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들의 교육지론(敎育持論)


작성자: 황대우

1453년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성경을 개인이 소장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일단 성경은 손으로 필사된 것이었으므로 값이 너무 비쌌고, 또한 중세교회의 유일한 성경은 식자들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물론 중세에도 자국어로 번역된 낱권 성경을 접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것을 개인이 소장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도, 자국어 성경을 평신도가 사용하는 것도 모두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중세 평신도가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는 걸식수도사들이 떠돌며 설파하는 성경 이야기를 귀동냥하는 것뿐이었으나, 중세 후기에는 공동생활형제단 덕분에 수도사가 되지 않고도 평신도가 글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공동생활형제단의 주요 활동은 설교와 구제 및 교육이었다. 사람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설교는 형제단의 거처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야외에서도 제공되었다.

공동생활형제단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 외에도 고아와 같은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활동에도 주력했다. 그곳의 학생들은 매일 세 차례 성경을 낭독하고 해설하는 교사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는데, 사실 평신도가 직접 성경을 읽는 일을 공적으로 허락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다른 곳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일이었다. 공동생활형제단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읽히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교부들의 저술도 공부할 수 있도록 장려했다.

네덜란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도,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도, 프랑스 출신의 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빈도, 모두 청소년 시절에 공동생활형제단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 받은 경험을 가진 인물들이다. 이 세 인물 모두 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에라스무스와 루터는 기독교 학교 설립과 교육에 관한 시급성과 구체적인 방법을 다룬 글을 따로 작성하여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자 루터 사이에는 교육의 출발점과 지향점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다. 에라스무스가 교육의 출발점과 지향점을 모든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서 찾았던 반면에, 루터는 그것을 거듭난 사람의 기독교 신앙에서 찾았다. 에라스무스에게 교육이란 이성적으로 창조된 자연인을 보다 더 이성적 인간이 되게 하는 수단이었던 반면에, 루터에게 교육이란 타락한 자연인이 덜 타락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도록 돕는 수단이었다.

이런 차이점은 타락 이후의 인간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 즉 에라스무스의 낙관적 인간론과 루터의 비관적 인간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창조 시 인간에게 부여된 의지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죄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자유의지론이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이성을 근거로 인간을 교육 가능한 존재로 정의한다. 따라서 “인간이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다.”(homines,..., non nascuntur, sed funguntur) 이런 점에서 “인간은 철학이나 어떤 학문으로든 교육 받지 않으면 비이성적인 동물보다 더 나쁜 동물이 된다.” 이것이 에라스무스의 교육지론이다. 에라스무스에게 교육은 인간의 ‘인간다움’과 ‘인간답지 못함’을 결정짓는 핵심요소다.

교육을 보편적 인간성과 연관시키면서 인간다움을 발견하고 형성하는 수단으로 간주하는 에라스무스와 달리, 루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훈련으로서의 교육을 강조한다. 그래서 루터는 교육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루터의 교육은 한 마디로, ‘기독교 교육’을 의미한다. 에라스무스는 어린아이를 거의 백지(tabula rasa)와 같은 상태로 보았던 반면에, 루터는 어린아이조차도 죄인이라는 점을 결코 간과하거나 축소하지 않았다. 이것은 루터가 주장한 노예의지론의 관점이며,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과 결정적인 대척점이기도 하다.

인간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루터의 노예의지론적 견해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칼빈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문자 교육뿐만 아니라 바른 신앙 교육도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네바 교육 제도를 개편했다. 즉 제네바 종교개혁자는 루터처럼 특별은총의 영역인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에라스무스처럼 일반은총의 영역인 정치와 행정과 세상 학문을 장려하는 일반 교육을 동시에 강조했다. 그렇지만 칼빈은 기독교 교육과 일반 교육을 두 종류의 독립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기독교 교육을 기초로 한 일반 교육을 추구했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라는 16세기의 시대정신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세의 교육 전통과는 달리 칼빈은 공적 교육의 시행을 중시했다. 즉 중세 교육은 단순히 부모의 의지와 결정에만 의존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칼빈은 공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공립 교육 기관을 설립했는데, 그 결실 가운데 하나가 바로 1559년에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였다. 그것은 제네바 정부가 후원하고 교회가 직접 관리 감독하는 형태의 교육 제도였다. 중세에는 자녀 교육의 책임이 부모에게만 부여된 것이었지만,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그 책임이 부모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부여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네바 공립학교는 교회가 교과 과정을 통제했고 교사는 신실한 신앙인이어야 했다.

칼빈은 ‘교리’(doctrina)를 교회의 ‘영혼’으로, ‘치리’(disciplina)를 교회의 ‘신경’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교리는 가르침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세분하면 성경에 대한 해설과 설교 및 신앙고백과 신앙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실천적 측면에서 이것은 ‘설교’와 ‘교육’이라는 두 범주로 묶어서 분류할 수도 있다. 설교는 공적으로 교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가정에서는 성경읽기를 통해, 학교에서는 성경공부를 통해 유지되었고, 교육 즉 신앙교육 역시 교회에서는 목사를 통해, 학교에서는 교사를 통해, 가정에서는 부모를 통해 삼중으로 시행되었다. 신앙교육의 주교재는 신앙교육서 즉 교리교육서였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요리문답서 내지는 교리문답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신앙고백에 근거한 교리교육을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도록 하면서도 이들이 직접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해서는 제한했던 루터교회와는 달리, 개혁교회는 아이들이 신앙교육과 성경읽기 둘 다 배우도록 균형 있게 가르쳤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성경을 쉽고 바르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국어 성경에 내용 해설과 관련 구절들을 달아놓은 관주성경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16세기 개혁파 교육 기관의 모델은 스트라스부르 김나지움이었다. 이것은 부써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1538년 스트라스부르 도시가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이었는데, 요하네스 슈투름(Johannes Sturm)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이것은 또한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 모델이기도 했다. 칼빈이 여자아이들도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제네바를 비롯한 많은 개혁파 도시들은 여학교를 따로 설립하여 운영하고 지원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만6세가 교육의 혜택을 받기 시작하는 취학 연령이었으나, 개혁교회의 교육 전통은 만6세기 되기 전에 취학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영국 청교도들은 아이가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피교육자가 되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경우에는 만6세 이전에 취학한 유치원생에게 신앙교육서의 서론 부분과 몇 가지 간단한 기도를 가르쳤다. 신앙교육서를 가르치는 습관은 유럽 전체 개혁교회 교육의 일부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교회 초등학교의 교육 전통은 칼빈의 제네바 교육 정책으로부터 기원된 것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학교 교사들의 자격 조건으로 그들 모두 지적이고 신실한 교인일 것을 요구했고, 학교에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를 배울 뿐만 아니라, 기도와 교회 찬송도 배우도록 제도화했다. 또한 가정에서 자녀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시편과 기도문을 큰 소리로 암송하거나 낭독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전통이 되었다. 신자의 자녀 신앙교육을 최선의 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이 개혁파 전통의 신앙교육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수되지는 못했다. 오늘날 우리는 자녀에게 사회적 성공을 위한 세속 공부에만 전력투구하도록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신앙교육은 교회의 백년대계(百年大計)다. 학교에서 신앙교육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고, 교회 신앙교육은 내용이 부실하고 가정 신앙교육은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이라도 신앙교육의 총체적 부재현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성경적이고 교회사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생명나무> 2015년 9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