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전도는 전도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지상명령 때문에 전도를 교회와 신자의 사명으로 여긴다. 전도가 그리스도의 지상교회가 수행해야 할 최고의 임무와 사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혹자는 전도를 무조건 실행해야 하는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어떤 환경과 조건에도 불문하고 과감하게 전도의 열심을 내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인들은 불교의 법당이든 이슬람 국가든 가리지 않고 순교를 각오하고 공격적으로 전도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전도하도록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고 명령하셨을까? 지혜와 순결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혜롭게 전도하고 순결하게 전도해야 한다. 파송 받은 제자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자를 고쳤는데, 그들의 전도행위는 지혜와 순결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방전도는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고유하고도 전통적 전도방식이다. 요즘 이런 노방전도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기존교회는 점차 노방전도를 포기하는 추세다. 그래서 이전과 달리 노방전도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물론 역전과 같은 광장이나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에서 찬양하는 전도팀을 가끔씩 볼 수는 있다.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경쟁적으로 노방전도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교회의 전도 풍속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 때 가가호호 방문 전도도 열풍이었다. 이것은 노방전도의 일종인데, 주로 이단들이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전도 방법이기도 하다. 기존교회에서는 가가호호 방문 전도가 거의 사라진 듯하다. 아직도 집집마다 전도지를 돌리는 교회가 있기는 하지만 아파트 출입이 이전에 비해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에 도시에서는 자연스럽게 가가호호 방문 전도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다. 이런 일은 교회의 대형화와 도시화 이후, 교회가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고 사회가 교양을 추구할 때 나타나는 흔한 현상이다.

 

   노방전도가 사라져 가는 지금, 교회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실행하고 있는가? 교회는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나 친한 이웃 가운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실상 교인들이 전도축제나 이웃초청 전도주일에 데려오는 사람들은 다른 교회에 다니는 지인이거나 양로원 등에서 돈으로 매수(?)한 사람들일 경우가 심심찮게 많다.

   저런 일을 벌이는 사람들은 대체로 전도행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은 욕심을 가진 교인이거나 교회 중직자일 가능성이 높다. 교회 중직자의 경우, 체면과 교회의 압박 때문에 누구라도 당일에 데려와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부탁하게 되는 것이다. 때론 전도 품앗이가 성립된다. A교회 교인과 B교회 교인이 자기 교회의 전도축제가 있을 때 서로 가주기로 하는 것이다.

   다른 경우는 대표적으로 양로원에 가서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하는 것이다. 양로원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조건, 전도축제 주일에 교회를 오면 일정액의 돈을 주겠다는 약속 등으로 사람들을 매수한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전도행사에 걸려 있는 상품 욕심이 발동하거나 교회에서 전도를 잘한다는 소문과 더불어 담임목사에게 눈도장 찍힐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위의 두 사례는 전도가 아니다. 전도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알려주는 일이 전도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사람들에게 교회에 한번 “와 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에 데려올 수 있다. 교회에 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전도일까?

   사람을 교회에 한번 데려오는 것이 전도라고 볼 수는 없다. 전도는 노방전도처럼 길거리에 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로나 문서로 알리는 것이다. 굳이 특정 교회에 와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복음이 그의 마음에 가닿으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신다. 물론 진심으로 전도하는 일 역시 성령께서 이끄신다. 전도의 알파와 오메가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전도는 특정 개인이나 교회의 자랑거리일 수 없다. 다만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탄복하여 더욱 겸손하게 될 일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전도를 잘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칭송과 존경을 받는다. 교회는 전도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전도를 잘 하는(?) 특정인을 보란 듯이 추켜세우는 일에 열심을 낸다. 왜 그럴까? 그것은 모든 교인들이 그를 부러워하고 그 사람처럼 열심히 전도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고구마전도법’, ‘진돗개전도법’, ‘전도가 가장 쉬웠어요’ 등과 같은 전도 책자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전대미문의 일이 발생한다.

 

   전도는 장사가 아니다. 전도는 복음을 파는 행위가 아니다. 물론 성경과 복음을 설명하는 책자들을 사고파는 일은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적 전도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 변질된 전도와 질이 다르다. 전도는 ‘우리교회 교인 만들기’와 무관하다. ‘우리교회 교인 만들기’는 전도의 결과일 뿐이지, 결코 전도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성경의 전도 원리가 실종 상태이기 때문에 변질된 전도가 판을 치는 것이다.

 

   전도의 내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렇다면 전도의 목적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선물로 제시하는 일이다. ‘전도행위’ 자체가 전도의 목적일 수는 없다. 교회는 전도내용과 전도행위를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교묘하게 혼합하기 때문에 전도를 변질시키는 것이다. 전도의 순결성이 더렵혀지고 말았다. 전도자는 먼저 순결해야 한다. 순결한 마음으로 전도해야 하는 것이다. 순결성을 잃어버린 교회의 전도는 이미 전도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전도의 순결을 잃었을 때 능력이 사라지는 일을 경험했다. 그들은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외아들을 고쳐달라고 데려왔을 때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셨다. 그 때 제자들이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이 부족...”, “기도 외에는...”이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순수한 믿음에 근거한 기도’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한 마디로 믿음의 순결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누가복음 9장은 제자들이 믿음의 순결성을 잃어버린 몇 가지 예를 제시한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다투었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금했다. 이 두 사례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인간적으로 계산했다는 뜻이다. 전자의 문제는 예수님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다툰 것이고, 후자의 문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예수님의 제자들인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권리라고 생각하여 차별했던 것이다. 이것은 전도의 순결성인 믿음과 기도를 잃어버린 문제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제자들처럼 전도의 순결성을 잃어버렸다. 전도하는 사람은 오직 믿음과 기도로 전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 하나님만 의지하고 수행해야 하는 것이 전도이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성령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은 이미 전도의 순결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파송하는 제자들에게 전도의 순결을 잃지 않도록 두 벌 의복도 지팡이도 돈도 갖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 아닐까?

   의복이나 지팡이나 돈은 전도여행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때론 ‘전도’라는 목적이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염려하셨다. 전도는 ‘우리교회 교인 만들기’가 아니다. 전도의 핵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고 알리는 것이 전도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평안, 즉 하늘의 평화를 전하는 것이 전도요, 또한 전도의 순결성이다.

 

   전도에는 순결만 아니라, 지혜도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를 파송하실 때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복음인 하나님의 나라를 지혜롭게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환영받지 못할 방법으로 전도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추수를 위한 일꾼은 익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익혀서 추수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익은 곡식만 추수하도록 파송된 사람들이다.

   전도 대상이 이리들이고 전도자가 어린 양이라면 삼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없이는 전도란 불가능한 사역이다. 전도자는 어린 양에 불과하지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기 때문이다. 전도는 성령 하나님 자신의 일이므로 전도자를 지혜롭게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전도를 위한 성령의 지혜가 전도자에게 나타날 때 비로소 전도의 용기가 생고 담대한 전도가 시작될 수 있다. 지혜는 아주 특별한 경우 외에는 결코 예의 없거나 상대를 무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는 오히려 예의를 갖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전도에 필요한 지혜일 것이다.

 

   또한 전도의 지혜는 결코 속이는 것이 아니다. 전도에는 어떤 속임수도 없어야 한다. 한 마디로 전도는 정직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도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거짓은 한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다. 따라서 돈으로 매수하거나, 속여서 한번만 교회에 와보라는 식의 전도는 전도일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전도를 모욕하는 행위다. 전도는 진실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진정성 있는 전도가 절실한 시대다.

 

   지혜와 순결이 동반되지 않는 전도는 전도가 아니다.

 

*이 글은 "개혁정론"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