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교육과 학습세례교육



모든 종교는 자신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은 기독교 교리를 “복음”이라 부른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그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선포와 가르침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데, 교회 안에서 그 둘은 상보적이다. 이것은 교회 역사 가운데 설교와 교리교육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말씀선포란 결코 단회적일 수 없고 반복적인 선포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선포에 대한 해설도 요청하는데 이것이 곧 가르침의 영역이다. 즉 말씀의 선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말씀의 가르침이며, 따라서 말씀의 선포에 근거하지 않는 가르침은 위험하다. 말씀의 선포는 가르침의 시작이지만 끝, 즉 목적은 아니다. 가르침 역시 과정이지 목적은 아니다. 선포와 가르침, 둘 다의 목적은 오직 “순종”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여기서 세례를 베푸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 제자를 삼는 방법이라면 그런 방법으로 제자가 되었다는 확실할 증거는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지킨다는 의미는 따르고 보존한다는 것, 즉 “순종”이다. 순종하는 자가 곧 예수님의 제자이고, 구원은 이들에게 약속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바로 이러한 순종이 곧 구원이다.
 


위의 성경 본문을 오직 “전도와 선교”의 본문으로만 줄기차게 인용하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가르침을 축소하는 것이요, 때로는 왜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르침의 요소가 약화되거나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서상 세례를 베푼 다음에 비로소 가르침이 필요한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세례를 베푸는 일과 가르치는 일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또한 가르치는 일이 세례를 베푸는 일보다 선행되는 것이 교회사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말씀선포, 즉 복음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신자에게 즉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오순절성령강림 사건 직후 사도시대의 관행이었지만 점차 세례는 일정한 기독교 교리 교육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교리교육은 초대교회의 2부 예배, 즉 전반부의 말씀예배와 후반부의 성찬예배 중 설교예배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세례후보자에게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교회는 세례학교, 즉 세례학습반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세례학습반은 모든 교인들을 위한 설교예배와 달리 오직 세례후보자들만을 위한 독립된 교육제도였다.
 


세례후보자가 세례를 받기 전에 기독교 신앙 및 교리를 배우는 이러한 교육제도는 사도 시대 이후부터 시작된 매우 오래된 초대교회의 전통이다. 대략 1세기 후반 혹은 2세기 초반에 이미 기독교 신앙교육을 담당하는 세례학습반이 운영되었고, 3-5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교리학교를 통한 교육이 일부지역으로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하여 상당히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성경이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을 포함하고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민의 구원을 위한 통로로 선택하셨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구약시대부터 선민인 이스라엘을 통해 그러한 신앙교육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에서 초대교회는 복음전파를 선포적인 설교와 체계적인 교육이라는 두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통일된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교리”라는 단어는 이 가르침과 동의어다.
 


세례후보자, 즉 교리학습자를 헬라어로는 “카테쿠멘노스(Catechumenos)”, 라틴어로는 “카테구메누스(Catechumenus)”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에서 영어 “카테큐먼(Catechumen)”이 유래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입의 말로 가르치다”라는 뜻의 코이네 헬라어 동사 “카테케오(katekeo)”에서 유래했다. “카테케오” 동사는 신약성경에 7번 정도 사용 되었는데, 눅 1:4에서는 “알고 있는 바를”로, 행 18:25에서는 “배워”로, 행 21:21에서는 “들었도다”로, 행 21:24에서는 “들은 것이”로, 롬 2:18에서는 “교훈을 받아”로, 고전 14:9에서는 “가르치기”로, 갈 6:6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로 각각 번역되었다. 이런 성경 내용을 근거로 교회는 아마도 “듣는 것을 통해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기독교 교리교육으로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카테케오”라는 말에서 “교리교육”, “신앙교육” 혹은 “종교교육”으로 번역될 수 있는 라틴어 단어 “카테키스무스(catechismus)”와 “카테케시스(catechesis)”가 유래했는데, 독어로는 Katechismus와 Katechese로, 불어로는 catechisme과 catechese로, 영어로는 catechism과 catechesis로 각각 사용되고 있다. 이 두 단어 모두 “구두 신앙교육”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그 둘을 엄밀하게 구분한다면 “카테키스무스”는 신앙교육의 내용을, 그리고 “카테케시스”는 신앙교육의 과정을 각각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단어는 주로 초대교회에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교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방법 혹은 과정과 연관된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반적인 종교 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 교리교육”이라는 말과 큰 차이 없이 사용되었다. 히포(Hippo)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작성한 “교리교육을 위한 지침들에 관하여(De catechizandis rudibus)”는 개종한 이교도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전에 먼저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대표적인 책이다.
 


