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루터의 파문과 바르트부르크성에서의 은거

1521년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은 루터는 이제 황제의 심판석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의 국가 교회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잡하게 얽혀 있던 정치적 이해관계는 루터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터를 보름스(Worms) 제국의회에 소환하기로 한 것이다. 교황은 루터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황제와 독일 영주들의 도움이 필요하였으므로 각종의 정치적 책략과 술수를 동원하였고, 황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의 정치적 대립 때문에 루터를 미끼로 하여 교황 레오 10세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결국 1521년 3월 6일 루터를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하는 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정부는 신변보장을 약속하였으나 루터의 지지자인 선제후 프레데리히 등은 과거 요한 후스의 경우를 거울삼아 보름스에 가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복음을 불경건한 자들의 조소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보름스로 가기로 작정하고 4월 2일 비텐베르크를 떠나 보름스에 이르는 약 700㎞의 긴 여정에 올랐다. 보름스에 도착했을 때는 4월 16일이었고 이때는 이미 제국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루터가 제국회의에 출두한 날은 그 다음날인 17일이었다. 제국회의에는 황제인 찰스 5세, 일곱 명의 선제후들, 추기경 등 교회지도자들, 이 지역의 관리들, 외국의 대사 등 지도적 인물들이 대거 참여한 회의였고, 약 5000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회의장 안팎에 운집하고 있었다. 이 회의는 루터의 사활문제가 판가름 나는 법정이나 다를 바 없었다.

트리에르(Trier)의 주교 서기인 요한 엑크(루터의 라이프찌히에서의 논적이었던 요한 엑크와 동명이인임.)는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는 제국의회 석상의 탁자 위에 수집해 둔 책들이 루터자신의 저서들임을 인정하는가? 둘째는 그 책의 내용을 철회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루터는 그 책들이 자신의 저서임은 인정하였으나 두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였다. 24시간을 허락받은 루터는 하루를 보낸 후 4월 18일 제국회의에 출두하였다. 그는 자신의 책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 뒤 교리적, 혹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결코 자신의 입장을 취소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따라 확신을 갖게 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교회 회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역하는 일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에 관한 아주 오래된 초기 기록에는 루터는 독일말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그의 답변을 끝냈다고 기록하였다. 즉 루터는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나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 stehe ich. Ich kan nicht anderst. Gott helffe mir. Amen)."
   비록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았으나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보름스에 도착하였고, 4월 17, 18일 양일간의 제국의회에서는 두려움 없이 자신의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의 행동과 그의 양심은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의 대답은 이 확신에 대한 내적 고백이었다. 그래서 그는 1천년 동안이나 구라파교회를 지배해 오던 국가권력과 교황의 권위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프로테스트(protest)할 수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양심이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양심이었다. 한국의 많은 신자들은 코람데오란 말이 칼빈의 용어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루터가 즐겨 표현했던 용어로서 ‘…앞에서’란 뜻의 라틴어 Coram은 ‘…와 함께’라는 뜻의 Cum과 ‘입’이란 뜻의 or의 합성어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양심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입, 곧 고백이었다.
   루터의 답변이 있은 다음날인 4월 19일 황제 찰스 5세는 스스로 작성한 연설을 통해 일천년 동안 신봉해 온 로마교회의 전통을 수호할 것과 루터를 억압할 것을 천명하였다.

우리는 어제 루터의 연설을 들은 후 그를 처단하는데 주저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그의 말을 다시는 듣지 않겠습니다.……금후 나는 그를 공공연한 이단자로 간주할 것이며, 여러분도 신자로서 여러분의 의무를 이행하기 바랍니다.

이로써 제국의회의 형세는 결정되었다. 그러나 ‘보름스칙령’이 발표된 것은 이로부터 40여일이 지난 후였다. 즉 5월 6일 보름스국회에 파송된 교황사절 알레안더(Aleander)에 의해 작성된 최종적인 초안이 의회에 제출되었으나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지연되다가 루터를 정죄하기를 원하는 이들의 서명을 받고 5월 26일 공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칙령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루터는 교회를 더럽히고 참회를 무시한다.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부정하였다.……수도사의 복장을 한 이 악마는 지금까지의 모든 과오를 모아 놓은 자이며 그는 ‘열쇠의 권위’를 부정하고 평신도로 하여금 성직자의 피로 손을 씻도록 격려하고 있다. 그가 가르치는 교리는 반란, 분열, 전쟁, 살인, 강도, 방화 및 교계의 붕괴를 조장한다. 그는 짐승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교령(敎令)을 불태웠다…….
   그는 4월 15일부터 시작하여 21일간의 유예기간을 부여받았다. 루터는 이제 유죄판결을 받은 이단으로 간주된다. 그 이후에는 아무도 그에게 무슨 일이든지, 어떤 처소도 제공해서는 안 된다. 그의 추종자들도 그와 같은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루터의 저술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야 한다.

