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취미생활 어디까지 가능한가?

 

 

문화와 놀이

취미(趣味)달릴 취맛 미가 결합한 단어로 네이버 한자사전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미를 제시합니다. “1. 마음에 끌려 일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흥미 2. 아름다움이나 멋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 3. 전문이나 본업은 아니나 재미로 좋아하는 것이나 일.” 마지막 세 번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취미의 뜻입니다. 이런 사전적 의미를 근거로 저는 취미생활과 취미활동을 자신이 좋아하는 맛을 즐기는 행위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세계적인 네덜란드 문화인류 학자이자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하(Johan Huizinga. 1872-1945)는 학자로서 말년에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라는 유명한 책을 저술하여 “14-15세기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생활방식 및 사고방식에 관한 연구라는 부제가 붙은 중세의 가을(Herfsttij der Middeleeuwen)에 이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저술들은 진술 내용을 따라가기가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그의 책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류미래 학자 유발 하리리(Yuval harari)사피엔스(Sapiens)호모 데우스(Homo Deus)보다 읽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본론 책장을 2장도 채 넘기기 전에 책을 덮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위징하의 책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저술이 세밀한 세계 역사의 종합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각의 깊이가 남다를 뿐만 아니라 언어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데다가 문학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하위징하는 한 마디로 놀이와 문화를 불가분의 관계로 봅니다. 그는 자신의 책 놀이하는 인간에서 문화와 놀이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문화는 놀이로서도 아니고, 놀이로부터도 아닌, 놀이에서 시작한다.”(Cultuur begint niet als spel en niet uit spel, maar in spel.) 하위징하는 문화와 놀이를 동일시하지도, 놀이 자체를 문화의 기원으로도 보지 않고, 다만 선발 주자인 놀이에서 후발 주자인 문화가 생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하위징하는 놀이와 문화를 확실하게 구분하지만 문화의 출발점을 놀이 속에서 찾습니다. 놀이란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놀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놀이를 일상생활의 공간과 구분되는, 일종의 다른 세상으로 규정합니다. 이와 같은 놀이에는 문화를 창조하는 기능이 있지만 모든 놀이가 자동적으로 문화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문화인류학적으로 기독교 문화혹은 기독교 놀이라는 개념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기독교 놀이는 과연 가능한가?

기독교 문화라는 용어는 익숙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놀이는 낯선 용어입니다. 만일 기독교 놀이가 가능하지 않다면 기독교 문화도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기독교 신앙은 충분히 가능한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기독교 문화는 어쩌면 실체가 없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럽의 역사는 기독교 역사 1500년과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사실상 오늘날 유럽 형성 역사의 출발점을 유럽의 기독교 수용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1500년 동안 유럽의 일반 역사와 기독교 역사가 겹친다고 해서 동일 기간의 두 역사를 동일시하지는 않습니다. 유럽은 기독교화 된 이후 최소 1200년 이상 기독교 제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럽의 역사가 곧 기독교의 역사는 아닙니다. 그 기간 유럽에는 유럽의 문화, 즉 서양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기간에 기독교 문화가 형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유럽 문화가 곧 기독교 문화인 것도 아닙니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이며 그 속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우주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속이 있지만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통해 형성된 구체적인 기독교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기독교 예배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라는 형식은 모든 종교에 다 있기 때문에 예배자체를 고유한 기독교 문화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기독교적인 삶의 고유한 관습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적 관습조차도 사실상 타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요소라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문화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용어일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이미 기독교의 관습이 되어버린 교회 중심의 생활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가 외적인데 반해 후자는 내적인 특징이 훨씬 강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 벧전 1:16) 이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란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은 사실상 외적인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요소가 훨씬 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밖의 외적인 요소들로부터가 아니라, 마음속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치명적인 손상을 입습니다. 어떤 특정한 취미생활이나 취미활동 때문에 우리의 거룩한 삶이 더렵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원리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취미생활 즉 취미활동의 한계는 없습니다. 한 마디로 어떤 취미활동이든 모두 다 가능합니다.

