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혁운동의 발전과 개혁파의 형성

취리히에서는 시의회의 지원 하에 괄목할 만한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회당에서 성상(우상)이 제거되었고 오르간의 사용도 금지되었다. 오르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쯔빙글리가 음악을 혐오했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쯔빙글리는 예술, 특히 음악 애호가였고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1525년 4월에는 가톨릭의 미사가 폐지되었고 그 대신 성경적인 성찬예식이 시행되었다. 많은 사제들, 수도사들, 그리고 수녀들은 독신제도의 굴레를 벗고 결혼하였다.
   쯔빙글리는 취리히 시의회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재능 있는 설교가이자 조직가였고 행정적인 수완을 겸비하였기 때문에 시외회로 하여금 개혁운동을 지원하도록 이끌어 갔던 것이다. 이제 취리히에서의 변화는 스위스의 다른 주들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스위스 연맹(The Swiss Confederation)은 현대적 개념의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라 독자적인 법률과 행정부를 갖춘 여러 자치주들의 연합체였다. 이들 주(현)들은 몇 가지 공통의 목표들을 위해 연합적 기구를 갖추었을 뿐이다. 독일제국으로부터의 독립도 그 여러 목표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주들은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여 개혁을 단행한 반면, 어떤 주들은 계속 로마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차이는 이미 존재하던 다른 갈등 요인들과 어우러져 긴장이 고조되었다. 당대의 대표적인 보편적 세계주의자(cosmopolitan)이었던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쯔빙글리는 열렬한 애국자였으므로 스위스의 모든 주가 교황의 멍에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삼림지역의 주들은 계속 로마가톨릭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취리히에서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1524년 4월 종교적 위협을 느낀 다섯 개의 삼림주, 곧 슈비츠(Schwyz), 우리(Uri), 운터발텐(Unterwalden), 쭈크(Zug), 루체른(Luzern) 등은 가톨릭 신앙수호를 결의하여 연합하였다. 이들 주들은 종교적 문제 외에도 취리히가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일련의 변화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고 스위스연방 내에서 자기들의 지도적 위치를 계속 고수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1524년 소위 베켄리이드(Beckenried)동맹을 체결하였다. 이것은 취리히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위험을 의식한 쯔빙글리는 「경건한 연방주들에게 보내는 신실하고 진지한 권면」이라는 소책자를 작성하여 스위스인들이 고백적인 문제로 서로 싸우지 말 것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이 호소는 받아들여지질 않았고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주들과 취리히 등 복음주의 신앙을 지지하는 주들 간의 적의는 깊어만 갔다.
   이렇게 되자 스위스 연방의회는 1526년 아르가우(Aargau)에 있는 바덴(Baden)에서 종교회담(토론회)을 개최하였다. 이 회담은 5월 21일 개최되어 4주간 계속되었다. 가톨릭측에서는 바젤, 쿠르(Chur, Coire), 콘스탄츠, 로잔의 대표들 외에도 요한 엑크와 요한 파버(Johnann Faber)박사, 그리고 토마스 뮤르너(Thomas Mürner)를 파견하였다. 요한 엑크는 라이프찌히에서 루터와 토론했던 당대의 로마 가톨릭 학자였고, 파버 역시 우수한 학자이자 토론자였다. 뮤르너는 프란체스코 교단소속의 위대한 논쟁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취리히를 지지하는 복음주의 측에서는 바젤의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와 베른의 베르톨드 할러(Berthold Haller)를 파송하였다. 외콜람파디우스는 바젤의 종교개혁자로서 바젤대학 성경신학 교수였으며 성 마틴교회의 설교자였다. 할러는 베른의 종교 개혁자였다. 요한 엑크가 이 토론을 주제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쯔빙글리는 참석을 거부하였다. 이 종교회담에서는 성찬예식, 원죄, 연옥교리, 성상, 성자숭배 등에 대해 토론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바덴 논쟁은 로마 가톨릭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되자 스위스 연방 내의 개신교도들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압력을 가중되었다.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주들은 쯔빙글리를 축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취리히를 비롯하여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Schaffhausen) 등은 이를 반대하였다.
   1527년 2월과 3월은 바젤과 콘스탄츠에서 또 다른 신학 논쟁이 있었는데, 이때에는 개신교측이 승리하였다. 또 1528년 1월에는 베른에서 논쟁이 있었는데 이 논쟁은 3주간 계속되었다. 이때에는 베른의 성직자와 주 의회 대표들 외에, 독일의 고지대 도시들, 이를테면 스트라스부르크, 콘스탄츠, 진다우 그리고 메밍겐 등의 대표들도 참석하였다. 이 토론회는 매우 중요한 회의였고 결과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토론에서는 복음주의 신앙을 주장하는 이들이 크게 승리하였다. 당시 베른은 취리히와 더불어 스위스연방의 가장 중요한 주였다.
