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혁의 도시 제네바

1536년 7월 칼빈의 제네바 도착은 프로테스탄트역사에 있어서 실로 커다란 발전의 시작이었다. 칼빈이 이곳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후일 칼빈이 이 도시의 개혁자로 생애를 바치며, 이 도시가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중심지가 될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1536년 7월 이 날을 우연한 사건, 한 순례자의 의미 없는 행로(行路)로 남겨두지 않았다.
   1536년 7월 11에는 북구 인문주의 운동의 왕자였던 에라스무스(Erasmus)가 스위스 바젤에서 숨을 거두고 같은 해 프랑스 인문주의 운동의 선구자 르페브르(Lefivre d'Etaples)가 네락(Nelac)에서 긴 생애를 마감했는데 어느 학자는 이를 두고 프로테스탄티즘의 가면을 쓴 에라스무스의 휴머니즘(Humanism)과 로마 가톨릭의 겉옷을 입은 르페브르의 사이비 프로테스탄디즘이 사라지고 칼빈의 명백하고 적나라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독교 강요」라는 참신하고 박력있는 운동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떻든 정확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칼빈이 1536년 7월 제네바에 도착한 것은 그 이후의 종교개혁사르 결정짓는 중요한 역사의 분기점이 된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제네바의 정치적 상황
1536년 당시 제네바는 13,000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였고 명목상 제국과 프랑스 왕의 통치아래 있었다. 헤롤드 그림은 이 당시 제네바의 인구를 17,000명으로 산정하였다.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간의 교역 중심지였다. 따라서 상업적인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도시는 평화로운 레만(Leman)호수를 끼고 있는 도시였으나 항상 평화롭지는 않았다. 특히 1520년대 이후 정치적, 종교적 변혁과 혁명의 와중에 있었다. 특히 이곳은 윤리적 수준이 낮은 여러 부류 사람이 살고 있었으므로 향락적 분위기가 이 도시의 도덕의식의 향상을 방해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제네바는 봉건영주였던 사보이(Savoy)공이, 종교적으로는 제네바 주교 삐에르 드 라 봄므(Pierre de la Baume, 1522-38)가 인척관계를 맺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1517년부터 이들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고 1519년에는 이들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526년에는 인접한 도시인 베른(Bern)과 프리부르크(Fribourg)와 동맹을 맺어 또다시 사보이가(家)의 축출을 시도하였다. 사치의 낭비로 평판이 좋지 못했던 제네바의 감독 삐에르 드 라 봄므는 1527년 제네바에서 도주하였고 1533년 잠시 귀국했으나 곧 다시 도피하였다. 그래서 1534년 10월 주교직의 공석을 공식 선포함으로써 사보이가를 영구히 축출하게 되었다. 이 정치적 변혁이 이 도시의 종교개혁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당시 제네바의 행정은 일련의 대의 제도인 회의들(councils)에 의해 시행되고 있었는데, 첫째로 모든 제네바 시민들로(한 가정의 한 사람을 대표하는) 구성되는 총회(General Assembly, 혹은 콤뮨 Commune이라고도 불림)가 있었는데 이 총회는 4명의 평의원(Syndics)과 시재정관(city treasurer)을 선출하였다. 이 4명의 평의원은 시의 질서와 치안을 담당하는 주요권력 기구였고 동시에 최고 의결기구였던 25인회 회원이 되었다. 둘째로 소위원회(Little council)라고 불리기도 하는 25인회는 시 행정을 주도하는 집행기구였다. 그리고 후에 생겨난 의결 기관이지만 200인의 귀족들로 구성되는 대위원회 혹은 200인회(Council of two hundred)가 있었다. 소위원회는 대위원회, 곧 200인회의 회원을 선출하였고, 반대로 200인회(대위원회)는 매년 16인의 소위원을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넷째로 60인들로 구성되는 60인회(council of sixty)가 있었다. 총회는 모든 시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대 사안이 있을 때만 소집되는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제네바시에서의 종교개혁의 단행은 먼저 25인회의 결의를 거쳐 1536년 5월 21일에 제네바 전체 시민들로 구성되는 총회에서 정식 인준을 받았던 것이다.

파렐의 개혁활동
이 도시에서의 종교개혁의 조짐은 1520년대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루터의 작품들이 비밀리 회람되고 있었고 시민들에게 새로운 종교사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1522년에는 프란체스코 수도사였던 프랑소와 랑베르(Francois Lambert d'Avingon)가 루터파로 개종하여 복음적인 설교를 행하기도 했으나 이 도시의 정치적 소요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의 전파가 원활하지 못했다. 1531년 10월 1일 파렐은 쯔빙글리에게 “제네바 시민들에게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다”고 보고 하였는데 아마도 보다 분명히 개혁의 기운이 일고 있음에 대한 보고로 판단된다.
   1532년 6월 2일 면죄부 판매가 제네바에서 허락됐을 때 당시 교황 클레멘트 7세를 비난하는 격문이 시내에 유포되었던 일은 이미 가톨릭의 공로사상에 대한 반발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간헐적인 개신교적 운동이 있었지만 이 도시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은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에 의해 주도되었다. 파렐은 1532년부터 제네바에 와서 앙토안느 프로망(Antoine Froment)과 삐에르 비레(Pierre Viret)의 도움을 받으며 복음주의 신앙운동, 곧 교회개혁을 시작하였다. 파렐은 칼빈의 그늘 아래서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프랑스인으로서 도피네(Dauphine)에 있는 갑(Gap)이란 곳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파리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1521년 루터의 사상 곧 이신득의의 신앙원리를 받아들였고 복음주의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지하교회를 설립하는 등 활동적으로 일했으나 1523년 박해를 받고 스위스 바젤로 도피하였다. 바젤에서 외콜람파디우스와 친교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영향(아마도 에라스무스와 신학적 토론을 벌인 것으로 보임)때문에 바젤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곧 베른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작은 소책자 세권을 썼는데 「주기도문 강해」(1524), 「예배지침서」(1525) 그리고 「신앙개요」(1525)가 그것이다. 1532년 10월 4일에는 그의 친구 앙토안느 소니에(Antoine Saunier)와 함께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제네바에 안착한 파렐은 제네바시민들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다소 격렬한 설교를 행했는데 아직은 그의 설교가 수용될 수 있는 상황은 못 되었다. 그의 설교는 도리어 반감을 샀고 제네바는 그의 정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렐은 친구 소니에와 올리베탄(Olivetan)과 함께 제네바를 떠났다.