보름스 칙령은 루터에게 거처를 제공하거나 음식물을 제공하는 행위나 어떤 형태의 도움을 주는 행위를 금하였고 이를 거역하는 자에게는 황제 모독죄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루터를 ‘주님의 포도원의 야수’라고 했던 교황 레오 10세는 즉각적인 처단을 기대했으나 루터는 이제 무명의 수도사가 아니라 구라파 전역에서 직․간접적인 지원과 후원을 받고 있었고, 지식인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묵시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밤사이에 보름스시내 도처에 루터를 지지하는 농민들의 대자보가 붙는 일이 적지 않았다.
   4월 26일 루터는 보름스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안전보장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루터를 지지했던 선제후 프레데리히는 은밀히 루터를 빼돌려 아이제나흐 주변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으로 데리고 갔다. 루터 일행을 비밀리 체포하였던 이곳을 오늘날 Lutherhuche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선제후 프레데리히는 신성로마제국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루터는 선제후 프레데리히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후원을 받고 있었다. 영주는 자기 백성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는 중세적 신념을 굳게 고수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프레데리히는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통해 루터를 교황과 황제 양측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였고, 1518년부터 1521년여간의 정치적 발전들은 루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개혁운동을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루터는 이번에도 프레데리히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때의 루터를 보호하기 위한 계획이 치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명한 화가였던 알프레드 뒤러(Alfred Dûler)까지도 황제의 앞잡이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갔을 루터의 운명을 슬퍼했을 정도였다. 사실 루터는 보호받기 위해 체포되었고 감금되었을 따름이었다.
   루터는 1521년 12월에 잠시 비텐베르크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1522년 3월까지 10개월 동안 이곳에 체류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기사(騎士)로 변장을 하고 ‘융케르 게올그’(Junker Georg)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유명한 화가 루카스 그라나흐의 1521년도 작품인 ‘융케르 게을그’는 바로 루터에 대한 작품인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루터는 이곳에서 지내는 10개월 동안 신학적 논쟁이나 토론 등 복잡한 환경을 떠나서 잠시 동안이나마 자신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개혁운동의 확산을 위해 준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축복된 날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기간 동안 루터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우울증(Anfectungen)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K.S.Latourette, Christianity through the Ages, p.172). 그러나 루터는 열두 권에 달하는 책을 썼으며 에라스무스(Erasmus)가 편집한 헬라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때 쓴 대표적인 저술로는 시편 22편까지의 연구인 「시편연구」(Operationes in Psalmes), 「교회설교집」(Postilles ecclesiasliquoe), 「수도원서약에 관하여」(De votis monaticis) 등이다.
   무엇보다도 이 기간 동안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은 독일민족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준 가장 위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교회부패의 근본적인 원이이라고 보았던 루터는 성경번역의 긴박성을 깨닫고 이일을 착수하였던 것이다. 비록 루터의 번역본이 최초의 독일어 역은 아니었을지라도 “천재적이고 독창적인 업적이었다”(Lortz). 번역은 1522년 2월에 완성되었고, 그 이듬해인 1523년 9월에 출판되었다. 신약번역을 끝낸 후 루터는 여러 히브리어 교수들의 도움을 얻어 구약성경을 번역하였고 1534년에는 성경전서가 독일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여러 차례 다듬어진 그의 완역성경은 그 후 표준적인 독일어 성경의 위치를 점해갔고, 그 표현의 장중함과 적절함으로 인해 독일문학사상(文學思想) 획기적인 업적이 되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은거해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루터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욱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복음적인 예배의식과 함께 미사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하였고 성상(聖像)의 사용이나 독신제의 서원을 정죄하였다. 그 결과 그 도시에는 흥분한 군중들의 대대적인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과격한 행동은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와 같은 급진운동의 지도적 인물은 칼슈탓트(Carlstadt)와 쯔빌링(Gabriel Zwilling, 1487-1558)이었다. 쯔빌링은 어거스틴파 수도사 출신이었는데 이 수도원의 40명의 수도사 중 수도사의 서원을 포기하고 이곳을 떠난 30명중의 한사람이었다. 프레데리히 선제후가 염려스럽게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1521년 가을에는 더욱 과격한 개혁이 감행되었다. 결국 비텐베르크 시의회가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터는 비록 미사의 폐지나 성상제도, 독신제도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으나 점진적인 개혁을 원하고 있었다. 루터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이 무렵에 쓴 루터의 작품이 「미사의 남용에 관하여」(On the Misuse of the Mass, 1521, 11)이다. 이 책에서는  미사제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고 로마교적 미사교리를 비판하였고 ‘희생제사’(Sacrificium)와 ‘은혜(beneficium)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다.
