 전의 이단 의심 상태를 ‘사이비’라 말하기도 한다.

‘사이비 같다’는 말은 ‘이단적이다’라는 뜻이다. 오늘날 ‘이단’이란 말은 ‘완전히 다른 복음’, 즉 기독교에 포함시킬 수 없는 단체나 모임에 적용하는 용어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 기준, 즉 이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기독교가 아닌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양성’에 관한 정통 기독교 교리를 부인하거나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의 대상인 신론과 기독론이 다를 경우, 이것을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단이란 교리적 개념이다. 그것도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만 국한 되는 개념이다. 한국의 기독교 이단 대부분은 교주를 ‘구세주’로, 혹은 ‘성령’의 현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단들은 기독교의 구원과 다른 구원론을 가르친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를 다르게 이해하고 가르치면 이것은 기독교가 아닌, 이단이다. 따라서 이단의 세례는 기독교 세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삼위일체’ 신은 내용상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록 이단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기존교회는 이단의 세례를 기독교 세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삼위일체론적 이단과 기독론적 이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파와 같은 이단도 있고, 귀신론으로 유명한 김기동의 아류들 같은 이단도 있다. 교회론적 이단도 있는데, 류광수의 다락방교회가 대표적이다. 다락방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분리주의 분파인 도나투스주의 이단과 유사하다. 교회 분열을 획책하기 때문이다. 교리상 펠라기우스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도 이단으로 분류되지만 구원 받지 못할 이단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구원에서 배제되는 이단과 배제되지 않는 이단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인가?



2. 교리적 이단과 실천적 이단

흔히 이단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교리적 이단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천적 이단 문제도 심각한 실정이다. 교리적 이단이란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핵심 교리의 수용 여부에 따라 비(非)복음(Non-Evangelism)과 반(反)복음(Anti-Evangelism)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반복음적 이단은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양성론 같은 기독교 핵심 교리를 부인한다.

비복음적 집단은 기독교 핵심 교리를 벗어나지는 않지만 성경의 다른 주요 교리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실천적 이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복음적 집단이나 비복음적 집단 가운데 상당히 건전해 보이는 단체들도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몇몇 주요 교리들에 대한 심각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삶을 따르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건전성과 불건전성은 교리적인 문제 보다는 오히려 삶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불건전한 단체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만든 교리에 사로잡혀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강요하는 경우다. 한국에서 통일교나 천부교(=전도관), 구원파 등은 반복음적이면서 동시에 비복음적인 집단의 전형이다.

한국의 기독교 이단들의 공통점은 교주를 신격화하고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데, 이장림의 ‘다미선교회’(다가올미래선교회)와 같은 극단적 종말론 이단이다. 한국의 이단들은 교주가 자칭 성자든 성령이다. 이런 경우, 교주와 추종자들은 때론 폭력조차도 서슴지 않고 자신들의 방어수단으로 이용할 정도로 똘똘 뭉쳐 하나가 된다.

한국형 이단들은 불건전한 교리의 비복음적 단체로 시작하여 반복음적인 이단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신앙적 열심이 너무 지나쳐 극단적인 행동을 추구하고 교주의 말을 맹종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복음적 이단이 명백한 교리적 이단인 반면에, 비복음적 이단은 불건전한 교리와 극단적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실천적 이단이다.

천주교, 즉 로마가톨릭교회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교리적 이단으로 분류될 수 없고, 또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기독교적인 삶의 모범으로 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불건전한 집단도 아니다. 물론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에 대해 존경을 넘어 숭배하는 경향과 자세 때문에 이단적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유일한 중보자 교리도 확고하게 견지한다는 점에서 천주교를 구원에서 배제되어야 할 반복음적 이단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천주교가 마리아, 천사, 성인, 교황 등과 관련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교리적으로 심각하게 왜곡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백한 기독교 이단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국교회는 천주교보다 훨씬 심각한 개신교 이단들로 인해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활개를 치고 있는 이단적 성향의 사이비 개신교회들이 넘쳐난다. 총회에서 불건전한 단체로 규정한 인물이나 교회는 대체로 사이비 경향이 짙다. 따라서 총회가 불건전하다고 판단한 인물이나 단체와는 교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무시하는 교회도 많다.