   베른 논쟁 이후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주들은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주들의 베켄리이드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1529년 동맹을 체결했는데, 이 동맹을 보통 ‘그리스도교적 동맹’(Christian civic union)이라고 부른다. 이 동맹에 가입한 주는 취리히, 베른 외에 콘스탄츠, 세인트 갈, 바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 등이었다.
   1529년 4월에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주들이 스위스의 오랜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Habsburg)가(家)의 페르디난트 공작과도 동맹을 맺었다. 즉 종교개혁을 반대하고 로마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오랜 정적(政敵)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는데 이것은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챨스 5세와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와 같은 위기 앞에서 쯔빙글리는 프로테스탄트 주들이 먼저 군사적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다른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먼저 무력을 사용하는 데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었으므로 쯔빙글리는 다른 주의 원조 없이 1529년 6월 8일 로마 가톨릭 주들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베른은 마지못해 취리히를 따랐다. 그러나 그해 6월 26일 중재적 화의(和議)가 이루어지므로 카펠에서의 결전을 피할 수 있었다. 이제 체결된 조약을 보통 제 1차 카펠 평화조약(the First Peace of Cappel, 1529. 6. 26)이라고 하는데 이 조약은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주들이 페르디난드와 맺은 조약을 취소하는 한편, 복음적 교회들의 존립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비록 일시적인 평화가 이루어지고 양측의 피해는 없었으나 황제 챨스 5세 주도하에 로마 가톨릭측이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자, 쯔빙글리는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헷세의 필립(Philip of Hesse)의 도움을 받아 독일의 루터파와 연합하므로 개신교세력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독일의 루터파 역시 정치적인 위협 아래서 스위스의 쯔빙글리 측과의 협력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최되었던 회담이 이미 언급한 1529년 10월의 ‘마르부르크 회담’(Marburg Colloquy)이다. 이미 기술한 바이지만 이 회담에서 루터와 쯔빙글리간의 성찬관은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결국 이들 간의 연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아니 종교 개혁사에서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양자 간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정치적 손실을 입었는데, 루터파는 개혁의 본거지인 삭소니지방이 합스부르크가의 가톨릭 연합세력에 의해 점령당했던 것이 한 예이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독일지방 개혁운동은 루터파(Lutheran)로, 쯔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에서의 개혁운동은 후일 칼빈의 개혁활동과 연합하여 개혁파(Reformed)를 형성함으로써 복음주의 교회가 양대 세력으로 분리되었던 것이다.
   어떻든 1530년 전후의 스위스의 상황은 긴박하였다.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가톨릭 측의 선재공격을 내심 두려워하였고, 가톨릭 주들에 대한 밀, 소금, 포도주, 철 등의 거래를 금지하는 경제 봉쇄령을 내렸다.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삼림주들은 이에 대항하여 1531년 10월 11일, 약 8천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취리히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와 천주교간의 종교전쟁이었다. 취리히는 카펠에서 이들과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전투에 참가하였던 쯔빙글리도 10월 11일 전사하고 말았다. 취리히측의 전사자는 4백명 이상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는 26명의 시의회 의원과 25명의 목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취리히가 패전한 가운데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때 체결된 조약이 ‘제 2차 카펠 평화조약’(The Second Peace of Cappel, 1531. 11. 20)이다. 이 조약은 프로테스탄트측에는 불리한 것이었다. 즉 프로테스탄트는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이 금지되고 현 상태로 남아 있어야 했고 프로테스탄트지역에서의 가톨릭교도의 예배의 자유를 허락해 주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을 지지하는 주에 속한 신교도들에게는 이러한 특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취리히에서는 프로테스탄트신앙과 예배가 허용되었으나 종교개혁의 확장은 중지시킨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역사가 지난 후 돌이켜 볼 때 카펠 전투에서의 패배는 오랜 기간 스위스에서의 신앙 고백적 경계선을 그어 놓은 결과를 가져 왔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초까지 가톨릭을 지지하는 주들과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주들이 거의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쯔빙글리가 죽은 후 스위스 개혁운동은 레오 쥬드(Leo Jud)와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계승되었다. 불링거는 브렘가르텐(Bremgarten) 출신의 성직자로서 쯔빙글리의 후계자이고, 사위이며, 전기 작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