중세 시대에도 기독교 신앙과 교리교육을 위한 자료들이 다양하게 존재했는데, 중세의 카테키스무스에는 주로 십계명과 사도신경, 주기도문 등과 더불어 의무표가 제공되었다. 중세 중기와 말기에는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에다가 성찬에 대한 가르침이 첨가되었다. 종교 개혁 직전에 살았던 쟝 제르송(Jean Gerson)의 “고백을 듣는 방법에 관하여(De arte audiendi confessiones)”와 같은 저술이 중세교회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가르쳤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인데, 이것은 제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주로 “고해성사”를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중세의 기독교 신앙 교육, 즉 교리교육은 고해성사에 종속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529년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작성한 카테키스무스(문답식 소교리교육서와 서술식 대교리교육서)는 중세적 전통과 어느 정도 연속선상에 있었지만 초대교회의 교리교육 개념에 보다 더 충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16세기 이후 개신교 카테키스무스가 중세의 고해성사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가르치는 교육과정으로 정착하는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528년에 이미 두 개의 중요한 카테키스무스가 출판되었는데, 하나는 라흐만(Lachmann)의 저술 혹은 그와 카스파르 그뢰털(Kaspar Graeter)의 공저로 알려진 “교리교육 혹은 어린이 교육(Catechesis oder vnderricht der kinder)”이고, 다른 하나는 알타멀(A. Althammer)의 저술, “교리교육. 즉 어떻게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교육시킬 것인지 문답 형식으로 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교육(Catechismus. Das ist vnterricht zum Christlichen Glauben/ wie man die jugent leren vnd ziehen sol/ in frag weysz vnd antwort gestellt)”이다.
 



그러나 이것들 보다 이전인 1526년에 이미 루터는 자신의 “독일미사(Deutsche Messe)”에서 카테키스무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그러나 카테키스무스는 일종의 교육이라 불리는데, 그것으로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할 때, 그들이 기독교에서 무엇을 믿어야하며, 무엇을 행해야하고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교육한다.(Catechismus aber heyst eyne vnterricht, damit man die heyden, so Christen werden wollen, leret vnd weyset, was sie gleuben, thun, lassen vnd wissen sollen ym Christenthum... )”
 




카테키스무스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루터의 두 교리교육서, 즉 교리문답서로 더 잘 알려진 카테키스무스뿐만 아니라, 모든 개신교 교리교육서에 적용된다. 루터가 1529년에 작성한 문답식 소교리교육서는 수많은 교회의 공식적인 교육지침서 역할을 했다. 루터의 문답식 소교리교육서는 단순히 루터교 형성뿐만 아니라, 개혁파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심지어 트렌트 (Trente) 공회의 결정에 따라 1566년에 공포된 “로마교 교리교육서(Catechismus Romanus)”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확실히 “교리교육서”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다.
 



대표적인 개혁파 교리교육서들로는 1529년에 작성된 외콜람파디우(Oecolampadius)의 교리교육서를 필두로, 마르틴 부써(Martin Bucer)가 작성하여 1534년, 1537년, 1543년에 출판된 슈트라스부르크(Straßburg) 교리교육서, 레오 유트(Leo Jud)의 1534년과 1541년판 교리교육서, 칼빈이 작성한 1536년의 제1 제네바 교리교육서(서술식)와 1542년의 제2 제네바 교리교육서(문답식), 아 라스코(Joannes a Lasco)의 1546년판 교리교육서, 1563년의 하아델베르크(Heidelberg) 교리교육서, 불링거(Bullinger)의 1566년판 교리교육서, 1648년의 웨스터민스터(Westminster) 대소교리교육서 등이 있다.
 




한국교회는 학습인과 세례인으로 구분해왔는데, 이것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학습을 받고 학습인이 된 후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의 결과이다. 그것은 아마도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세례후보자 교육이라는 전통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재정립되면서 유아세례를 받은 청소년들의 교육도 포함한 개신교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세례후보자를 최소 3년 정도 교리교육 과정을 거치게 한 점에 비추어볼 때 현재 한국교회의 학습교육과 세례교육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들마다 전도와 부흥의 강박증으로 인해 학습후보자와 세례후보자를 위한 기독교 교리 교육을 등한시하여 단순히 형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리교육이 실종 된지 오랜 것처럼 보인다. 교리교육의 약화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게 했고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단 출현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해왔다. 물론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인들을 훈련시킨다는 목적으로 단계별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전도”와 “부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신앙고백과 교리표준에 근거한 전반적인 기독교 교리교육과는 거리가 멀다.
 



칼빈은 성경에 대한 “가르침(doctrina)”, 즉 성경교리를 “교회의 영혼”으로 간주했다. 영혼 없는 육체가 죽은 것이듯이 교리 없는 교회와 교리교육이 수행되지 않는 교회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교회가 교리교육을 멈추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복음의 생명력은 비단 설교와 전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리교육에서도 강력하게 나타나야 한다. 설교와 전도가 교리교육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복음의 생명력은 폭발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보존될 것이다. 교회의 유일한 교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학습후보자와 세례후보자의 구분을 단지 행정절차로만 적용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을 기독교 신앙과 교리로 교육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러한 구분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최고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습후보자와 세례후보자를 기독교 교리로 무장시키는 교리교육, 즉 학습세례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으리라.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교육 프로그램보다 더 중요한 일은 신자들에게 바른 기독교 교리를 교육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성장을 저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히 세우는 최선의 지름길이다.


 

2012년 0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