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7.31 갱신과 부흥30호 논문 투고 기간
*2022.7.11 제14회 신진학자포럼(이충만 임영동 김민석)
*피터마터 버미글리 시편기도(번역:김진흥) 출판
*2021.8 창조와 섭리:종교개혁에서 한국개혁신학까지(이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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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기간: 12월1일~1월31일, 6월1일~7월31일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갱신과 관련한 저명한 인사들의 칼럼을 소개합니다.
글 수 141

설교 평가: 청중의 자세와 설교자의 자세

                                                              
※ 아래 글은 필자 황대우 목사가 SFC 총동문회에서 발행하는 「개혁신앙」 7월호에 실린 글의 원고를 「개혁신앙」의 허락을 받아 편집 후 게재한 것입니다. - 편집자


누군가에게 자신의 무엇을 평가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설교평가는 목사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설교평가가 금기시되어 있다. 설교 자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간주할 정도로 너무 존중하여 평가가 금기시되는 것일까? 평가가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에 설교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고 설교의 무게는 천근만근일까? 전혀 아니다. 설교의 권위는 더 이상 가라앉을 곳이 없는 해저 심연 바닥까지 떨어져 있고 설교의 무게는 너무 가벼워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 깃털 같다.

설교자 앞에서는 평가는 고사하고 설교 자체를 논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은혜 받았습니다!” 라는 인사말이 고작이다. 하지만 사실 설교평가는 누구나 아무 때나 어디서나 너무 쉽게 한다. 다만 설교한 당사자 앞에서만 하지 않을 뿐이다. 설교평가의 금기는 바로 ‘설교 당사자 앞’에서만 지켜지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의 설교평가는 지극히 사적이다. 앞에서는 못하고 뒤로는 다 한다. 그것도 굉장히 저질스럽게 한다.

서구 사회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이 ‘욕’이 되어버린 것처럼 우리에게 ‘설교’라는 단어는 더 이상 경청의 대상이 아닌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또 설교한다!’ ‘이제 설교 그만해라!’ 등. 이런 말들은 더 이상 상대방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을 때 하게 되는 가장 강한 거부의사의 표현이다. 이런 표현들은 교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다. 교인들이 매우 자주 말하고 듣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표현일 것이다. 설교와 관련된 이런 교회 내적인 표현이 설교의 권위를 허무는 포도밭의 여우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와 달라도 너무 다른 환경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기독교 신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의한 것에 대해 알면 아마도 상당히 당혹스러워할지 모른다. 아니, 경악할 것이다.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아마도 설교를 사람이 하는 것으로 여기는 그들의 보편적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이 하는 설교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가? 너무 지나치게 권위적인, 신성모독에 가까운 발상이 아닌가?’ 라고.

‘설교는 사람이 한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설교하는 것 맞다. 하지만 이것은 ‘2% 부족한’ 생각이다. 경우에 따라 2% 부족한 것은 단순히 조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본질 자체를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염기가 2% 부족한 바닷물은 사실상 바닷물이 아니다. 이것은 정확히 설교에도 해당하는 원리다. 사람이 설교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설교를 사람이 하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때로는 결핍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본질의 유무(有無)를 좌우하기도 한다. 설교는 분명 사람이 하는 것이 맞지만 이것이 설교의 전부가 아니다. 설교의 핵심은 실상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이 빠진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설교에서 설교하는 자도, 설교를 듣는 자도 모두 집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변화되는 통로다. 이 사실을 망각해버리면 설교는 하는 사람에게든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든 설교는 단지 사람의 사적인 언변에 불과하게 된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신적 권위로부터 기원한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은혜가 될 수 없다. 즉 참된 은혜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부터 나온다. 말씀의 권위 없이는 참된 은혜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은혜 받았습니다!” 라는 인사말에서 그러한 신적 권위로부터 나온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가? 설교의 은혜는 달콤한 말, 재미있는 말, 감동적인 말의 향연이 아니다. 설교는 ‘내 귀에 캔디’(ear candy)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설교는 내 귀에 즐거운 것, 내가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설교의 주파수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져야 한다. 그 주파수가 정확히 맞아 떨어질 때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주파수를 맞추는 일은 단지 설교를 듣는 청중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하는 설교자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다. 설교자에게 가장 큰 유혹거리는 설교를 ‘청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인기성 발언’(lip service)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설교자 자신이 설교의 주인이 될 때 이런 변질은 너무 쉽고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설교에서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 즉 ‘하나님의 뜻’이다. 설교를 통해 설교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 하고, 듣는 청중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설교는 은혜의 수단이고 은혜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없는 은혜로운 설교는 참된 은혜가 아닌, ‘내 귀에 캔디’일 뿐이다. 설교를 듣는 청중의 가장 큰 오해는 ‘내 귀에 캔디’가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세를 가진 청중만이 설교를 바르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설교를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가 평가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지만 평가하기 위해 설교를 듣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평가 기준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평가될 수 있고 반드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듣는 청중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의 시답잖은 설교라 할지라도 먼저 그 설교 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 즉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설교하는 목사를 무조건 존중하라는 뜻이 아니다. 목사도 흠 많은 사람이고,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는 청중과 별다를 바 없는 죄인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설교자로 세운 것은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부족한 내용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통해 청중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자신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난청 지역은 주파수 맞추기가 쉽지 않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난청 지역과 같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향해 설교의 안테나를 높이 세워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 잡음 없이 수신될 수 있도록 설교의 안테나를 말씀으로 조정하고 고정시켜야 한다. 그래야 청중이 하나님의 음성을 보다 분명하게 들을 수 있고, 다른 잡음 소리와 혼동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주파수를 맞추는 일은 청중 자신의 몫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함으로써 은혜를 받고 싶다면 청중은 성실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귀와 마음을 하나님 말씀의 주파수에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설교자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설교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설교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설교 그 자체가 은혜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즉 훌륭한 설교 그 자체가 은혜의 보증수표는 아니라는 말이다.