반복음적인 교리적 이단이나 불건전한 실천적 이단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왜곡과 직결된다. 사실상 모든 이단 문제는 복음에 대한 오해, 즉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왜곡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건전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건전한 성경해석은 ‘성경이 성경 자체의 해석자’(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원리에 충실하다.

이것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와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을 의미한다. ‘오직성경’은 성경의 권위를, ‘전체성경’은 성경해석의 원리를 대변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문체와 상황으로 이루어진 성경의 다양성이라는 구슬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교리적 통일성이라는 줄에 꿰어져야 한다. 교리적 통일성에 근거한 건전한 성경해석은 이단 방지의 초석이다.



3. 최상의 이단 대처법

삼위일체론적 이단과 기독론적 이단은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것이므로 확실한 기독교 사이비 이단이다. 이런 이단들은 대부분 구원론과 교회론에서도 이단적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시라고 고백하지만 전통적 구원론과 교회론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크게 벗어난 집단이나 단체들도 경계해야 한다.

확실한 사이비 이단뿐만 아니라, 기독교 유사 집단을 구분하고 대처하는 최상의 방법은 성경을 바르게 알고 가르치는 길뿐이다. 아무도 성경의 진리를 100%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인 성경 전체의 통일성이 성경 진리에 대한 해석의 열쇠다. 성경의 다양성은 성경의 통일성을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기독교의 복음과 다른 결론, 즉 다른 복음, 인위적인 가공의 복음에 도달하기 십상이다.

이단적 성경 해석에는 3가지 특징적 원리가 묘하게 서로 얽혀 있는데, 그것은 문자주의(Literalism)와 신비주의(Mysticism), 그리고 공식주의(Uniformism)다. 문자주의는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로, 신비주의는 신앙주의(Fideism)로, 공식주의는 퍼즐주의(Puzzlism/ Crosswordism)로 통한다. 이 셋의 절묘한 합체로 사이비 이단이 양산된다.

문자주의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문자’라는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데, 이단은 자기주장에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리를 자주 남용하고 왜곡한다. 남용과 왜곡은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의 교리적 통일성에 근거한 문맥적이고 문법적 이해보다는, 단어 하나하나가 성령의 영감으로 선택되었다는 이유로 자기주장의 근거가 되는 단어나 문장을 문맥에서 분리하고 독립시킬 때 자주 발생한다.

절대적 권위에 근거한 문자는 신앙주의의 극치다. 신앙주의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 믿음, 즉 맹신이다. 묻고 따지는 이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원리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묻고 따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곧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안셀무스(Anselmus)가 가르친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원리다. 묻고 따지는 근거는 오직 성경이지만, 이 성경을 해석해온 교회역사도 무시할 수는 없다.

신앙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신비주의다. 신비주의는 절대적 권위를 부여 받은 ‘문자’에 신비롭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마술 같은 재주, 즉 속이는 능력이 있다. 성경에 대한 신비주의적 해석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미 중세교회가 가르친 성경 해석의 4 단계 가운데 마지막 최고 단계다. 하지만 중세교회의 신비주의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반면에, 이단의 신비주의 해석은 교주 중심적이다. 이단은 교주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한다.

절대 권위의 ‘성경 문자’가 신비주의라는 주술과 마술로 최면을 걸면, 맹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신비주의라는 현란한 속임수에 빠져들고 열광한다. 이 열광을 식지도 의심하지도 않게 만드는 기술이 퍼즐주의다. 퍼즐주의는 문자를 끼워 맞추는 일종의 이성적 속임수다. 지식인들이 이단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러한 퍼즐주의 때문이다. 그럴듯한 질문과 답변의 퍼즐조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성경구절로 짜 맞추는 속임수로 맹신자들의 손발을 꽁꽁 묶는다.

모든 이단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공식인 퍼즐조각, 즉 교리가 있다. 이것은 마약처럼 환각 증상으로 사람들을 홀려 교주에게 충성하도록 만든다. 성경에 기초한 건전한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통해 사람을 홀리는 기술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신앙과 교리를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만 가르치고 그리스도께로만 인도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동원하여 우리를 부르신다. 그중 하나를 다른 둘보다 더 크게 사용하실 수는 있지만, 둘을 배제한 하나만으로 부르시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서로 균형 있게 작용하는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신기하고 새로운 것이라고 모두 좋은 아니다. 신기하고 새로운 가르침일수록 성경과,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교리로 묻고 따져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