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 탄생 500돌… ‘칼빈박물관’ 운영 정성구 목사 인터뷰

“자격 갖추면 설립제한 없는 교회

파벌싸움으로 분열… 비난 마땅”


《“루터가 단단한 바위산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킨 사람이라면 칼뱅은 루터가 깬 바위에 글자를 새긴 사람이다.”

영국 교회사학자 필립 숍의 말이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주도했고 장로교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장 칼뱅(1509∼1564·영미권에서는 존 칼빈)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다.

개신교계는 탄생 기념일인 7월 10일을 전후해 기념대회와 학술대회,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다.

40여 년간 칼뱅 연구에 전념해온 정성구(69·경기 용인시 칼빈대 석좌교수) 목사를 5일 만나 종교개혁의 정신과 현재적 의미를 들었다.

총신대와 대신대 총장, 칼빈학회 회장을 지낸 그는 1985년부터 칼빈주의연구원과 국내 유일의 칼빈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칼뱅은 어떤 인물인가요.

“칼뱅은 종교개혁의 2세대이지만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선생처럼 루터와 츠빙글리 등 이전 종교 개혁자와 동료들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1559년 스위스에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는 한 해 1600여 명의 학생이 몰렸고 이들이 출신국가로 돌아가 종교개혁의 주역이 됐습니다.”

―왜 칼뱅이 그런 큰일을 하게 됐는지 해답은 얻으셨나요.

“하나님의 지혜죠. 도저히 큰일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이에게 일을 주시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신 겁니다. 제가 박물관을 세운 것도 칼뱅의 위대성을 찬양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변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절반은 아내의 공이죠. 집으로 치면 몇 채 값을 날렸죠. 지금도 외국에 나가면 몇 백만 원이 넘는 책부터 먼저 산 뒤 남은 기간은 빵과 물로 때웁니다.(웃음)”

경기 성남시 분당동 4층 양옥 지하에 있는 박물관은 20평 남짓하다. 하지만 이곳과 1층 연구원에는 16∼19세기 칼뱅과 관련된 희귀 자료와 책, 16세기 인쇄된 초대 교부들의 원전 등 1만여 점이 있다.

정 목사는 1965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재학하면서 칼뱅에 빠져 들었다. 그는 “칼뱅은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만큼 위장병과 천식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렸고 가정적으로도 불우했던 인물”이라며 “왜 하나님이 고독하고 불행한 인물을 ‘도구’로 쓰셨는지가 궁금했다”고 말했다. 그 뒤 40여 년간 칼뱅과 관련된 자료를 모았고, 1985년에는 교회 건립 등을 위해 사둔 시골의 임야를 팔아 연구원을 세웠다.


―개신교는 가톨릭에 대한 개혁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물량 위주의 성장으로 개혁의 대상이라는 지적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저울 양쪽에 성경과 부패한 사제를 올려놓고 무게를 재는 풍자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저울은 성경 쪽으로 기울죠. 가톨릭을 비판해온 개신교계가 이제는 수십 명이 저울에 올라가도 가벼워지는 현실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감리교를 포함한 개신교단의 반목과 분열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국내 개신교는 자격만 갖추면 누구라도 내일 십자가와 교회 간판을 세울 수 있죠. 이 방식은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교회가 왕성하게 성장하는 반면 분열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분열은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헤게모니와 사람 위주의 파벌 다툼이라는 점에서 욕을 먹어도 싸죠.”

―칼뱅 종교개혁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기독교는 눈물과 피로 세워진 종교입니다. 초창기와 종교개혁 시기의 고난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칼뱅의 정신은 한국 교회를 위한 가슴의 불이 되어야 합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