기독교 문화와 놀이를 위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란 다음과 같은 원리에 따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 23-24)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또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명심합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무엇이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지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천국백성으로서의 구별된 삶과 동시에 세상 사람으로서의 공유적 삶을 동시에 사는 자들입니다. 천국에서는 순수한 기독교 문화와 놀이가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상의 삶에서 우리가 누리는 문화와 놀이는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천국백성으로서 우리만의 기독교 문화와 놀이를 개발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 사람으로서 불신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건전하고 건강한 공공의 문화와 놀이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개혁신학의 장점인 일반은총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취미생활, 취미활동은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취미는 일종의 즐거운 놀이, 즐길 수 있는 놀이입니다. 이런 취미생활과 취미활동은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다만 모든 취미가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취미가 유익한지, 유익하지 않은지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가를 살피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없는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자신과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취미가 최악이라면 반대로 세우는 취미가 최선일 것입니다. 특히 신앙을 무너뜨리는 취미는 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즐길 수 있는 취미활동은 음악, 노래, 운동, 여행, 등산, 영화/연극, 수집 등등 모두 가능합니다. 심지어 멍 때리기, 게임, 춤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취미생활, 취미활동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일종의 기준은 필요합니다. 많은 기준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 기준만 제시하고자 합니다. 즉 시민정신에 부합하는 적법성과 모범적인 선도정신에 부합하는 건전성, 그리고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해롭다는 과유불급의 중독성입니다.

 

적법성: 합법적인 취미생활.

취미는 선이나 악으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윤리와 도덕의 중립지대 즉 아디아포라(adiaphora) 영역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취미의 성질이나 결과 혹은 영향에 따라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습니다. 도박이 그렇습니다. 도박은 불법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악입니다. 또한 결과에 따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파괴하든지, 아니면 도박 대상과 그의 가족까지 파괴합니다. 자신과 남에게 결과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주는 취미는 악한 것입니다.

도박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모든 취미는 악입니다. 예를 들면, 불법적인 수집입니다. 불법적인 물건을 수집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수집하는 것은 모두 나쁜 취미입니다. 오래된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 장물(贓物)을 사들인다든지, 직간접적으로 도굴을 시도하여 원하는 물건을 수집한다면 이것은 불법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적법하지 않은 취미는 시민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삼가야 합니다.

불법적인 취미는 다양합니다. 낚시는 좋은 취미지만 낚시를 너무 좋아하다보면 때론 허용되지 않은 곳, 즉 낚시금지구역에서 스릴만점의 낚시를 즐기려는 충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수집의 취미도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나쁘지 않은,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은 취미이지만 수집 욕구가 너무 강해서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취미도 악한 방법이 동원될 때 악한 취미로 변합니다.

운전이 취미인 경우도 자칫 자동차나 오토바이 불법 폭주족으로 변질 될 수 있습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운전시합을 한다든지 굉음을 즐기기 위해 머플러를 떼어낸다든지 하는 행위는 도로교통법을 위반하는 불법이며 위험을 동반하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좋은 취미는 취미를 누리는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적법성이 중요합니다. 취미 자체가 불법적이거나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는 취미라면 그리스도인은 결코 꿈조차 꾸지 말아야 합니다.

 

건전성: 건강한 취미생활.

성경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범사에 우리는 좋은 것만 추구해야 합니다. 나쁜 것은 그 모양이라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 내 속에 나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면 그 성향까지도 버려야 한다고 바울은 심각하게 경고합니다.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악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취미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취미의 경우, 확실하게 나쁜 것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취미의 건전성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취미, 누리도 되는 취미라면 그것은 당연히 적법하고 건전해야 합니다. 어떤 취미는 합법적이지만 건전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패러글라이딩과 스킨스쿠버 같은 취미는 위험천만하지만 불건전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합법적이라고 해서 모두 건전한 것은 아닙니다.

도박도 합법적인 도박이 있습니다. 미국의 라스베가스, 한국의 강원랜드 등과 같은 곳은 합법적으로 도박행위를 즐길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합법적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도박행위 자체가 불건전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화투놀이나 포커놀이는 어떨까요? 화투와 포커는 놀이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 자체로 불건전하거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충분히 건전하게 놀 수도 있습니다.

춤추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춤추기가 취미인 그리스도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춤추는 행위는 율동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지만 아직도 조심스럽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에게 명령합니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라!”(150:4) 춤추는 행위는 악기처럼 찬양의 중요한 도구입니다. 즐거움을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로서 춤은 좋은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도 충분히 권장할 만합니다.

