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칼빈은 성례를 하나님의 가시적 말씀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어거스틴을 따른다. 그러나 더 길게 작성된 정의에서 이미 성례 개념을 소개하면서 그가 이를 특정한 약속을 확증하는 표지로서 언급하는 것을 보았다.

칼빈은 성례(sacrament)라는 단어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기초적 개념에 대한 그의 정의를 발전시킨다. 그는 고대 라틴 교부들이 헬라 단어 mysterion(신비)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용어는 숭고하고 영적인 것을 경외감을 가지고 표현하는 표징들에 적용되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계속 헬라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라틴 기독교인들에 의해 “sacramentum”이라 불리는 것을 헬라 기독교인들은 “mysterion”이라고 불렀다.

 

다음에 칼빈은 그의 관심을 이 단어와 성례 사이의 관계로 돌린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앞서 주어진 정의를 근거로, 우리는 성례에는 반드시 그 앞에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가 일종의 부록처럼 거기에 붙어 있어서 약속 그 자체를 학인하고 인치며, 그리하여 그 약속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칼빈에게 말씀과 성례는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말씀이 이룩하는 바를 일반적으로 성례도 이룩하는데 이는 양자가 동일한 목적을 위한 다른 수단임을 뜻한다. 말씀과 성례 둘 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공하고 세우며, 또한 그 분 안에서 하늘의 은혜의 보화들을 제시하고 세운다.”

 

칼빈의 사고에 있어서 말씀과 성례의 연결은 상당히 강력하다. 칼빈에 의하면, 성례가 성례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포함하여야 한다. 그는 말씀이 그 요소에 더해지게 하면 성례가 될 것이다.” 라는 어거스틴을 인용한다. 로날드 월레스(Ronald Wallace)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른 곳에서 칼빈은 성례가 비가시적이며 영적인 것에 대한 참되고 가시적인 표상으로서의 말씀이 우리를 거기로 인도하신다.” 고 정의한다. 이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복음의 증거는 성례위에 새겨져 있다.” 칼빈은 말씀 없이 성례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또한 성례 없는 말씀은 그 자체로는 의도된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고 밝힌다.

칼빈이 성례가 어떻게 인증으로서의 역할을 하는가에 관한 것으로 토론을 전환할 때, 그는 그의 교리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 답변하도록 요구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성례가 일반적으로 말씀이 이룩하는 바와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과잉 해석을 하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부의 문서나 기타 공적인 법령들에 붙여진 인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문서에 아무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거기에 인을 쳐 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이 적혀 있는 문서에 인을 쳐 놓으면, 그것은 그 적혀진 내용을 인증하고 보증해 주는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성례는 가장 분명한 약속을 가져다주며 성례는 말씀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약속들을 마치 생명으로부터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해주기 때문이다.”라고 첨가한다.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인증일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언약에 대한 상징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님께서 그의 약속들을 가리켜 언약이라 부르시고(6:18; 9:9; 17:2) 그의 성례를 그 언약의 표라 부르시므로, 사람들의 연약과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돼지를 잡는 행위에 말이 첨가되지 않는다면, 아니 그 행위에 앞서서 말이 없다면, 그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별다른 깊은 의미가 없어도 돼지를 잡는 일은 흔히 있으니 말이다. 전쟁에서 손을 잡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으니, 그저 오른손을 내민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말이 먼저 주어지면, 그런 표징(, 오른손으로 악수하는 일)을 통해서 언약을 법으로 비준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생각하고 결정하고, 말로써 공포하였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더욱 확증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번역: 이신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