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칼빈, 웨슬리’의 종교개혁 정신 조명
12일 <기독교사상학교> 두번째 시간

[2009-01-13 07:00]

얼마 전 어느 리서치 기관에서 신뢰도와 관련,‘C-’란 낙제에 가까운 성적을 받아 든 한국교회. 이에 교회 안팎으로 교회 갱신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교회 일각에서는 460여년 전에 일어났던 마틴 루터의 전방위적 교회 개혁이 단행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종교 개혁에 성공했던 마틴루터. 그가 남긴 종교개혁의 유산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값어치를 갖는다. 그가 종교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정신을 어떻게 전승하고, 계승해야 할까?

12일 오후 교회다움에서 열린 ‘기독교사상학교’(Christian Thought School)’에 참석한 50여 명의 수강생들은 이러한 진지한 고민들을 갖고 교수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이양호 교수(연세대)는 이날 두번째 강의로 ‘루터, 칼빈, 웨슬리’란 주제로 종교 개혁의 사상가들을 차례로 살펴봤다. 1517년 10월 31일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있던 루터(1483.11.10 ~ 1546.2.18)가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며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당의 정문 벽에 붙여 발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 그가 이런 종교개혁 정신을 가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뭘까?

▲ 이양호 교수 ⓒ김진한 기자

이양호 교수에 따르면 첫째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종교 권력에 심취한 당시 교황청의 성직자들의 부패의 수위가 극에 달했던 것. 성직자에게 결혼은 얼토당토 하지 않지만 당시엔 쉬쉬하며 키운 아이들이 16명이나 되는 성직자들이 있을 정도로 그 도덕적 부패가 종교 전반에 만연돼 있었다.

둘째는 교회 제도 때문이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의 결정을 굳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면죄부’ 제도.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에 ‘95개조 반박문’ 붙일 때 영혼까지 사고, 팔 수 있다며 시장통에서 판매됐던 이 면죄부는 당시 실추된 교황청의 권위를 반증했다.

부패한 시대적 현실 그리고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반기를 든 루터는 95개 논제로 교황청의 권위에 도전했고, 오랜 논쟁과 투쟁 끝에 종교 개혁에 성공을 거둔다. 종교 개혁이란 시대적 과제 앞에 선 루터. 그는 95개 논제의 마지막 논제에서 말한 것 처럼 숱한 고난을 넘어 후대에 종교개혁가란 칭호를 얻기까지 한다. 루터는 마지막 논제(제95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반박문의 결론을 맺었다. “기독자는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한편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에 영향을 받아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을 거두고,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한 칼빈(1509.7.10 ~ 1564.5.27). 그 또한 종교개혁가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인물이다. 칼빈은 인문주의자들이 교회 권력을 지배하고 있을 당시 신권정치(神權政治)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내세워 종교개혁 운동을 했다.

그는 향후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했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자가 칼빈이라면 영국의 종교개혁자라 하면 존 웨슬리(1703.6.17~1791.3.2)가 떠오를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이기도 한 웨슬리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하고,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해 대규모 신앙운동을 전개했다.

이양호 교수는 이들 종교개혁자들을 두고 “종교개혁자들의 의지도 의지였거니와 시대적 상황이 그들을 그러한 길(종교개혁의)로 가도록 푸쉬해 준 것”이라고 했다. 이어 “지도력의 결핍, 교회의 세속화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교회에 종교개혁가들의 정신은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