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빙위원회의 청빙은 청빙인가, 초빙인가, 아니면 채용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채용하는 형식으로 목사를 청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교회는 목사를 청빙하는 것인가 아니면 채용하는 것인가? 청빙과 채용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만일 목사를 청빙하는 것이라면 채용하는 형식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며 반면에 채용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청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단(고신) 헌법 교회정치 36조는 ‘목사의 청빙’을 다루고 있으나 청빙 절차만 있을 뿐 그 말에 대한 정의가 없다. 필자가 알기로는 ‘청빙’(請聘)이란 ‘청할 청’에 ‘찾아갈 빙’의 합성어로 ‘찾아가서 청한다’ 즉 ‘부탁하여 부름’을 의미한다. 반면에 ‘채용’(採用)이란 ‘캘 채’에 ‘쓸 용’의 합성어로 ‘캐내어 사용한다’ 즉 ‘사람을 골라서 씀’을 의미한다.

부탁하여 부르는 것과 사람을 골라서 쓰는 것은 의미상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 목사 청빙은 다양한 공채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 내에 팽배해져 있는 불신 풍조이다. 장로는 목사를 믿지 못하고 교인들은 장로들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목사 청빙에 있어서 핵심 역할을 감당해야할 당회 대신에 새로운 임시 기구인 ‘청빙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청빙위원회’의 조직은 아마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볼 때 가장 민주적인 제도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에서 이제는 거의 당연시 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회를 불신하여 만든 ‘청빙위원회’치고 담임목사의 청빙을 문제없이 단번에 잘 해결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 아니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왜 그럴까?

담임목사의 청빙 문제로 대부분의 교회들마다 골머리를 앓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담임목사의 권한이 거의 절대적이며 이 권한이 지나치게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장로가 목사의 이런 권한을 자신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목사에 대한 사적인 반감 역시 결코 덜하지 않는 중대한 원인이다. 여기서 목사와 장로의 공통적인 문제는 갈등의 주범이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인 경우가 많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신이 그런 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교회 공동체를 위한 ‘공적’인 생각이 앞서할 위치에 있는 주요 직분자들이 사적인 욕심이나 감정 때문에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번 시작된 갈등은 쉽게 해소가 되지 않는다. 당회원 사이에 발생한 갈등은 결국 신자들이 당회를 불신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장립집사의 역할과 당회원의 아내가 아닌 권사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래서 교회 직분자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갈등과 반목은 아무리 좋은 교역자가 온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따지고 보면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신앙적이기 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오히려 신앙적으로 의로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교회의 내분은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과정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래서 보다 합리적인 청빙 방법을 찾게 되고 그 방법으로 청빙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된다.

  하지만 목사를 좀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청빙하기 위해 조직된 청빙위원회는 과연 목사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청빙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그와 같은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당연히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개모집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공개모집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민주적이고 객관적일까? 우리나라는 국가가 실시하는 시험을 통한 공개채용(예를 들면, 행시, 사시, 외무고시, 공무 시험 등) 외에는 채용 과정에서 객관성이 무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대기업의 공채조차도 인맥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성도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청빙위원들이 가능한 사심(私心)을 배제하고 교회를 위한 신앙적 공심(公心)을 발휘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굳이 여기서 미주알고주알 캐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좀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목사를 청빙하기 위해 만들어진 청빙위원회가 왜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이며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구로 쉽게 변질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의 심성 자체가 객관성과는 조금 거리가 멀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비뚤어진 파당적 의협심이 공심보다는 사심으로 기울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거듭나지 못한 심성, 지나치게 인간적인 개성이 교회를 위한 공적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주범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바른 신앙의 부재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청빙위원회가 그렇게 객관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심사숙고하여 목사를 청빙(?)했다면 아마도 그들 입장에서 그 목사는 그 교회를 위해 최고의 목회자일 것이고 최고의 목회자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청빙위원회를 통해 청빙(?)된 목사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청빙된 목사보다 낫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실례가 얼마나 되는가? 청빙위원회를 통해 초빙(?)된 목사의 목회 사역 역시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을 순전히 목사 개인의 자질 탓으로만 돌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청빙위원회가 과감하게 버린 전통적 방법으로 청빙된 목사나 청빙위원회를 통해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초빙 내지는 채용된 목사나 다른 것이 무엇인가?

담임목사이건 부목사이건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은 공개채용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청빙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빙이나 채용이라고 해야 옳다. 그리고 사례라는 말 역시 현실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용어이다. ‘목회자 생활비’ 내지는 ‘급여’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물론 합리적인 것이 항상 성경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진리 문제나 건덕(建德)의 문제가 아닌 이상 고칠 것은 고치는 것이 좋다.

  만일 교회가 계속해서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해야 한다면 목사초빙 내지는 목사채용이라고 용어로 고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란 그 의미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청빙’이라는 말을 고집하고 싶다면 청빙이라는 용어에 맞는 내용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가 목사를 초빙 내지는 채용한다면 더 이상 성경이 요구하는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운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초빙과 채용은 민주적인 사회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목사 청빙이라는 성경적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빙 내지는 채용된 목사에게 성경적인 목회자이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초빙과 채용의 방식으로 성경이 요구하는 목회자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청빙위원회를 만들고 목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이 아직도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그런 방법을 도입한다고 해서 목사청빙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것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빙위원회와 공개채용의 형식이 이전의 전통적인 목사청빙 방법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새로운 다른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 어쩌면 방법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당회에 대한 불신과 교인들 상호간의 불신이 청빙위원회를 조직하게 하고 공개적인 모집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 위에 건설되어야 할 교회가 불신 때문에 분열과 혼란을 겪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교인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당회가 있는데 왜 장로교회는 청빙위원회라는 새로운 임시기구를 만들어야 하는가? 혹 청빙위원회는 장로회라는 교회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임시기구가 아닐까?

  청빙이란 개혁교회가 가진 좋은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담임목사를 모실 때 먼저 지역교회의 당회가 교회의 사정과 형편을 충분히 고려하되 자신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목회자를 찾는다. 그리고 당회원들은 주위의 가까운 교회의 목회자나 명망 있는 목회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하여 후보를 결정한다. 이것이 역사적인 개혁교회가 추구해온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이다. 당회원들이 가능한 사심이 아닌 공심을 발휘한다면 아마도 당회는 청빙위원회라는 새로운 임시기구를 조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신뢰받는 역할을 수행하고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목회자를 찾고 목회자는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교회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교회가 우리 자신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적인 사심이 앞서기 보다는 신앙적인 공심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09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