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교회는 모든 교회력을 폐지했는가? 아니다. 16세기 츠빙글리의 도시 취리히는 개혁 이후에도 최소한 6개의 주요 교회력을 지켰는데, 그것은 1225일 성탄절, 11일 할례일, 325일의 수태고지일, 부활절, 승천절, 오순절 즉 성령강림절이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에 따르면, 그 중의 부활절과 오순절은 성경적이고 주일이므로 지키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또한 제네바는 칼빈이 그 도시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1225일에 가장 가까운 주일에 성탄절을 지키고 있었다. 칼빈 역시 성탄절을 교회력 가운데 최고의 지위를 부여했다. 물론 칼빈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인 주일을 가장 중요한 예배일로 인정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면 칼빈이 교회력을 모조리 비성경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폐지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고, 개혁주의 교회가 모든 교회력을 폐지했다는 주장은 더더욱 가치 없는 것이다. 제네바가 1550년에 주일 이외의 모든 기독론적 성일을 공식적으로 폐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폐지가 성일을 휴무일로 지키는 것을 금지한 것이지, 그 성일들의 정신까지 버린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16세기의 모든 개신교는 중세 전통에 따라 매일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매일 드리는 예배의 관행도 사라지고, 또한 할례일과 수태고지일, 그리고 승천절의 절기준수도 점차 약화되었다. 하지만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과 같은 절기를 준수하는 것은 개혁주의 교회의 소중한 전통으로 남았다. 또한 사순절 준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고난주간을 기념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했다.

       물론 역사적으로 청교도들 사이에서, 때론 개혁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절기준수 전통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개혁주의 교회는 이 절기들이 기독론 중심적인, 즉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간주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존중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세교회는 1년의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력을 만들어 지키도록 했다. 이 교회력은 두 가지의 중심 요소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기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력의 두 번째 구성 요소인 모든 성인들의 날을 폐지했다. 이유는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고난주간-부활절-성삼위일체 주일 같은 전통적 교회력은 그대로 지켰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기념하는 절기는 지켰다.

       성탄절과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은 기독교의 3대 절기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개혁주의 교회 전통의 가장 중요한 절기는 단연 부활절이다. 하지만 부활절과 더불어 성령강림절 즉 오순절 역시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전통의 교회력이다. 그래서 지금도 개혁주의 교회는 성령강림절을 준수하고 있다.

       교회사적으로든 신학적으로든 성령강림절 즉 오순절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키고 있는 유대교 풍습의 맥추절이나, 미국교회 풍습의 추수감사절보다 훨씬 중요한 절기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지상 구원 역사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즉 완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며, 또한 그 날이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세우시리라 말씀하신 교회가 공적으로 태어난 지상교회의 생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에도 일하셨고 우리 주님의 탄생을 주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례를 베푸심으로 공적 사역을 시작하게 하셨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오히려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파송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임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완성하신 구원 사역을 지속적으로 적용하시기 위해 성령 하나님을 자신의 영으로 파송하셨다. 파송된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무관한 독립적인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원을 그분의 모든 지체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성령강림절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 즉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지상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면 덕이 될 좋은 교회절기다. 지상교회의 지체인 모든 성도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제를 기대하며 마라나타를 외칠 수 있는 이유는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상교회가 성령강림절을 기념하고 준수하는 것은 정당하다. 성령 없이 지상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성령 없이는 말씀설교도 신앙교육도 복음전도도 아무런 역사를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 한 분만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치시고 감동을 일으켜 순종하게 하신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신자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 구원의 마지막 사건인 육체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최고 가치, 즉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손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최상의 종합선물세트다.


*위 글은 "개혁정론"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