이듬해인 1534년 12월 20일 파렐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이때로부터 파렐의 영구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이지만 이때는 제네바시에는 주교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파렐의 영향력 하에서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1534년 1월 27일에서 2월 3일까지의 제 1차 토론과 1535년 5월과 6월의 4주간 개최된 제 2차 토론을 거쳐 개혁의 불길이 확산되었고, 1535년 8월에는 성 삐에르 성당의 설교자가 되었다. 당시 유명한 대성당에서 프로테스탄트신앙을 주장하는 설교가 행해졌고 성상과 우상은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8월 10일에는 미사가 금지되었고 구교의 질서들은 서서히 퇴각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536년 5월 21일 제네바시민들로 구성되는 총회에서는 만장일치로 복음주의적 형태의 예배만을 실시하기로 가결함으로써 이 도시에서 종교개혁이 공식적으로 단행되었다. 교회재산은 시의회가 관할하기로 하는 한편 취리히에서의 경우처럼 국가교회형태를 취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파렐의 개혁운동이 가져온 복음주의 신앙의 승리였다. 파렐은 다혈질적이고 목소리가 우렁찬 정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공식적으로는 제네바시가 복음주의 신앙을 채택하도록 하였으나 신조나 신앙고백의 작성, 요리문답의 재정, 예배형식의 확립, 신앙교육과 훈련, 교회조직 등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었다. 당시 제네바는 도덕수준이나 윤리적 상태는 매우 저급하였고 무질서와 방탕이 심했고 매우 향락적인 도시였다. 그래서 성공적인 개혁운동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특히 누군가 조직력을 갖춘 학자적인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가 바로 이 때였고, 제네바가 개혁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지 꼭 두 달 뒤였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하루를 묵고 스트라스부르크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칼빈이 제네바에 온 것을 안 파렐은 칼빈에게 찾아갔고 제네바에 남아서 함께 개혁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강권하였다. 칼빈의 제네바 도착을 알려준 사람은 뒤 틸레(du Tillet)였다. 파렐과 칼빈의 만남은 극적이었고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칼빈보다 20년 연배인 파렐은 불타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계속적으로 칼빈에게 제네바에 남아서 개혁운동을 전개하자고 요구하였다. 칼빈은 학문연구에만 진력하겠다며 거듭 파렐의 요청을 거절하자 격앙된 파렐은 “당신이 만일 이 절박한 도움을 거절한다면 당신이 학문 속에서 찾는 평안에 하나님의 저주가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순간 칼빈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단순히 파렐의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왔다. 후일 칼빈은 이때를 회상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강한 손이 나를 붙들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나에게 내려와 계신 것 같았다”고 했다. 이 당시 상황에 대해 1557년에 쓴 「시편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파렐이 나를 제네바에 붙잡아 두려고 한 것은 권면이나 호소라기보다는 저주를 동원한 무서운 협박이었다. 그것은 마치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강한 손으로 나를 잡으러 오실 것처럼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 당시 내가 피하려던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는 지름길이 전쟁으로 막혔기 때문에 나는 단 하룻밤만 제네바에서 묵고 급히 제네바를 떠날 결심이었다. 제네바에서의 로마가톨릭의 영향력은 내가 도착하기 얼마 전 파렐과 피터 비렛(Peter Viret)이라는 뛰어난 인물의 노력으로 사라졌었다. 하지만 그 도시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그 도시는 무질서하고 불경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후일 신앙을 버리고 로마교로 되돌아갔으나)이 나를 발견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정에 불타고 있던 파렐은 나를 찾아와서 즉각 나를 붙잡아 두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였다. 모든 속박과 의무에서 벗어나 개인적 연구에만 몰두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가 너무나 컸으므로 자신의 간청이 통하지 않게 되자, 그는 긴급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내가 도움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은둔과 조용한 연구생활을 저주하실 것이라고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이 협박 때문에 나는 마침내 계획하였던 여행을 단념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수줍음을 잘 타고 용기가 없었으므로 어떠한 직위도 떠맡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하룻밤 유숙하고 떠나려 했던 칼빈은 제네바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의 제네바에서의 개혁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칼빈의 나이는 약관 27세였다. 아직까지 그가 「기독교 강요」의 저자임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익명으로 출판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 책의 저자임을 감추려 하였기 때문이다.
   제네바시 행정담당관에 의해 기록된 1536년 9월 5일자로 된 기록에서는 파렐에 대해서는 존칭을 쓰고 있지만(Mag. Guil. Farellus) 칼빈에 대해서는 이름까지도 생략한 채 그저 ‘저 프랑스인’(ille Gallus, that Frenchman)이라고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인 1537년 2월까지 칼빈에게는 어떤 사례금도 주어지지 않았었다. 이 무명의 개혁자인 칼빈은 잠시 바젤을 다녀와서 1536년 8월 중순부터 제네바교회의 성경강해자(Reader in Holy Scripture in the church of Geneva)라는 직함으로 제네바개혁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