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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카디에|이오갑|1995년 05월 20일|214page|23cm||5,000|||
칼빈의 전기를 쓰는 일은 쉽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전기를 쓸 만큼 충분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인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작품 어디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설교에서도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전무하다. 이러한 사실은 루터의 경우와 상당히 대조적이다. 루터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많이 하고 있다. 그래서 전기를 쓰기가 한결 쉽다. 하지만 칼빈의 경우에는 그의 서신들 이외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서신들에서도 가신의 사적인 이야기는 사적인 감정을 서술하는 편지가 그렇게 많지도 않아 전기 쓰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칼빈에 관한 전기들은 많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연대별 칼빈의 사역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들이다. 거기에다가 칼빈의 연대별 서신들을 분석하여 내용을 첨가하는 것이 전부다. 쟝 까디에르의 저술 역시 이와 같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에밀 두메르그(Emile Doumergue)가 7권으로 된-7권 모두가 칼빈의 생애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방대한 칼빈 연구서를 출판한 이래 프랑스 학자들이 칼빈의 전기를 쓰는 일은 한결 쉬워졌다. 그러나 반대로 그만큼 어려워진 것도 사실인데, 그 이유는 두메르그의 칼빈 전기를 요약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오갑 교수가 역자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저자 까디에르는 프랑스 최대의 백과사전인 Encyclopaedia Universalies의 “칼빈”과 “칼빈주의” 항목을 맡을 만큼 칼빈 연구의 대가이다. 대가답게 그의 글은 명쾌하고 쉽다. 딱딱한 학문적 전기가 아니라, 마치 “칼빈”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서술이 이 책의 특징인데, 그러면서도 저자의 학자연한 성실성을 잃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 칼빈이 어떻게 종교개혁가가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칼빈이 종교개혁가가 된 것은 실상 자신의 의지와는 정 반대의 결과였다. 저자가 칼빈 전기의 제목을 [칼빈,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으로 정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칼빈을 종교개혁가로 길들여 만드셨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칼빈은 자신의 의지와 상반되는 파렐과 부써의 권유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마치 그 두 개혁가의 권유가 사람의 권유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빈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자신의 의지를 꺾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미래가 불확실하고 위험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종교개혁가의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나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걸 떠올렸기 때문에 나는 나의 마음을 죽여 주님께 제물로 바칩니다.”(번역서 120. 칼빈이 파렐에게 보낸 서신 중에서) 이 고백이 곧 칼빈의 좌우명이 되었다. 이런 고백은 칼빈 사상의 핵심인 “자기부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생각이나 해야할 것을 지배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힘써서 우리 자신을 잊읍시다...”

한국 사람이 칼빈의 전기를 읽는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수많은 외래 지명과 인명들의 등장이다. 이런 어려움은 달리 어쩔 수 없는 독자가 감수해야할 몫이다. 그리고 번역서 105의 “이레니우스적”이라는 것과 110의 “이레니우스주의”는 각각 원문의 irenique와 irenisme를 번역한 것인데, 이 둘은 각각 “평화적인”과 “평화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