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들의 빈부 개념과 사회복지제도




작성자: 황대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기독교 사회복지 개념은 성경의 “연보”에서 기원된 것이다. 여기서 “연보”란 그리스도인들 상호 간의 “디아코니아” 즉 “교제”를 의미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구제 개념은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시대도 예외 없이 가장 중요한 지상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 실천되어왔다.

‘고아와 과부’는 가난한 사람들, 즉 빈민의 대명사다. 중세에도 이러한 빈민을 구제하는 자선단체들이 있었다. 본래 중세의 자선단체들의 설립 취지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수도사들이 여행을 하다가 잠시 머물러 의식주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물론 몸이 불편한 행인들도 하룻밤이나 며칠 동안 잠시 쉬어갈 수도 있었다. 이처럼 순례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자선단체에서 중세의 구빈원(Hospital; Almshouse)이 탄생했다. 그래서 대부분 수도원에 부속된 구빈원도 처음에는 탁발수도사들과 순례자들에게만 숙식을 제공했지만, 차츰 십자군 전쟁의 피해자들인 부상자들과 병자들, 실향민들, 고아, 과부들까지 돌보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는 ‘자발적 가난’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행위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수사들이나 사제들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한 마디로 ‘자발적 가난’은 중세 기독교가 추구하는 경건의 핵심이었다. 13세기부터 새롭게 설립된 수도원 형태는 ‘자발적 가난’의 개념을 철칙으로 삼아 걸식하며 수도하는 탁발수도원들이었다. 이런 ‘자발적 가난’은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들에게도 요구된 ‘청빈’이었다. 중세시대의 빈민 구제는 교회의 권한에 속한 것이었다. 교회는 구제 기금을 모아야 했고 성직자들은 자기 관할 지역의 가난한 자를 도울 의무가 있었다. 교회 소속 구제기관이나 복지기관의 직원은 주로 사제들과 수녀들이었다.


중세 시대 구제는 자비로운 행위로 존경받을만한 미덕이었기 때문에, 귀족들과 부자들은 자신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해주는 수도원을 설립하거나, 자신의 공로를 쌓기 위해 빈민과 환자를 돌보는 자선단체를 설립하곤 했다. 구빈원과 같은 자선단체들의 필요한 재원들은 귀족들과 부자들의 기부금으로 충원되었다. 그리고 수도사들과 자선단체 종사자들은 설립자들과 기부자들의 영혼이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직행하도록 기도함으로써 보답했다. 이처럼 중세시대 가난과 구제는 그 자체로 구원의 수단이었다. 귀족이나 부자는 물질적인 기부의 보답으로 수도원이나 자선단체들로부터 영적인 혜택을 누렸던 것이다. 이것은 육적인 것을 주고 영적인 것을 받는 형태의 거래와 유사했다.


빈민과 병자를 돌보는 자선단체 등의 중세 구호기관들은 구제할 수 있는 재원이 기부에 달려 있었으므로 구제 범위도 제각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관성 있는 체계적 운영도 불가능했다. 14-15세기는 유럽 전역에 퍼진 전염병과 백년전쟁 등으로 병자와 고아, 과부, 부상자 등 빈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였는데, 당시 구빈원을 포함하여 성직자 중심의 중세 자선단체들은 그들 모두를 수용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 환경이 점점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열악하게 되자 고향을 버리고 방랑하면서 구걸로 연명하는 걸인들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들은 거룩한 빈민도, 불가피한 빈민도 아니었다.


이와 같은 당대의 노숙자들은 때론 동정을 얻기 위해 장애인을 가장하기도 했기 때문에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하는 빈민과 잘 구분되지 않았다. 따라서 구제는 무질서하고 무분별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무절제한 구제행위가 자발적인 떠돌이 부랑아를 양산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교회와 자선기관에 대한 원성이 쏟아졌다. 16세기에 접어들었을 때 빈민 구제 문제는 거의 최악의 상태였다.


종교개혁은 이런 사회적 문제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아니 간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16세기에는 국가와 교회가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이, 즉 정교일체(政敎一體)였기 때문이다. 국민과 시민은 곧 교인이었고, 따라서 교회의 문제는 곧 정부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만의 개혁이 아니라, 당시 국가와 사회 전체의 개혁이었다. 이런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에 의한 사회복지제도의 개혁이었다.


