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얻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칼빈의 견해

[기독교보 2009-05-29 09:14:20]조회 : 100

 

 

칼빈은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 여부를 신중하게 체크할 것을 권한다. “자신을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검토”함으로써 육신적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은 구원의 확신을 너무 쉽게 말하는 현대의 복음주의권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졌다. 칼빈은 택자와 “일시적 믿음”을 가진 자들 사이에 커다란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유기된 자들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 자비하심을 믿는다고 말한다. 경험적으로 볼 때 유기된 자들도 때로 선택된 자들과 거의 꼭 같은 느낌에 의해 감동을 받는다. 하늘 선물과 그리스도를 한동안 맛본다(히6:4-6; 눅8:13). 그러나 영적 은혜의 힘과 믿음의 확실한 빛을 굳게 잡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그들로 죄를 더 확실히 깨닫고 변명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양자의 영이 없이도 그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정도로 그들 마음에 잠입하시기 때문이다 (3, 2, 11).

 

  양낙흥 교수 / 역사신학

 

칼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cognitio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 정신에 계시되고 우리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3, 2, 7). <기독교 강요>에서 구원얻는 신앙에 대한 칼빈의 논의는 주로 스콜라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한 반박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서 칼빈은 서너 가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론을 비판한다. 첫째, “맹신”에 대한 가르침, 둘째, 신앙을 “동의”assent 정도로 취급하여 “지식에서 나오는 단순한 동의”a bare and simple assent arising out of knowledge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마음의 확신 confidence and assurance of heart”를 믿음의 본질에 포함시키지 않는 입장(III, ii, 33), 셋째, 구원의 확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단지 “도덕적 추측”moral conjecture에 의해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맹신”은 구원의 진리에 대한 탐구 작업을 교회에 일임해 버리고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은 모두 진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이다. 칼빈은 교회에 대한 그러한 맹종의 태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칼빈이 보기에 스콜라주의 신학이 단지 “도덕적 추측”에 의해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도덕적 추측에 의해 분별할 수 있다는 스콜라주의적 교리는 아주 위험하다. 모든 이가 자신은 그것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부적합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3, 2, 38). 사람마다 자신은 중생의 증거로 내세울만한 도덕성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었다. 도덕적 추측에 의해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잘못된 또 하나의 이유는, 칼빈에 의하면, “추측이나, 의심과 비슷한 어떤 것”보다 믿음과 상극에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만일 “도덕적 추측”이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면 지금은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자기가 은혜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나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된다(3, 2, 40).

 

칼빈은 믿음의 본질적 특성 중에 “확신”(assurance, securitas)을 강조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확고한 지식, 즉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심”으로써이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단지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의 기능이 포함된다. 믿음이 지식이라 할 때 그 지식은 머리로 하는 이해comprehension보다는 마음의 확신 assurance에 더 가깝다(3, 2, 14). 칼빈에게 있어 진리에 대한 “동의”는 “머리보다는 마음, 이해보다는 성향(disposition)”에 관한 것이다(3, 2, 8). 믿음은 지식이지만 단순한 지성적 이성적 기능으로 얻을 수 있는 일반적 세상 지식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지식이다. 그것은 인간 오감으로 파악하는 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sense perception에 해당하는 그러한 종류의 이해”는 아니다(3, 2, 14). 그것은 성령의 조명과 인치심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영적 지식이다.

 

칼빈은 스콜라주의자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해 나타내는 존경”이 바로 경건 자체라고 오해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러한 “동의”는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 거기에 머무르지”않았다.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이 점에서 마귀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3, 2, 10). 스콜라학자들이 믿음을 단지 지성적 동의로 보고 “마음의 확신”을 간과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 “마음의 확고하고 꾸준한 지속성”에 대한 존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빈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믿음의 으뜸가는 부분”이다(III, ii, 33). 칼빈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 머리로 믿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 본다. “정신이 생각을 부여받는 것보다 마음이 확신으로 채워지는 것이 더 어렵다”(III, ii, 36)

 

칼빈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는 신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못박는다. “구원의 확신에 의지해서 악마와 사망에 대해 자신있게 승리하는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신자가 아니다”(3, 2, 16). 이 점에 대해 칼빈은 단호하다. “천국의 상속을 자신있게 자랑하는 이 외에는 아무도 주 안에서 바른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없다.”(III, ii, 16). 칼빈에 의하면, 확신은 참 믿음의 본질적 요소였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확실히 안다”(요일3:2). 참된 믿음은 의심이나 추측의 여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 . . 추측 혹은 의심과 비슷한 어떤 다른 것보다 믿음에 더 반대되는 것은 없다”(3, 2, 38).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3, 2, 15). 그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불신으로 향하는 고질적 경향이 있기 때문에 “힘든 투쟁hard struggle”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확신이 생긴다고 주장했다(3, 2, 15). 그는 믿음에는 감정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 충만한 확신의 느낌feeling of full assurance이라는 것이 있다(3, 2, 15).” 그러나 친히 “하나님의 선하심”의 “달콤함을 느끼고 체험”truly feeling its sweetness and experiencing it in ourselves 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3, 2, 15). 확신은 감정적 체험을 요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느낌, 혹은 감정을 신앙의 본질적 요소로 본다(III, ii, 39, 16).

 

칼빈의 신앙론에 비추어 볼 때 현대 복음전도에는 몇 가지가 결여되어 있다. 즉 현대 복음전도론은 믿음의 본질적 요소로 지적 의지적 동의만을 강조한다. 이것은 칼빈이 비판한 당시 스콜라주의의 신앙론에 더 가깝다. 즉 현대 복음전도론에는 “마음”의 요소, 혹은 “신뢰”fiducia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칼빈은 믿음의 필수적 요소로서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확신”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대 복음전도론에는 그것이 빠져 있다. 근원적으로 현대 복음전도론에는 인간의 마음에 “인치심”과 “조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강조가 결정적으로 누락되어 있다. “구원얻는 믿음”의 소유를 단지 자연인의 의지적 결단에 달려 있는 것으로 가르침으로써 칼빈이 비판한 바 “스콜라주의적” 믿음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