   루터가 없는 비텐베르크에서는 과격한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는데, 특히 1521년 12월말 경에는 소위 ‘쯔비카우의 예언자들’(Zwickau Prophets)이라고 불리우는 니콜라스 스토르히(Nicholas Storch), 마르크 쉬튀브너(Mark Stiibner), 토마스 드레히젤(Thomas Drechsel) 등이 비텐베르크에 와서 칼슈탓트 등과 합세하여 큰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쯔비카우는 종교적 혁명 발상지로 알려진 곳인데 1462년에는 27명의 왈도파신자들을 재판하고 탄압했던 곳이기도 하다.
   쯔비카우의 예언자들은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강조하였고 기록된 말씀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을 강조하는 내재주의적, 주관주의적 신비주의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모든 신부주의가 그러하듯이 이들은 매우 과격하였고 혁명을 통한 신국의 도래를 열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멜랑히톤은 루터에게 비텐베르크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521년 12월 4일 비밀리 베켄베르크를 방문하였던 루터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하기 전날 밤 학생들과 시민들은 성당에 들어가 미사를 방해하고 사제를 끌어내리는 등 폭력행위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곳의 개혁운동은 오도된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루터는 곧장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돌아갔고 이때 집필한 소책자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진지한 권고, 소요와 난동을 막아라」(A Sincere Admonition to all Christians to Guard Themselves against Tumult and Revolt. 1521. 12)는 글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국가론에 관한 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국가의 존재이유를 신학적으로 조명한 작품으로서 종교개혁은 칼슈탓트와 같은 인간적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이 같은 행동은 국가의 힘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글은 루터가 1520년에 쓴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보다는 국가관에 있어서 보다 덜 낙관적이다.
   이제 루터는 더 이상 바르트부르크성에 은거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를 아끼는 선제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10여개월동안 은거해 있던 이곳을 떠나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였다. 이때로부터 1546년 그가 죽기까지 거의 대부분을 비텐베르크에서 보내며 교회 개혁운동을 이끌어 갔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오도된 개혁운동의 실상을 보면서 8편의 연속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에서 루터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고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루터가 기록된 말씀을 강조한 이유는 열광주의자들이 기록된 말씀, 곧 외적인 말씀(exteral word)보다는 성령 혹은 내적인 말씀(inner word)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과격파들은 성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믿는 자의 영혼 속에 말씀하신다고 주장하여 기록된 말씀과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계시를 소홀히 여겼던 것이다. 루터는 또한 어떤 조건이나 동기에서든지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는 바울이 아덴에서 이방종교의 신당과 제단들을 대했을 때의 태도를 예로 들면서 폭력의 사용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또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내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쓴 글 가운데서 아무에게든지 폭력으로 사람을 제제하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면죄부와 교황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힘으로나 완력으로 한 일은 없었다.”고 했고 “나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기술한 것뿐이다. 그 밖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비텐베르크에서 행한 루터의 설교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것(diaphora, essentials)과 비본질적인 것(adiaphora, nonessentials)을 구별하였다는 점이다. 복음, 계시, 이신칭의 등과 같은 기독교 복음의 근본진리가 본질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예배의식, 수도원 입단을 위한 서원, 성상(聖像) 등은 비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루터는 후자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고, 이름 그대로 환경과 시대와 장소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루터의 입장 때문에 루터파(Lutheran)는 가톨릭의 여러 가지 의식이나 요소들을 그대로 전수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칼쉬탓트는 주로 이 후자의 것을 개혁하기 위해 과격한 행동이나 폭력을 사용했었다. 루터와는 달리 개혁파는 루터가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았던 것에 대해서도 성경적 원리에 따라 철저하게 개혁함으로써 교회생활 전반에 성경적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혁파교회(Reformed church)는 루터파보다 더 성경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지도력 하에서 ‘쯔비카우의 예언자’들은 비텐베르크를 떠났고 이 도시는 다시 평온을 회복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고 설교도 하고 집필도 계속하였다. 새로운 샘물을 근원에서 마시기 위해 독일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루터는 더 이상 보름스칙령에 매여 있지 않았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점차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가톨릭에 대한 항거 또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판 신약성경이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고 루터의 작품들이 인쇄술의 힘을 입어 각처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1521년 12월에 출판된 멜랑히톤(Melanchton, 1497-1560)의 「신학요의」(Loci Commues) 또한 루터파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