하지만 모든 춤이 다 유익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선정적인 춤사위는 춤추는 사람 자신을 만족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춤사위는 삼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취미로서의 춤을 기존의 율동에 묶어두는 것도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제멋대로 몸짓하며 춤을 추는 행위는 결코 권장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춤을 취미로 누리는 것조차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은 심각한 편견입니다.

음악듣기의 경우에도 사람마다 선호하는 장르가 다릅니다. 음악을 고상한 장르와 고상하지 못한 장르로 구분하는 것은 일종의 편견입니다. 사탄의 음악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고전음악을 좋아하든 가요를 좋아하든 그것은 개인적인 호불호의 편차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부분은 폭력성과 선정성, 욕설 등과 같은 불량하고 불건전한 노래가사입니다. 이런 노래는 비록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일지라도 반드시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취미생활에서 건전성은 상당히 중요한 기준이므로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불건전한 취미생활은 결국 신앙생활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고 심지어 신앙 자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낚시인들에게 바다낚시는 물때가 중요한데, 물때를 맞추느라 심지어 주일예배까지도 과감하게(?) 희생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자신의 건전하고 좋은 낚시취미를 스스로 불건전하고 나쁜 취미, 악취미로 만드는 것입니다. 건전성은 우선순위와도 관계가 깊습니다.

 

중독성: 통제 가능한 취미생활.

재미와 즐거움 즉 쾌락은 중독성이 강합니다. ‘중독이란 지속적인 충동 욕구의 지배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재미가 없고 즐겁지 않은 무엇을 계속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지속적인 충동 욕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과 쾌락적인 것에는 계속하고 싶은 충동 욕구가 절로 발동합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성취욕구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 것들이 취미욕구로 정착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공자(孔子)의 가르침인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중용사상을 존중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성경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바울 사도의 경고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 술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들은 대체로 사람의 기분을 좌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중독성도 강합니다. 각종 술, 담배, 마약류가 여기에 속합니다.

성경은 방탕함을 이유로 술 취함을 금지합니다. 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인사불성(人事不省)은 볼썽사납습니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술은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일찌감치 교인에게 주초를 금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인의 술 마시는 습성과 관계가 깊습니다. 한국인에게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초문제를 신앙문제와 직결시키기 않습니다. 주초를 한다고 신앙생활을 흩트리는 것은 아닙니다. 한 잔 혹은 두 잔 정도로 적당히 마시는 법을 이미 체득했기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 중에도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골초도 있습니다. 사실 술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며 술을 마신다고 모두 술주정뱅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한국교회가 오래 전부터 술과 담배를 금기시했기 때문에 주초금지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은 세상사람 모두가 다 알지만 그렇다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요즘 담배연기 때문에 분쟁이 자주 발생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술과 담배는 중독성이 매우 강합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중독성에 빠지기 쉬운 것들은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한 번 중독되면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독은 자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입힙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합법적이면서도 건전한 취미생활을 즐기되 중독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취미이든 강약의 정도만 다를 뿐 모두 중독성이 있습니다. 건전한 취미의 대명사인 운동이나 등산, 심지어 독서조차도 예외가 아닙니다. 만화책은 얼마나 중독에 빠지기 쉬운지...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중독을 의미합니다. 이런 중독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적당한 중독을 때로 좋을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통제하기 불가능한 상태의 중독은 이미 적당한 도를 넘어 심각한 단계이기 때문에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그와 같은 중독이 자신을 파괴하는 지경의 취미활동, 취미생활이라면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과감하게 포기하고 버려야 합니다. 취미생활을 선택할 때 중독성이 강한 취미는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종류의 게임은 중독성이 강합니다. 자제력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게임을 취미생활로 선택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그 때 신중하게 게임을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번 선택한 게임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게임을 선택할 때에도 건전성을 반드시 따져보아야 합니다.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게임은 그 자체로 나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굳이 그런 게임을 선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취미생활은 각자 자유지만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해치는 결과를 양산하는 취미라면 반드시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지혜롭고 슬기로울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취미생활, 건강하고 건전한 취미활동을 즐기는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권리이자 일반은총의 혜택을 누리는 기쁨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합시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기독교보(2023년 9월) KOL에 실린 기고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