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이신열 (고신대학교 교수)


 

일반적으로 가장 회피되는 단어는 아마도 죽음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향하여 정해 놓으신 이치(9:27)가 죽음이므로 세상을 향한 애착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이를 피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으므로 죽음은 죄의 결과와 형벌 (2:17; 3:19; 6:23; 고전 15:21; 1:15)로서 우리 삶의 일부가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Augustine)은 죄의 형벌이 곧 죄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인간은 죄악된 상태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에 대한 형벌임을 보여준다. 삶은 죽음을 향한 과정이며 모든 삶에는 항상 죽음이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음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종교개혁자 칼빈 (John Calvin)의 주장 (<기독교 강요>, 3.9.4)은 합당한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에게 어느 때보다 죽음에 대한 초연함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1:21).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을 들 수 있다. 이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표현하며 (2:7; 3:19; 2:26) 이로 인해 육체적 생명이 종결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5:12, 17).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90:7, 11), 심판 (1:32), 정죄 (5:16), 저주 (3:13)로 표현된다.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죽음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2:1-2;18:4, 20; 6:23).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셋째, 영원한 죽음 또는 둘째 사망을 들 수 있다 (20:14).

이는 앞서 설명된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14:11).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 (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 (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킨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음의 정복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결과는 이렇게 저주와 형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인간 삶에 있어서 번민과 방황,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형벌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무서운 적과 가장 큰 원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대적이 아니라긍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다가온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적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고 이기셨으므로 (고전 15:55-56) 죽음은 이제 정복된 원수에 불과하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자이었으므로 (8:44) 유대인들을 부추겨서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예수를 시험했고 (4:1-11), 더러운 영들을 보내었고, 가룟 유다 안에 들어가서 그를 죽이기를 꾀했다 (22:3; 6:70, 13:2, 27).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거룩한 죽음을 당하셨을 때, 사탄의 계략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음부의 권세는 결국 패배 당했다. 오리겐 (Origen)과 이레니우스 (Irenaeus)를 포함한 몇몇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했던 속전설은 사탄이 죄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았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사탄의 노예인 죄인들을 속량하셨다. 오리겐은 우리가 값으로 산 바 되었다(고전 6:20)는바울의 고백을 자주 인용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에게 지불한 속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속전설은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물리치시고 죄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하셨다는 성경적 진리를 충분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단지 사탄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이 원래 인간에게 요구할 수 있었던 죽음의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각시킬 따름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사탄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뜻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에 복음의 핵심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또 다른 의미

 

그러나 이렇게 영생을 누리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위협적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사탄은 그들의 성화를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면서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반열에서 탈락하도록 총력전을 펼친다 (벧전 5:8).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실제적 악이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세력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당장 면제해주시지 않으시는가? 이미 구원받아서 영생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라는 과정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놀라운 경륜 속에서 죽음을 성화를 완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죽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화 (sanctification)의 상태를 지나 영화(glorification)의 상태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이 관문을 통과하게 될 때 비로소 더 나은 본향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죽음을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1:20-23).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예비된 상급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원천이므로 이에 대한 명상은 희망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태도로 다가오게 된다 (14:8). 죽음은 세상에서 한 평생 지속되었던 영과 육의 싸움의 종식을 가리키며 죄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영적 사건이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구원을 받아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지고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