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직분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직분자는 삶의 예배와 주일 예배의 도우미들이다

 

 

                                                                                                                                              코닷연구위원/황대우 목사

 

 

 

 

예배란 구약의 제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특별한 행위를 의미한다. 신약의 신자들은 더 이상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실제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데 이유는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희생제사가 영원토록 완전함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의 예배는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제물, 혹은 특정한 방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

이런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 형태는 정말 다양하다. 성경은 고정된 예배 형태가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 칼빈도 역시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천태만상의 예배 형식 모두 나름대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예배 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내용만 있다면 어떤 형식이든 가능한가? 정말 성경이 요구하는 예배의 구성요소나 형식이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가?

이상하게도 예배 형식은 천태만상인데 반해 예배는 거의 예외 없이, 심지어 이단들의 예배조차도 소수의 집례자와 다수의 참가자로 구성되어 있다. 왜 모든 예배는 집례자와 참가자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예배에서 집례자와 참가자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 것일까? 집례자와 참가자의 관계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이 글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 예배의 구성-말씀과 성찬

초대교회에서는 1부의 말씀예배와 2부의 성찬예배로 드려진 것이 통상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중세를 지나면서 이 두 예배가 분리되면서 2부의 성찬예배가 더 중시되고 그것이 미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세의 미사에서 포도주는 나누어주지 않고 빵만 나누어주는 1종 배찬이 자리를 잡게 되고 또한 미사의 횟수조차 점점 줄어들어 1년에 한 번 정도 시행하는 곳도 많았다. 16세기 종교개혁에 의해 개혁된 것 가운데 예배의 개혁이 가장 큰 변화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1종 배찬을 2종 배찬으로, 그리고 성찬예배의 시행 횟수를 연 1회에서 4회로 늘인 정도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정의, 예배 순서, 예배 형식 등 거의 모든 예배 요소들이 개혁되었다.

종교개혁 당시 신자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그들 신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종교개혁가들 사이에 성찬논쟁이 그렇게 치열했던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말씀예배와 성찬예배로 분리되어 있던 중세의 예배를 다시 하나의 예배형태로 만들기를 원했다. 뿐만 아니라 가능한 자주 성찬을 시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더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칼빈은 교회가 1주일에 최소한 한번은 성찬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찬 시행과 관련하여 칼빈의 제네바는 칼빈의 생각을 존중하기 보다는 취리히 전통을 따르는 베른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 성찬예배를 1년에 4번 시행하는 전통이 되었다. 현재 한국의 장로교회에서는 그 횟수가 점차 줄어 연 4회 시행하는 교회는 거의 없고 연 2회 시행하는 교회가 대부분인 것으로 안다.

오늘날 개신교 전통을 따르는 거의 모든 교회들은 사실상 말씀예배와 성찬예배를 구분하여 시행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러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지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예배를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말씀예배를 일상적인 식사의 음식으로, 성찬예배를 특별한 날 특별한 식사를 위한 특별한 음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이 과연 성경에 근거한 인식일까? 아니면 성찬을 너무 귀하게 여긴 결과일까? 이도 아니면 편의주의의 산물일까?

# 예배에 있어 직분의 역할

잘 알려진 것처럼 성경에 근거한 항존직에는 크게 장로직와 집사직이 있다. 그리고 장로란 성경에서 감독이라는 다른 용어와 일치하는 직분으로써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 그리고 다스리는 장로로 구분된다. 항존직이란 어느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 속에 항상 존속해야 하는 교회 직분을 의미하는 것이지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평생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의 예배는 바로 이 교회의 직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직분자들은 사실 예배를 위해 세워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는 말씀에 근거하여 신자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광의의 예배 개념과 특별한 장소와 시간에 신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협의의 예배 개념이 모두 포함된다.

가르치는 장로로서 목사의 주요 직무는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다스리는 장로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서 가르쳐진 말씀에 따라 성도다운 삶을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면밀히 살피는 영적 감독자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세워진다. 즉 장로란 신자들의 모임을 통한 공적인 예배와 신자 개인의 삶을 통한 사적인 예배가 일치하도록 권면하고 인도하는 직분자이다. 마지막으로 집사 직분은 공적인 예배를 통해 신자들에게 나누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들을,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모든 성도들이 받은 분량에 따라 함께 나누고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오늘날 수많은 모임에 무차별적으로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예배는 우선 주일에 드리는 공식적인 교회의 예배 모임으로 제한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예배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즉 그것은 “사도의 가르침(=말씀봉독과 설교)과 교제(=영적이고 물질적인 은사를 나눔)와 떡을 뗌(=성찬)과 기도(=찬양 및 기도)이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가 있는 교회에서는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사가 예배의 집례자가 되어야 한다. 즉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고 축도를 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다. 한 교회에 목사가 2인 이상일 경우에는 인도와 설교와 기도와 축도를 나누어서 할 수도 있겠지만 이때에도 가능한 축도는 설교를 담당한 목사가 하는 것이 합당하다.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때로 장로도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목사가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다른 목사를 설교자로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곤 한다. 이 때 장로는 자신이 직접 설교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작성되어 있는 누군가의 설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대독하는 형식의 설교를 하고, 그리고 반드시 이렇게 대독한 설교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즉 설교를 작성한 목사의 이름을 밝힌다. 왜 장로가 설교를 직접 작성할 수 없는냐 하면 그는 설교를 작성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신학교를 졸업하고 설교할 수 있는 강도권(?)을 가진 사람이 장로일 경우에는 설교를 직접 작성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때에도 교회로부터 먼저 그렇게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