근대 초기의 빈민구제와 사회복지의 이론 및 실천을 최초로 다루었던 종교개혁자 루터의 도움을 받아 비텐베르크 시의회는 1520년 말과 1521년 초에 복지를 제도화하려는 최초의 빈민구제규정을 포함한 법안을 통과시켰고, 1522년 1월 22일에는 또 다른 예배와 복지의 개혁에 관한 법안을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복지제도를 마련했다. 루터는 1520년 자신의 <선행에 관하여>에서 ‘호의, 관대, 자선’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고대독일어 명사 ‘밀딕카이트’(Mildickeit)를 “각자가 자신의 것으로 기꺼이 돕고 섬기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모든 선행이 믿음 안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탐심의 원인은 미신이고 관대함의 원인은 믿음이므로, 그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관대한 반면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 탐욕스럽고 좀스럽다... 믿음은 관대함이라는 선행의 감독관이요 마부다.”


루터에게 있어서 모든 선행은 믿음의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함으로써 중세의 공로사상을 배격했다. 참된 신자만이 자선을 베풀 수 있고, 이러한 관대함의 선행은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루터에게 구제와 자선이란 그의 종교개혁 원리인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됨)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리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에 머물지 않고 사회의 개혁으로 연장되었다. 이신칭의 교리를 설파한 후에 루터는 1520년에 출판된 자신의 <독일 귀족에게 고함>에서 구제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각 도시마다 그곳의 가난한 백성을 부양하도록 하되, 그들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례자로 부르든 탁발수도사로 부르든 어떤 외부 구걸인도 허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도시는 각기 자신의 주민들을 부양할 수 있을 것이다... ... 가난한 자들은 배고파 죽지 않고 얼어 죽지 않을 만큼 알맞게 보살펴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현재 불합리한 악용이 만연한 것처럼, 누군가 악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무위도식하고 부자가 되고 잘 사는 것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바울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설교하고 다스리는 사제들 외에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재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중세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루터는 가난을 거룩한 삶의 방편으로 보지 않았다. 또한 재산 문제 처리를 칼의 권세인 정부의 일로 보았기 때문에 빈민을 구제하는 자선 사업 역시 정부가 담당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사고는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를 비롯한 거의 모든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대동소이하다. 즉 구걸을 금지하고 빈민 구제의 일차적 책임을 교회보다는 세상 통치자와 정부에 돌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재산권이 교회가 아닌, 세상 통치자와 정부에게 속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움을 받아야 할 빈민과 그렇지 않은 게으른 빈민을 구분하려고 했으며 부당한 노동 착취로 무위도식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거의 모든 형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구원은 어떤 종류의 인간적인 공로도 배제하는 오직 믿음만의 문제요, 오직 은혜만의 문제였다. 그들의 구제와 자선 개념은 구원을 위한 선행이라는 중세적 공로 사상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게 된 구원을 감사하기 위해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성경적 교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16세기의 새로운 사회복지제도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원리이자 성경의 핵심적 교리인 이신칭의의 결과였고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적 사랑에 기초한 것이었다. “궁핍한 이웃을 돕고 섬기면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즉 예배하는) 것은 없다.”(1523년의 라이스니히 규정)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은, 반드시 한편으로는 예배를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복지를 통해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배의 개혁과 복지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종교개혁자들은 ‘거룩한 가난과 세속적인 부’라는 중세적 대립 공식을 과감하게 버렸다. 자발적 가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고 부와 권력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가난이 부보다 더 거룩한 것도 아니며, 부가 가난보다 더 세속적인 것도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을 잘 관리할 책임은 청지기인 신자의 종교적 소명과 연관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축적된 부 자체를 경시하지 않았으며, 모든 지상적 복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해서 정당하게 벌어들인 재물도 하나님께 받은 복으로 간주했다. 물론 이런 사고의 지나친 단순화는 모든 물질적 성공을 신적 축복의 결과로 과대평가하거나, 모든 가난을 비난 받아야 마땅한 게으름의 결과로 잘못 평가하는 독단에 빠지기 쉽다.


*위 글은 <생명나무> 2015년 6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