은혜의 보증수표는 오직 성령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성령 하나님만이 은혜의 저장소이시며 은혜의 수여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설교와 감동적인 설교만 있으면 은혜는 자동적으로 받게 되어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하다. 참된 은혜는 훌륭한 설교자나 훌륭한 설교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우리 각자의 폐부를 찔러 쪼개는 능력인 감동으로 제공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다.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기 위한 설교평가는 청중의 일만은 아니다. 설교하는 목사도 자신의 설교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설교자든 청중이든 설교평가의 시작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설교자든 청중이든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겸손한 자세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는 열정을 겸비하지 않고는 결코 설교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 설교에서 진리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열정과 겸손이 있을 때 평가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설교 평가는 설교자가 진리의 소리를 각색하여 왜곡하거나 변질시킬 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즉 기독교 교리에 벗어나는 내용으로 설교하는 것을 방지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16세기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수용한 도시에 설교 평가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이런 설교 준비와 평가를 위한 모임의 이름은 도시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이런 모임은 통해 설교를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게 잘 준비하고 설교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일종의 한 지역 내의 교역자모임이었는데, 오늘날 시찰교역자회 같은 것이다. 16세기 제네바에도 “꽁그레가씨용”(congregation)이란 이름으로 매주 금요일 오전에 모임이 이루어졌다.

설교에서 자신이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거나 듣고 싶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설교를 평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설교 위에 자신을 세우는 버릇없고 꼴사나운 짓이다. 설교 형식이나 스타일, 구성 요소, 예화 등이 설교 평가의 주요 대상이 된다면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듯이 설교는 더 이상 설교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설교 평가의 주요 대상은 설교 본문의 핵심 내용이어야 한다. 설교자도 청중도 설교 본문,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내용을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했으며 적절하게 적용했는가’이다. 이것이 설교 평가의 주요 대상이고 핵심이다.

설교자는 ‘설교 본문의 바른 해석과 효과적인 전달과 적절한 적용’에 대한 평가를 두려워하거나 금기시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자신의 설교를 냉철하게 평가해주기를 바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에 우쭐하게 되고, 그런 말을 몇 번 듣게 되면 정말 자신의 설교가 대단한 줄 착각하기 십상이다. 세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듯이 완전한 설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실하게 준비한 설교는 자신 있게 전하는 것이 당연지사지만, 설교를 하고 난 후에는 언제나 자신의 설교가 부족한 것이요, 부끄러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지혜요,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바른 자세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거꾸로 한다. 즉 설교는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으면서 설교한 후에는 스스로 자신의 설교가 대단한 것인 양 으스대는 것이다. 이런 목사들은 자신의 설교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아멘’을 강요하기도 한다.

설교 평가를 금기시하고 정당한 설교 평가의 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가 훨씬 더 많은지도 모른다. 교회가 크면 클수록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인 것처럼 신성시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고, 나아가 그를 신적인 존재로 받들기 십상이다. 이런 교인들을 목회하는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의 말투와 행세를 보면 한결같이 자신이 정말 하나님과 거의 동격인 것처럼 착각하는 모양새다. 반면에 이름 없는 소형교회 담임목사들은 저 유명한 ‘목사 아래에 있는 목사’로 취급되고, 그의 설교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불균형하고 비정상적인 현실 때문에 이단이 활개쳐도 막을 방법이 없다. 또한 큰 교회 담임목사가 대형 사고를 쳐도, 큰 교회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도 막을 방법이 묘연한 것이다.

흔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나쁜 현상 가운데 하나는 목사가 싫어지면 그의 설교도 자연히 듣기 싫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상적인 것도,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가 연약한 인간인지라 목사와 그 목사의 설교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가능한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설교란 기본적으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인이 사적인 자리에서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신의 기분에 따라 설교를 평가하는 행위는 목사가 제대로 된 설교 준비 없이 설교단에 서서 자신의 기분에 따라 설교하면서 이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별로 없어 보인다. 목사의 설교도 지극히 사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어쩌면 지금 한국교회에는 설교자 개인이 자신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하는 ‘사적인 설교’와, 청중 개인이 자신의 뜻에 따라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사적인 평가’로 몸살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설교 평가가 사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데는 아마 홍수처럼 쏟아지는 방송 설교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가능한 설교 평가는 공적인 자리에서 떳떳하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이런 생각이 공감대를 얻는 것 역시 요원해 보이는 현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설교 평가를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주관적으로 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아닐 것 같다. 당장 설교 평가를 위한 공적 모임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훨씬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아직 우리는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무엇인가를 객관적으로 토론하거나 평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합의하여 공적인 설교 평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필요하다. 16세기 제네바의 금요성경공부모임은 그와 같은 공적인 설교 평가의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는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고, 잘못된 교리는 시정하도록 지적받았고, 의문이 있으면 질문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는 교역자나 교역자가 되기 위한 사람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공개된 모임이었다. 제네바 목사들은 이런 자리를 통해 자신의 설교가 어떠한지 돌아볼 수 있었고, 동역자로서 서로를 격려하고 책망함으로써 제네바 교회를 함께 세워갔던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에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속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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