다스리는 장로는 교인들을 살피는 자신의 직분과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교인들을 맞이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렇게 하면 누가 오고 누가 오지 않았는지 좀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성도는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로가 목사 대신에 기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로가 목회자는 아니지만 성도들의 삶 전반을 보살피는 직무를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면 목회자와 함께 교회와 교인을 위한 기도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목사가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광고도 직분으로 따지면 목사나 장로가 맡아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평상시 말씀예배 시간에는 수전 위원으로, 그리고 성찬 시에는 배찬과 배병 위원으로 섬기기에 적합한 직분은 집사일 것이다. 왜냐하면 집사 직분의 주된 일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와 장로의 우선적이고 주된 사역이 성도들의 영적인 삶을 보살피는 일이라면 집사의 주요 업무는 성도들의 육적인 필요를 살피는 일이다. 우선적이고 주된 사역을 그렇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지 그 사역이 모든 면에서 분명하게 분리되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때로 그 둘은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직분이 서로의 영역을 마치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주장하듯이 서로를 구분하고 분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 전체를 위해 함께 공조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리고 서리집사라는 직분은 장립집사가 없던 시절의 임시 직분이므로 장립집사의 수가 충분한 교회에서는 더 이상 서리 집사를 임명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예배의 집례자는 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집례자는 예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집례자가 예배의 주인공도 아니고 주인공이 되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집례자는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와 축도는 목사의 권리이고, 기도는 장로의 권리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은 참으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목사와 장로가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게 하도록 만든 교인들도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장로들은 무게 잡고 앞자리 지정석이 앉아서 젊고 예쁜 사람을 안내 위원으로 세워 교회 정문을 치장하는 것은 전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이다. 장립집사들은 교회의 요직에 앉으려고 하면서 정작 수전 위원으로 수고하려고 하지는 않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이 글을 읽는 목사와 장로와 장립집사 중에 이 글에서 자신의 권리를 신장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자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장로를 기도의 자리에서 몰아낸 근거를 찾는 목사, 목사도 장로고 나도 장로고 다 같은 장론데 나라고 목사가 하는 설교 못하겠느냐 식의 사고를 가진 어처구니없는 장로, 당회가 항상 마음에 들지 않고 특히 장로의 행태를 눈꼴사납게 생각하면서 트집 잡을 건수만 찾고 있는 장립집사 가운데 배병, 배찬 위원도 우리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옹졸한 집사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예배 가운데 설교나 기도나 축도나 찬양이나 배병배찬 등 어떤 것도 어떤 직분의 고유한 권한과 권리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권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수행하도록 세우신 특정 직분과 직분자에게 맡기신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 직분과 직분자들에게 맡기신 우선적인 위임 내용은 그들이 수행해야할 임무요 이루어야할 과업이지 임무와 과업에 따라오는 권리가 아니다. 직분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맡겨진 신성한 임무와 과업을 먼저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자신의 권리부터 찾고자 한다면, 그리고 교인들 역시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세우신 직분자들을 먼저 존경하고 따라야 하고 설령 세워진 직분자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할지라도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의 자세를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직분자들을 존경하고 따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비난하고 흠집을 내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 교회는 분명 심각한 영적 질병에 걸린 중환자임에 틀림없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예배를 위해, 그리고 이 땅 위에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할 모든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교회에 세우신 도우미들이다. 이 도우미들은 한 사람이 모든 교회의 일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먼저 도우미들 사이에 갈등과 불화가 없어야 도우미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다. 물론 교회 역시 불완전하고 허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인지라 갈등과 불화가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화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노력을 위해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과 타인의 불완전한 모습이 안타까워 탄식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직분자와 교인은 분명 하나님의 교회를 이 세상 가운데 훌륭하고 아름답게 건설해가는 그리스도의 군사일 것이다.

 

2010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